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마켓 전체반환 완료...1939년 일제 조병창 이후 84년만
‘금단의 땅’ 1996년 미군기지 반환 시민운동 6년 만에 결실
674일 천막농성ㆍ인간 띠잇기ㆍ24시간 감시단ㆍ걷기대회 등
진영을 아우른 운동에 시민들 대대적 참여 민주주의 모범

인천투데이=이종선 기자 | 2023년 12월 20일 캠프마켓으로 불리는 부평 미군기지가 마지막 남은 D구역까지 모두 반환됐다. 1939년 일제강점기 일본 육군 군수공장인 조병창부터 광복 이후 주한미군기지로 사용된 이후 84년만이다.

A·B·C·D구역으로 나뉜 캠프마켓은 전체 44만5921㎡ 규모다. 인천시는 오는 2024년 상반기를 목표로 ‘캠프마켓 기본계획 마스터플랜(종합계획)’을 수립 중이다. 인천제2의료원과 인천식물원, 역사박물관 등을 조성하는 내용이 담긴다.

부평 도심에 생긴 새로운 땅은 향후 시민역사공원으로 조성되고, 각종 공공시설이 들어서며 원도심에 활력을 불어넣을 예정이다. 이 기반에는 인천시민들이 함께한 미군기지 반환운동이 있다.

1948년 부평 애스컴시티 당시 모습.(사진제공 부평구)
1948년 부평 애스컴시티 당시 모습.(사진제공 부평구)

친일로부터 시작된 캠프마켓 아픈 역사

캠프마켓이 금단의 땅이었던 역사는 대한제국 시기 친일파들로부터 시작된다. 캠프마켓 인근 430만 평에 이르는 땅은 을사늑약으로 자결한 순국지사 민영환 소유였다. 이 땅은 민영환의 식객이자 정미칠적 중 한 명인 송병준에게 넘어간다.

이후 1920년대 일제는 캠프마켓 일대를 매입하기 시작했고, 1939년 조병창 시설로 조성했다. 1945년 광복 직후 미군은 일본군 주둔지를 그대로 접수했고, 애스컴시티(ASCOM City)이라 불리는 미육군군수지원사령부(Army Support Command)로 사용했다.

1973년 주한미군은 애스컴시티는 공식적인 기능을 마치고 해체했다. 이어 훈련 보급시설만 잔류하고 캠프마켓으로 축소해 운영했다. 이후 냉전체제 해소에 따른 인천지역 시민사회의 끊임 없는 요구로 캠프마켓은 2002년 한미연합토지관리계획(LPP, Land Partnership Plan)에 따라 반환을 결정했다.

캠프마켓 인간띠잇기 행사.
캠프마켓 인간띠잇기 행사.

경찰진압에도 지속된 ‘우리 땅 되찾자’ 구호...인천시민회의 결성

1990년대 초 냉전체제 해체 이후 지역 시민운동사회는 주한미군기지 반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어 민주주의 민족통일 인천연합이 1996년 5월 17일 부평역 광장에서 주최한 5.18 광주민주항쟁 16주기 기념식에서 ‘우리 땅 부평미군기지를 되찾자’는 구호가 등장했고, 10만인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이후 천주교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부평미군기지 반환운동을 위한 공개설명회를 개최하며 그 필요성을 알렸다. 같은해 7월 평화와참여로가는시민문화센터(인천평화복지연대 전신) 등 인천 시민단체 14개가 중심으로 ‘부평미군기지 인간띠잇기 사업본부’를 구성했다.

부평미군기지를 에워싸는 인간띠잇기 행사는 광복절 시기에 맞춰 1996년 8월 11일 개최하기로 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를 불허했고, 이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해 행사에 참여하던 대학생과 시민 64명이 연행됐다. 8명이 불구속 입건됐고, 49명은 구류 등의 처벌을 받았다.

미군기지 반환을 위한 한일 연대활동 차원에서 오키나와 활동가들이 인천을 방문한 모습.
미군기지 반환을 위한 한일 연대활동 차원에서 오키나와 활동가들이 인천을 방문한 모습.

오키나와 주일미군기지 활동가 참여 국제연대

이후 인천지역 시민사회는 더욱 조직적인 운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뭉치기 시작했다. 우리 땅인 주한미군기지를 반환해야 한다고 생각한 단체들은 1996년 9월 ‘우리 땅 부평미군기지 되찾기 및 시민공원 조성을 위한 인천시민회의(이하 인천시민회의)’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1997년 5월 ‘부평미군부대 시민공원 조성을 위한 5.14 인천시민걷기대회’를 개최했다. 이 행사에는 한국처럼 미군이 주둔하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 반환운동을 전개한 일본인도 함께해 1000여명이 참여했다.

인천시민회의는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캠프마켓 정문 앞에서 토요집회를 약 150회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주한미군 범죄 실상과 반환의 필요성을 시민에게 알렸다. 2000년도 들어 반환운동은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Status of Forces Agreement) 개정운동과 연계해 이뤄졌고, 인천시민회의는 같은해 5월 캠프마켓 정문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부평미군기지 반환 농성장.
부평미군기지 반환 농성장.

674일 농성 끝에 2002년 3월 캠프마켓 반환 결실

당시 김성진 인천시민회의 집행위원장이 시작한 단식농성은 이후 674일간 이어진 천막농성으로 이어졌다. 이는 부평미군기지 반환이 결정되는 2002년 3월까지 지속됐다. 이후 2001년 4월 인천시민회의는 1만인 선언운동, 24시간 시민감시단 운영, 인천시민 강강술래(인간띠잇기) 개최 등을 예고했다.

700여명으로 이뤄진 24시간 시민감시단은 한달간 캠프마켓 출입구 4개와 주변 아파트 옥상에서 미군기지를 감시했다. 미군기지 인력과 차량통행, 기지시설 사용 현황 등을 확인한 결과를 토대로 유휴시설 반환을 요구하겠다는 방침이었다.

같은해 8월에는 시민 20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부평미군기지 전체를 에워싸는 인간띠잇기 행사가 1996년 이후 다시 열렸다. 진풍경이 펼쳐진 이 행사에는 시민사회단체뿐만 아니라 대우자동차(현 한국지엠) 노조를 비롯한 활동가, 인근 주민도 함께했다.

마침 같은해 11월 국방부 용산사업단은 주한미군과 LPP 협의에 따라 주한미군기지를 통폐합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여기에 캠프마켓은 빠졌다. 인천시민회의는 2002년을 부평미군기지 반환의 해로 선포하고 투쟁 수위를 높였다.

이어 2002년 2~3월 부평미군기지 농성장에 불빛을 모으자는 캠페인과 함께 모금운동과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한상욱 인천시민회의 공동대표는 미 대사관을 찾아가 1인시위를 했고, 인천시민회의 회원들은 연대단식투쟁에 동참했다. 결국 한미는 2002년 3월 29일 캠프마켓을 LPP 반환 대상에 포함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부평미군기지 반환운동 모습.
부평미군기지 반환운동 모습.

정치쟁점화 제도권 참여 이끌어...캠프마켓 활용방안 시민목소리 담아야

캠프마켓 반환운동 과정에서 또 다른 한 축을 담당한 모임은 ‘부평미군부대 공원화 추진 시민협의회(이하 부공추)’이다. 부평지역에서 과거부터 연고를 둔 단체들로 이뤄진 부공추는 반환보다는 ‘이전’에 초점을 맞췄지만, 미군기지를 부평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데 의견은 같았고 필요할 때마다 인천시민회의와 연대했다.

인천시민회의가 시민운동 활동가 중심으로 여론을 조직했다면, 부공추는 제도권 내에서 캠프마켓 이전 사안을 정치쟁점화 했다. 부공추는 국회와 정부를 상대로 한 청원 서명운동을 개시했고, 1997년 12월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들에게 미군기지 이전에 대한 공약 반영 여부를 질의해 답변을 얻기도 했다.

이어 2000년 15대 총선에 출마한 인천지역 후보자 전원에게도 캠프마켓 이전에 대한 정책공약화 여부를 조사해 지역의제로 끌어올렸다. 또한 당시까지 성역으로 여겨진 미군기지 문제에 대해 주민의사를 묻을 수 있게 부평구 조례 제정을 청원하는 주민운동도 벌였다. 직접민주주의의 모범사례다.

1995년 최용규(맨앞) 민선1기 부평구청장이 당시 최기선(뒤 가운데) 인천시장에게 캠프마켓을 소개하고 있다.
1995년 최용규(맨앞) 민선1기 부평구청장이 당시 최기선(뒤 가운데) 인천시장에게 캠프마켓을 소개하고 있다.

부평구와 인천시의 역할도 컸다. 민선1기 당시 최용규 부평구청장은 임기 첫해인 1995년부터 부평미군기지 이전을 추진했다. 최 전 구청장은 부평을 방문한 최기선 인천시장에게 미군기지 반환 후 활용계획을 설명했고, 최 시장은 이에 동의하며 힘을 보탤 것을 약속했다.

시민운동으로 시작된 부평미군기지 반환 요구는 향후 민·관이 협력해 2002년 3월 직접적인 성과를 도출했다. 하지만 실제 반환은 2019년부터 시작해 2023년까지 21년이나 지나 이뤄졌다.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한이 서린 곳이며, 시민의 힘으로 되찾은 땅이다. 캠프마켓은 이를 기억하는 방향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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