계양산 일대 탐방(4)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자오당(自娛堂)터’를 찾아서

부평향교에서 자오당터까지는 대략 800미터 정도의 거리이지만 향교 뒤쪽으로 빌라들이 많아 길을 잘 잡아야 한다. 우선 부평향교를 나와 왼쪽으로 향교 담장을 끼고 계속 따라가면 고향골 어린이공원이 나온다.

공원을 지나 오른쪽으로 80여 미터 가면 세븐일레븐 가게가 나오고, 이곳에서 왼쪽으로 계산로21번길 골목을 한 블록 지나면 횡단보도가 있는 사거리가 있다. 횡단보도 위쪽에 300미터를 가면 연무정(국궁장)과 계산 고양골 체육관이 나온다는 표지판이 작게 걸려있다.

횡단보도를 건너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북인천중학교로 들어가는 도로가 보이고 앞쪽으로는 멀리 고양골 공영주차장이라 쓴 표지판이 보인다. ‘이런 곳에 무슨 체육관이 있지’라고 생각하며 계속 길을 올라가면 도로의 끝에 2층의 ‘계산 고양골 체육관’ 건물이 보인다.

계산 고양골 체육관 옥상에 활을 쏘는 연무정이 있다.
계산 고양골 체육관 옥상에 활을 쏘는 연무정이 있다.
겹처마 팔작지붕집인 연무정 건물.
겹처마 팔작지붕집인 연무정 건물.

체육관이라 쓴 글자 위 옥상 난간에 ‘연무정(활 쏘는 곳)’이라는 노란색 바탕의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에 오늘 찾아갈 자오당터가 있다.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3층에 오르면 정면 3칸, 옆면 2칸이지만 콘크리트와 빨간 벽돌로 벽을 마감한 엄청나게 큰 겹처마 팔작지붕의 집이 나온다.

정면은 안에서 밖이 훤하게 보이도록 창문만 달았는데, 처마 밑 넒은 공간에 기단석을 깔고 사대(射臺)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건물 중앙에는 연무정(鍊武亭)이란 글자를 붙였다.

멀리 계양산을 배경으로 과녁이 세 개, 그 양옆으로 풍향기가 가물거리고 앞 양쪽으로는 시동의 안전을 위한 시동대피소가 세 채 지어져 있다. 사대에서 과녁까지 거리는 80간(145m)이라고 한다.

‘자오당터’라고 쓴 비석은 사대에서 화살이 날아가는 가장 오른쪽 과녁 사이에 있는데 옥상 난간 건너편으로 아주 조그맣게 보인다. 이 비석에 다가갈 때는 반드시 국궁을 연습하는 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찾아봐야 안전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계양산을 배경으로 연무정 활터의 과녁이 보인다.
계양산을 배경으로 연무정 활터의 과녁이 보인다.
활터 중간에 있는 _자오당터 비석.
활터 중간에 있는 _자오당터 비석.
자오당터 비석의 왼쪽, 오른쪽, 뒷면에 새긴 글자들.
자오당터 비석의 왼쪽, 오른쪽, 뒷면에 새긴 글자들.

비석 정면에는 ‘자오당터(自娛堂址)’라 쓰여 있고, 오른쪽 면에는 고려 고종 7년 ‘단기 3553년’이라 적혀있다. 단기 3553년이면 서기 1220년(고종 6)인데 ‘계양 자오당기’가 지어진 연대는 1219년 6월이다.

1220년은 이규보가 부사를 마치고 개경의 중앙무대로 복귀한 해이다. 비 왼쪽 면에는 “부평부사 관사로 리규보‘李奎報’가 이름하다”라고 쓰여있고, 뒷면에는 단기 4288년(1955년) 5월 인천시 건립이라 적혀있다. 1955년 당시의 한글 표기법과 햇수를 단기로 표기하던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이규보의 ‘계양 자오당기(桂陽自娛堂記)’

이규보는 1217년(고종 4) 2월 우사간(右司諫)이 됐으나 가을에 최충헌의 한 논단(論壇)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하는 부하의 무고를 받아 정직당하고, 3개월 뒤에는 좌사간(左司諫)으로 좌천된다.

그리고 다음 해에 집무 상 과오를 범한 것으로 단정돼 좌사간마저 면직된다. 이후 1219년(고종 6) 최이의 각별한 후견 덕분으로 중벌은 면하게 돼 계양도호부부사병마검할(桂陽都護府副使兵馬黔轄)로 부임해 13개월 동안 봉직하는 동안 70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계양 자오당기’도 그중 하나로 <동국이상국집> 제24권 기(記)에 실려있으며, 계양도호부사로 부임하게 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이에 그 전문을 실어본다.

- 정우 7년(貞祐, 금나라 선종의 연호로 1219년) 초여름에 나는 좌사간 지제고(左司諫知制誥)에서 계양(桂陽)의 수령으로 좌천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산기슭의 갈대 사이에 있는, 마치 달팽이의 깨진 껍질같이 다 쓰러진 집을 태수(太守)가 살 집이라고 하였다.

그 구조를 살펴보니, 휘어진 들보를 마룻대에 걸쳐놓고 억지로 집이라고 이름했을 뿐이다. 위로는 머리를 들 수 없고 아래로는 다리를 뻗을 수 없다. 더운 때를 당하여 여기에 거처하면 마치 깊은 시루 속에 들어가서 찌고 지짐을 당하는 것 같다.

처자와 종들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모두 들어가 살려고 하지 않았지만, 나는 홀로 즐거워하여 먼지를 쓸고 거처하면서 당(堂)의 이름을 ‘자오(自娛, 자신만이 즐긴다)’라고 써 붙였더니, 손님 중에 그 이름의 연유를 따져서 묻는 이가 있었다.

“지금의 태수는 옛날의 방백(邦伯, 지방의 제후)이라 빈객이 만나 뵙기를 청하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 당(堂)에 오르는 사람들은 다 관원 중의 준수한 인물이며, 선비나 승려의 우두머리인 뛰어난 자들로서 태수와 더불어 그 즐거움을 함께 누리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태수께서 ‘자오(自娛)’라고 당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것은 앞에 든 손님들을 사람 축에 넣지 않는 것입니까? 어찌 사람에게 도량이 넓지 않은 것을 보입니까?” 하였다.

나는 웃으며 말하기를, “손님께서는 어찌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문하성(門下省)의 낭관(郞官)으로 있을 때는 나가면 누런 옷을 입고 하례(下隷, 하인)가 앞에서 갈도(喝道, 관리가 행차할 때 길을 비키라고 소리치는 일)하고, 들어오면 맛 좋은 음식이 앞에 가득하였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고량자(膏粱子, 부귀한 집에서 맛 좋은 음식만 먹고 고생 없이 자라난 사람)들에게는 비록 부족한 것 같지만 나에게는 너무 지나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인(詩人)은 운명이 박하다’는 것은 예전부터 그러한 것이어서, 나도 갑자기 하루아침에 유사(有司, 직무)의 무고(誣告, 고발)를 입어 이 유황(幽荒, 어둡고 거칠다)하고 비습(卑濕, 바닥이 낮아서 습기가 많음)한 곳에 오게 되었으니, 이는 아마 하늘이 시키는 일이고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집이 크고 호화로우며 거처하는 것이 화려하여 스스로 폄손(貶損, 낮게 평가하다)된 것을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면, 하늘이 나를 처우하는 뜻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더욱 화를 부르기에 알맞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집의 누추한 것은, 홀로 나만이 즐거워할 바이고 여러 사람들은 매우 이맛살을 찌푸릴 것입니다.

어찌 나 자신의 편벽된 기호(嗜好, 취미나 취향)로써 남에게 같이하기를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향연(享宴)의 설비가 있고 풍악과 여색(女色)의 즐거운 일이 있다면, 나 역시 무슨 마음으로 혼자만이 그 즐거움을 누리면서 손님들과 함께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고을에 살고 이 당에 거처하는 동안에는 그러한 즐거움이 없을 것은 분명합니다. 또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그러자 손님이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따라서 이것을 기록하였으니, 때는 기묘년(1219년) 6월 24일이다. -

이규보가 계양부사로 부임하며 조강을 건널 때 귀양살이를 말하는 ‘적거(謫居)’라는 표현을, 자오당기에서는 ‘좌천되었다’라는 표현을 직접 드러내는데, 이는 계양부사로 부임하는 자신의 심정을 단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이런 상황이니 부사가 머무는 관저가 곱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달팽이의 깨진 껍질같이 다 쓰러진 집’, ‘위로는 머리를 들 수 없고 아래로는 다리를 뻗을 수 없다.’라는 표현은 중앙에서 좌천당한 심정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리라.

이런 심정의 역설적인 표현이 자신의 거처에 ‘자오당(自娛堂, 자신만이 즐기는 집)’이란 이름을 붙인 이유일 것이다.

‘징매이고개’의 유래

경명대로에서 본 계양산.
경명대로에서 본 계양산.

다시 길을 내려와 계산로를 따라 계양산 방향으로 곧장 200여 미터를 가면 왕복 8차선의 경명대로가 나온다. 현재 경명대로라 붙은 이 길은 14km 정도의 거리이지만 오르막부터 내리막까지는 대략 8km 정도이다.

인천에선 가장 크고 높은 고개로 계산동에서 서구 연희동을 연결해주는 주요 도로일 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삼남 지방과 수도인 개경과 한양을 잇는 중요한 통로였다.

인천 사람들은 이 고개를 보통 ‘징맹이고개’라 부른다. 고려 초에는 고을 이름을 따서 ‘수주고개(樹州峴, 수주현)’라 했다.

고려 제25대 충렬왕은 태자로 책봉된 10년 후인 1271년 원나라에 볼모로 가 있다가 세조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을 한다.

그리고 1274년 부왕인 원종이 붕어하자 고려에 돌아와 즉위했으며, 원나라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이는데 앞장섰다. 또한 왕권이 강화된 후에는 연회와 매사냥을 즐겼다.

당시 송도(개경) 한복판에 매방이 있었으나 민가의 닭과 개를 함부로 잡아 죽이는 터에 백성의 원성이 자자했다. 이에 도성 안에 있는 매방을 옮길 것을 지시하고, 여러 곳의 후보지를 탐색한 결과 ‘수주고개’ 부근이 적당하다고 여겨 이곳으로 응방(鷹坊, 매방)을 옮겼다.

충렬왕은 재위 시 다섯 차례나 계양도호부에 들러 좋은 매를 징발해 사냥했다. 이후 매를 징발했다는 의미로 ‘수주고개’를 ‘징매이고개(徵鷹峴, 징응현)’로 고쳐 부르게 됐다고 한다.

후에 발음이 바뀌며 ‘징맹이고개’가 되었고, 다시 한자로 표기하면서 ‘경명이고개(景明峴, 경명현)’로 바뀌었다고 한다. 한편 ‘경맹이고개’라고도 하는데, 이는 충렬왕이 매사냥을 즐길 때 매를 경쟁시켜 산짐승을 잡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도 전한다.

아무튼 충렬왕이 계양도호부를 폐하고 길(吉)한 고을이라고 길주목(吉州牧)으로 고을을 한 등급 승격시킨 것을 보면 매사냥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중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이름 ‘천명고개’의 유래

징매이고개 정상부에 설치한 생태통로 터널.
징매이고개 정상부에 설치한 생태통로 터널.

징맹이고개(景明峴)와 관련해 ‘악명 떨친 징맹이고개 도둑’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징맹이고개는 옛날부터 지형이 험준하고 숲이 무성했기 때문인지 도둑이 득실거려 임꺽정(林巨正)도 한 때 이 계양산(桂陽山) 징맹이고개에 자신의 소굴을 가지고 부하들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이런 설화를 바탕으로 해서인지 홍명희의 <임꺽정>에는 임꺽정이 스승 갖바치에게 이곳에서 무술을 배우는 장면이 나온다.

- 1560년(명종 15) 부평도호부 부사로 부임한 신건(申健)은 자기가 다스리는 고을에 악명 높은 도둑들이 들끓고 있다는 것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포졸들을 거느리고 이 징맹이고개의 도둑 소탕 작전에 나섰다.

그런데 부사가 포졸들을 거느리고 징맹이고개의 어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아주 키가 작은 놈 하나가 칼을 들고 부사 앞을 가로막으며 말하기를, “부사, 자는 범 코 찌르지 말고 큰코다치기 전에 어서 돌아가는 게 어떻소?” 하였다.

아주 당돌한 놈이었다. 주먹만 한 놈이 안하무인이요, 방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포졸들이 참다못하여 고함을 질렀다. “이 무엄한 놈 감히 어느 어른의 앞이라고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려대느냐?” 그러면서 포졸들이 작은 놈에게 달려들어 생포하려고 했다.

그러자 이 작은 놈은 잽싸게 몸을 빼쳐 옆 바위 위로 날아올라 앉았다. 그리고는 “하하하!” 하고 호기 있게 웃어대며 “흥, 어리석은 것들. 나를 잡아가려고 했겠다? 어림없는 개수작 떨지 말고 너희들의 패랭이나 벗어 봐라.” 하는 것이었다.

무슨 소린가 하고 패랭이를 벗어 보았더니, ‘아! 이게 웬일인가?’ 어느새 그가 칼을 써서 그 많은 사람의 패랭이 꼭지가 모조리 잘려서 땅에 떨어져 있었다. 참으로 귀신이 탄복할 만한 재주였다.

이 날렵한 검술에 혼비백산한 부사와 포졸들은 도둑을 소탕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냥 도망을 쳐 산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그 뒤로 징맹이고개 도둑들은 더욱더 악명을 높여 갔다고 한다. -

이런 까닭에 이 고개를 넘으려면 많은 사람이 떼를 지어서 함께 넘어야만 변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징맹이고개를 항간에서는 ‘천명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징매이고개 생태통로

징매이고개 정상부에 설치한 생태통로 터널.
징매이고개 정상부에 설치한 생태통로 터널.
징매이고개 생태통로 터널 안에서 바라본 계산동 방향.
징매이고개 생태통로 터널 안에서 바라본 계산동 방향.

한참 인천 기행 코스를 만들어 안내하던 1990년대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징매이고개 정상부는 자동차도로로 인해 계양산과 철마산은 끊어져 있었다. 이에 환경단체 등 시민단체에서 생물 이동로를 복원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인천시는 2007년 7월부터 2009년 8월까지 계양산과 철마산의 폭 100미터 정도의 녹지축을 연결하는 생태통로를 만든다. 그리고 생물서식지를 조성하기 위해 생태통로에 돌무더기, 나뭇더미, 교목, 관목, 조류 먹이 공급대, 저류조 등 시설물을 설치한다.

그냥 일반인들이 보면 ‘고갯마루에 뭔 터널을 이렇게 길게 조성해서 연결했지?’ 하며 고개를 갸웃할 것 같다. 그러나 생태통로를 만들려면 이 정도 규모의 숲 조성은 돼야 할 것 같다. ‘중심성 터’ 비석을 보려면 이 터널을 지나서 뒤쪽에 설치된 나무계단으로 올라 길을 건너야 한다.

계단을 올라 터널 중앙부에 다다르면 서구 연희동으로 내려가는 8차선 도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도로 너머로 바다와 강화도가 보였는데 한층 높이 올라간 아파트들로 시야가 가려 바다는 보이지 않고 강화도 마리산과 이어지는 산자락만 아스라이 보인다. 점점 높아지는 마천루로 인해 탁 트인 자연을 바라보는 조망권이 세월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징매이고개 생태통로로 올라가는 나무계단.
징매이고개 생태통로로 올라가는 나무계단.
징매이고개 생태통로에서 바라본 서구 일대. 강화도 마리산이 아스라이 보인다.
징매이고개 생태통로에서 바라본 서구 일대. 강화도 마리산이 아스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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