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60)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마을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라디오 방송은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주요한 매체로 기능을 했고,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로서 오랜 기간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TV가 등장하고 난 이후에 미디어의 왕좌 자리를 넘겨줬다.

한국에 TV가 처음 소개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였다. 1954년 미국 가전제품 회사 RCA 한국대리점이 TV 수상기를 진열하고 서울 시내 풍경을 화면에 보여준 것이 최초로 한국에 TV가 등장한 것이라 보인다.

이것은 단순히 TV 수상기에 화면을 띄워 보여준 것이었고, 정식으로 TV 방송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정식으로 한국에서 TV 방송이 송출된 것은 한국RCA연합회사가 호출부호 HLKZ로 상업 방송을 실시한 1956년 6월 16일이었다. 한국 최초의 TV 방송이자, 민간 상업방송이기도 했다.

HLKZ TV는 방송 허가를 담당하는 정부 부처로부터 허가를 받는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방송국 창립자인 황태영이 당시 대통령 이승만에게 직접 호소해 가까스로 설립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황태영은 미국 RCA의 한국 대리점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공보부의 의뢰로 미국에서 방송 기자재를 도입하며 RCA로부터 받은 커미션으로 방송국을 설립할 수 있었다.

민간 사업자가 정부 물품을 자신이 대리점을 하던 미국 회사에서 구입하며 커미션을 받고, 그 돈으로 상업 방송국을 설립한 것이니 당시 한국의 어지러운 사회상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어쨌거나 여러 가지로 혼란했던 전쟁 직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출범한 TV 방송국의 개국은 국제적으로 선도적인 일이었는데, 세계 17번째이고, 아시아에선 4번째로 TV 방송을 시작한 국가가 됐다.

일본의 오랜 식민통치에서 갓 벗어난 신생 국가가 3년간의 전쟁을 치르고 난 직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TV 방송을 빨리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군정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미국의 영향이 컸다.

흑백 텔레비전.(출처 픽사베이)
흑백 텔레비전.(출처 픽사베이)

TV 방송은 시작이 됐지만, 당시에 TV 수상기의 보급은 턱없이 빈약했기에 상업 방송을 운영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로 무리였다. 더구나 TV 수상기는 사치품으로 고율의 관세가 부과됐기에 시청자 확보에 난항을 겪었다.

결국 재정난을 견디지 못한 황태영은 HLKZ TV를 장기영에게 처분했다. 조선일보 사장에서 경질된 후 한국일보를 설립해 조선일보의 라이벌로 키워낸 장기영은 HLKZ TV를 인수해 대한방송주식회사(DBC)를 출범시키고 사장에 취임했다.

신문과 방송을 동시에 보유한 막강한 언론인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1959년 2월 2일 화재로 인해 방송국 건물이 소실되며 방송을 중단했다.

한국에 주둔한 미군을 위한 방송인 AFKN(American Forces Korea Network)은 미군이 한국에 처음 주둔하면서 1945년에 시작한 라디오 방송국으로 출발했다.

미국은 세계 여러 곳에 주둔하는 미군을 위해 AFRTS(American Forces Radio and Television Service)라는 자체적인 방송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었는데,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미군 방송도 시작됐다.

처음에는 미군 극동네트워크의 지역국 형식이었으나, 곧 한국의 독자적인 네트워크인 AFKN을 구축해 운영하게 됐다.

AFKN TV 방송은 1957년 9월 15일에 시작됐다. AFKN은 당시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의 TV 방송이 성장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무엇보다도 TV 수상기 보급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율의 관세와 비싼 가격으로 인해 TV 수상기의 보급은 매우 제한적이었는데, AFKN이 TV 방송을 시작하고 난 이후 주한미군에서 흘러나온 TV 수상기가 보급되면서 TV 수상기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계기가 됐다.

1956년 HLKZ 출범 당시 200여대에 불과했던 TV 수상기는 AFKN이 출범한 1957년 연말에는 3000여대로 증가했다.

화재로 중단된 HLKZ TV 방송도 AFKN 채널을 통해 방송을 재개하였는데, 1959년 3월 1일부터 1961년 하반기까지 오후 7시 30분부터 8시까지 30분간 방송 전파를 송출했다. 한국의 방송은 존재했으나 방송국이 없어서 미군 채널을 빌려서 방송하는 기형적인 상황이었다.

AFKN은 처음 서울 지역에 국한된 방송을 했으나, 지방에도 지국을 개설해 미군이 주둔한 지방에서는 방송을 시청할 수 있었다.

용산의 미군기지 베가본드 힐에 설립된 AFKN 방송국은 설립 당시 81명의 인력으로 출발했지만, 1년 후인 1958년에는 123명으로 대폭 늘어났다.

AFKN은 난시청을 해결하기 위해 1961년까지 국내 곳곳에 20개의 중계소를 설치했는데, 이를 계기로 사실상 국내 곳곳을 송출하는 방송이 됐다.

AFKN의 채널을 빌려 방송하던 HLKZ가 1961년 10월 15일에 방송을 중단했고, 한국방송 KBS가 1961년 12월 31일에 개국했지만 초창기 KBS는 기술 훈련을 받기 위해 AFKN에 인력을 파견해 교육을 받았으니, 당시에 제대로 된 TV 방송국은 AFKN이 유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군을 위한 방송인 AFKN은 사실상 TV 수상기를 소유한 한국인들은 누구나 시청할 수 있던 방송이었고, 당시 한국 방송의 열악한 형편과 비교돼 한국 사회에 미국 문화가 빠르게 전파되는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했다.

AFKN TV는 1957년부터 1996년까지 VHF 전파 채널을 할당받아서 지상파 방송을 했고 누구나 안테나만 세우면 시청이 가능했으니, 사실상 한국의 방송국이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고, 이에 따라 전파 주권 문제와 문화 제국주의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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