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양산 일대 탐방(2)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부평부사 선정비림(富平府使善政碑林)

부평도호부 관아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부평도호부 관아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며칠 전 사진을 찍으러 부평도호부 관아에 갔더니 몇 년 전에 도호부 안에서 강의할 때와 또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다.

전에 도호부 관아에 들어가려면 부평초등학교 교정을 통해 철제 울타리 문을 열고 갔었다. 그런데 2022년에 담벼락을 둘러 독립공간을 만들었으며, 학교를 통해 들어가지 않게 뒷문 오른편 담벼락에 따로 솟을대문을 세워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대문 안쪽에는 부평도호부관아 안내소 건물이 있고, 건물 뒤 끝에는 화장실도 설치했다. 이 건물 뒤 담벼락 앞에 ‘부평부사 선정비림’이 있다. 이곳 선정비들은 모두 21기이다. 인조 6년(1628)부터 고종 25년(1888)까지 근무했던 역대 부평부사 중 선정을 베푼 부사들 18기와 경기도관찰사 3기, 모두 합해 21기가 서있다.

예전에 선정비들은 계산동 963-56번지 도로변에 일렬로 22기가 세워져 있어, 이곳을 ‘비석거리’라 불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비석들이 쓰러지거나 땅에 묻혀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그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선정비라고 세웠지만 꼭 선정을 베푼 부사의 것만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모두가 알기 때문이었다.

부평부사 선정비림(富平府使善政碑林).
부평부사 선정비림(富平府使善政碑林).

이러다 보니 광복 이후에는 비석을 뽑아 마을 도랑의 다리로 쓰거나 마을 입구의 안내판으로도 사용하는 등 훼손이 심해졌다.

이에 1960년부터 부평향교장과 계산동장이 비석거리에 흩어져 있던 비석 9기는 부평향교 홍살문 앞으로, 비석 11기는 계산동사무소 앞으로 옮겨 세웠다.

이후 1976년에는 계산초등학교 진입로로, 1986년에는 인천국제벨로드롬(계산동 싸이클경기장) 안 북쪽으로, 1998년에는 계양문화회관 안 서쪽으로, 2003년에는 현재 이곳으로 이전해 관리하고 있다.

비석에 새긴 글을 보면 청덕애민비(淸德愛民碑)·청덕애민선정비(淸德愛民善政碑)·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우혜애휼선정비(宇惠愛恤善政碑)·포덕선화선정비(布德宣化善政碑) 등이 새겨져 있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비림 맞은편의 안내판을 보면 된다.

어사대(御射臺)와 장주초석

행방이 묘연해진 석조물들.
행방이 묘연해진 석조물들.

예전에는 ‘부평부사 선정비림’ 왼쪽으로 석등, 돌절구, 맷돌, 비신(碑身), 석조(石槽, 돌을 파서 물을 부어 쓰게 만든 돌그릇) 등을 노천에 전시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행방이 묘연하다.

부평도호부 관아를 독립공간으로 꾸미며 다른 곳으로 옮겨 전시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공사 중 사라졌다고 한다. 공사가 진작 끝났음에도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니 찾지 않는 것인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인지 답답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욕은지를 등지고 어사대와 그 오른쪽 버드나무 아래로 장주초석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큰 돌의 대석 위에 장대석이 놓였는데 큼직한 가로 글씨로 어사대(御射臺)라 쓰고 그 왼쪽에 세로로 광서정해중수(光緖丁亥重修)라 새겼다.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3호로 어사대(御射臺)란 ‘왕이 활을 쏜 곳’이란 의미이다. 광서(光緖)는 청나라 덕종 광서제의 연호인데, 정해(丁亥)년은 우리나라 고종 24년(1887)이니 이때 중수했다는 내용이다.

과거와 현재의 어사대 모습.
과거와 현재의 어사대 모습.
아문에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주초석.
아문에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주초석.

예전에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어사대 표지석만 전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인조가 활을 쏘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인조가 부평에 들렀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기록에 의하면 정조 21년(1797) 김포 장릉을 거쳐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지금의 융릉)에 갈 때 부평도호부를 방문해 점심 수라를 들고 휴식을 취하며 활을 쏘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욕은지와 어사대는 원래 이곳보다 동쪽에 있던 것을 고종 24년 중수하며 현재의 위치로 옮기며 보수했다고 한다.

버드나무 아래 장주초석 4개와 초석 2개가 늘어서 있는데 장주초석은 관아의 출입문으로 사용하는 누문(樓門, 다락집 밑으로 드나들게 된 문)인 아문(衙門)에 사용된 초석으로 보인다.

그런데 뒷면을 보니 장주초석을 길게 파 오석으로 마감하고 ‘자연관찰원, 탐구력을 키우자, 자연학습원, 자세히 관찰하자’라는 글들을 새겨 넣었다. 1989년 전교어린이회 총회장이 기증했다고 하는데 당시 학교에서 관리했기에 좋은 의도로 새겼겠지만 문화재에 대한 무지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욕은지((浴恩池)

1970년대와 현재 욕은지와 돌다리 모습.
1970년대와 현재 욕은지와 돌다리 모습.
1990년대와 현재 욕은지와 돌다리 모습.
1990년대와 현재 욕은지와 돌다리 모습.

인천시의 문화재자료 제1호인 욕은지는 어사대와 함께 중수된 것이다. 역시 어사대와 마찬가지로 정조가 활을 쏜 후 이곳에서 손을 씻었다고 전해진다.

욕은지의 크기는 동서 길이 18m, 남북 길이 16m로 지금은 깔끔하게 다듬은 장대석으로 사방을 쌓아올려 정갈하게 보이지만, 과거의 사진들과 비교해 볼 때 엉성한 것 같지만 거칠게 다듬어진 예전의 장대석 모습이 훨씬 정감이 간다.

1968년 동헌(내아로 추정)을 이곳으로 옮기기 전의 욕은지 사진을 보면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욕은지라 쓴 장대석도 연못을 둘러싼 제일 윗돌에 놓였음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겨울에 찍은 사진과 2000년대 초반 이후 찍은 사진을 보아도 욕은지라고 쓴 장대석이 아래로 옮겨졌고, 가운데 둥근 섬으로 건너가는 돌다리와 받침돌도 발을 디디는 장대석 위만 매끄럽게 다듬고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깨어진 돌을 그대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너무 다듬은 돌로 사방을 마감해 예스러운 정취가 없어 아쉽다.

우리나라 정원의 특징 중 하나로 연못은 음양의 원리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못의 네모난 형태 윤곽은 땅을 나타내는 것으로 음(陰)을 상징하고, 연못 속의 둥근 섬은 하늘을 나타내는 것으로 양(陽)을 상징한다.

따라서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을 쌓아올린 것은 기본적으로 음양이 결합해 만물을 생성한다는 음양오행설의 원리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둥근 섬은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을 상징하기도 한다. 욕은지도 이 음양오행설과 신선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욕은지는 1970년대 중반까지도 인근 개울에서 물을 공급해 이 연못에 고기가 뛰어놀았다고 한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주변에 건물들이 많이 생기며 개울이 사라져 물을 끌어들일 수원지가 없어졌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며, 비가 오더라도 흙바닥으로 스며들기 때문에 연못에 물이 고여 있는 것을 보기 힘들다.

계산동 은행나무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1호인 계산동 은행나무.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1호인 계산동 은행나무.

인천시 기념물 제11호인 계산동 은행나무와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 두 그루는 부평초등학교 교정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들을 가까이서 보려고 하면 부평초등학교 정문에 있는 수위실에서 방문 기록을 하고 명찰을 받아야 한다.

두 그루 은행나무는 모두 수령이 500~600살로, 태종 18년(1418) 이곳에 부평도호부를 완공할 때 주변 환경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심은 풍치목으로 추정된다.

높이 25m인 계산동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의 보살핌 속에 살아온 나무로,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인정돼 인천시 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단다. 그러나 시 지정 기념물 나무로서는 높이나 굵기에 있어 웅장한 맛은 떨어진다. 다만 가지가 삼각형 모양으로 잘 퍼져서 자라 잎이 무성한 여름이나 가을에 보면 안정감을 주며 멋들어져 보인다.

1990년대에 부평도호부 일대를 답사하며 동네 어르신을 만났을 때, 경술국치 전날 이 은행나무에 구렁이들이 모여들어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인천의 설화나 계양구의 설화들을 살펴봐도 이런 내용의 이야기는 기록된 것이 없다. 나라에 우환이 들었을 때 구렁이가 울었다는 이야기들이 전국적으로 많이 퍼져있는 것을 보면 어느 호사가가 만든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계산동 은행나무에서 왼쪽으로 학교 건물을 바라보면 건물 바로 앞에 하늘을 향해 굵은 두 가지로 나뉘어 곧게 뻗어 오른 은행나무가 보인다.

밑동의 둘레가 계산동 은행나무보다 훨씬 굵고 웅장하게 자랐는데 건물에 가까이 있어 가지치기를 많이 해서 옆으로 가지가 퍼지는 것을 막았다. 높이가 20m인 까닭도 가지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기념물이 아닌 보호수로 지정된 것 같다.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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