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64)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마을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주간인천>을 모태로 한 <인천신문>은 1960년 8월 15일에 허합이 창간했다. 허합은 한염해운에 입사해 전무를 지낸 기업인으로, <주간인천>을 인수해 운영하다 <인천신문>을 창간했다. <주간인천>에 근무하던 인력을 기반으로 하고 사옥으로 한염해운의 신포동 창고를 임대해 창간했다.

새로 창간한 <인천신문>의 주필에는 <주간인천>의 고일을 임명했고, <주간인천>의 편집인 김응태를 편집국장에 임명했다. <주간인천>의 주요 인물들이 그대로 <인천신문>으로 옮겨온 것이다.

‘인천석금’의 저자 고일과 김응태는 인천 언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다. 김응태는 <대중일보>, <인천신보>, <주간인천>을 거쳐 <인천신문>의 편집국장으로 옮겨왔고 부사장까지 지냈다.

1966년 <경기일보>로 자리를 옮겨서 편집국장과 부사장을 역임했고 군사정권의 언론통폐합 이후 언론계를 떠났다. 인천 언론계의 태동과 발전을 같이 한 인천 언론인이었다.

<인천신문>이 창간되고 1년도 채 안되어 박정희의 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인천신문>도 쿠데타로 인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당시 군사 정권의 통행금지 조치로 새벽에 배달을 하는 많은 조간신문들이 배달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인천신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로 인해 조간신문들이 석간으로 전환하여 발행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인천신문>도 1961년 5월 17일자 사고에서 임시적으로 석간으로 전환한다고 밝히고 있다.

“본사에서는 군사쿠데타로 인한 비상계엄 선포로 통행금지 시간의 연장 때문에 17일부터 석간으로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워낙 본지는 새벽배달을 해왔습니다만, 앞서와 같은 사정으로 임시 조치를 취하고 뉴스 제공 시간을 압축키로 하였사오니 독자 여러분의 해량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사진출처(픽사베이).
사진출처(픽사베이).

군사정권은 1962년에 들어서서는 윤전기 시설을 갖추지 못한 신문사를 폐간시켰는데, <인천신문>은 서울의 한 신문사에서 윤전기를 들여와서 신문을 계속 발행했다. 또한 군사 정권의 언론 기사 통제가 심해지자 이를 우회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학생 백일장을 지역 신문사로서는 처음으로 실시하기도 했고, 기사 중간에 광고를 삽입하는 파격적인 편집도 시도했으며, 영화평을 싣기도 했다. 또한 핸드볼 대회와 4도시 고교야구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64년에는 인천에서 전국체전이 열렸는데, 이는 해방이후 인천에서 치러진 가장 규모가 큰 행사였다. 전국체전의 성공을 위해 인천의 언론들도 적극적으로 역할을 했는데, <인천신문>도 전국체전 소식을 위한 지면을 대폭 할애하여 행사 성공을 위해 힘을 보탰다.

다만 이런 대규모 행사를 취재하기에는 신문사의 여건이 좋지 않아서 인천교육대학생 10여명을 인턴기자로 채용해 부족한 인력을 보완해 신문을 제작했다.

1965년에 <인천신문>은 고일과 김응태 등 12명의 집필위원을 선정해 경기연감을 발행했는데, 책임 있는 지역 언론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였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당시 유명한 학자와 논객 등을 초청해 인천 지역 언론인 교양 강좌도 개설하는 등 지역 언론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천신문>은 유무형의 탄압을 받아 경영이 어려워졌는데, 그 배경에는 <인천신문> 사장 허합의 정치적 관계가 원인이었다는 시각이 있다.

허합은 1954년에서 1960년까지 인천시장을 지낸 김정렬과 친밀한 관계였는데,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군사 정권의 실세이자 김정렬과 정치적 라이벌 관계였던 류승원이 허합을 부당하게 탄압했다는 시각이다.

<인천신문>에 대한 탄압이 지속되던 중, 허합은 수재의연금을 횡령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됐는데, 최종적으로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다. 그러나 이미 횡령범으로 매도돼 명예에 상처를 입은 허합은 언론계를 완전히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인천신문>은 1968년 8월 15일자로 <경기연합일보>로 제호를 바꿔 변신을 도모했다. 인천 뿐 아니라 경기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신문을 지향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허합 사장의 횡령사건이 1969년 1월에 일어났고, 무죄가 입증됐지만 이 사건은 허합 사장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결국 허합은 신문사 운영에서 물러났고, 1969년 2월 7일에 신문사 소유권이 무역회사인 ‘불이무역’으로 넘어갔다. 곧이어 <경기연합일보>는 인천을 떠나서 1969년 4월 28일에 수원으로 본사를 옮겨갔다. 그리고 1970년 10월 1일에는 <연합신문>으로 다시 제호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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