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63)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마을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4.19 혁명 이후 인천의 기자가 600여명을 헤아릴 정도로 국내 언론사의 숫자가 급증했고 이에 따라 사이비 언론의 폐단도 심해졌다. 언론의 자유를 누렸다기보다는 언론을 사적 이익과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사이비 언론이 급증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여러 부정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언론의 자유에 있어서는 비교적 풀어놓았기에 이미 사이비 언론으로 인한 폐단이 심했으나, 4.19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사이비 언론의 폐단은 매우 심각해졌다.

폐단에도 불구하고 사이비 언론의 방종은 언론 자유라는 헌법에 보장된 권리로 보호됐고, 장면의 민주당 정권은 이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결국 사이비 언론의 행태가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하자 참다못한 일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는 일도 있었다.

한국일보는 사설에서 ‘제1공화국은 경찰로 해서 망했고, 제2공화국은 기자로 해서 망하리라는 소리까지 들린다’고 쓰기까지 했으니, 사이비 언론의 폐단이 얼마나 심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논산훈련소 주변에 사이비 기자 400여명이 포진하고 있었고 이들이 각종 비리를 저지르자 논산 시민들이 악덕기자 물러가라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한국일보는 ‘기자가 취재한 기자군-공갈기자’라는 연재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공갈 기자와 진드기 기자들에게는 전직이 있다. 연무대 주변에 진을 친 이들의 대부분은 전직이 헌병대 문관 아니면 형사, 또는 CIC 군관, 이밖에 퇴역 군인이다. 그래서인지 진드기 기자들의 취재 태도는 이미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보고 듣는 것이 아니고 드러나지 않은 범죄를 탐색하고 사람을 취조하는-말하자면 범죄 수사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한국일보의 기사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이들 사이비 기자들은 언론 보도가 목적이 아니라 금전적 이익을 목적으로 취재를 벌였다. 기자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고 기자증을 가지고 생계를 해결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기자증을 판매하는 사이비 언론사도 많았다.

가뜩이나 억눌렸던 정치적 욕구가 폭발해 4.19 이후 국내 곳곳에서 시위가 일상화되다시피 하고,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진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극심한 혼란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사이비 언론으로 인한 폐해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경인 제1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사진출처 인천시)
경인 제1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사진출처 인천시)

이렇듯 극심한 사회 혼란상이 지속됐기에,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자 적잖은 신문이 쿠데타를 지지하고 나선 것은 일견 납득할 만한 일이기도 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1961년 5월 16일 새벽에 KBS를 점령하고 비상계엄령으로 언론출판을 사전 검열하는 언론 탄압을 시작했지만, 언론사의 보도는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동아일보는 ‘5.16 군사혁명을 다행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보도했고, 조선일보는 ‘혁명의 공약과 국내외의 기대’ 사설에서 구국운동이 절실했다며 쿠데타를 옹호하는 논조의 글을 실었다. 쿠데타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자 신문들은 심지어 박정희의 지도자 이미지를 만드는 언론플레이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쿠데타 세력은 1961년 5월 23일 ‘사이비 언론인 및 언론기관 정화 방안’을 발표하고 당시에 등록된 국내의 언론사 916개 중에서 일간지 39개(중앙지 15개, 지방지 24개), 통신사 11개, 주간지 31개만을 남기고 모두 폐간시켰다.

언론 정화 방안이 발표된 직후 26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혁명 완수로 총진군하자’는 제하의 사설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비민주적인 방안이 필요하다는 희한한 논리를 설파하기도 했다.

쿠데타에 호의적이었던 것은 민족일보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민족일보의 조용수는 박정희의 좌익 경력을 보고 쿠데타 군을 혁명 세력으로 착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민족일보는 쿠데타 세력에 의해 폐간됐고 조용수는 사형을 당했으니, 당시 언론과 언론인들이 얼마나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할 능력과 자질이 부족했고 언론 철학 또한 빈곤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군사 정권이 들어서고 이어진 언론 탄압은 인천의 언론 지형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당시 군사 정권에 자행된 만행의 후유증이 남아 있고, 인천의 언론 환경이 중앙 종속적인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물론 이것은 비단 인천만의 문제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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