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62)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마을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한국전쟁으로 언론 환경은 피폐해졌으나, 혼란기에 오히려 언론사가 우후죽순 생겨나서 여러 폐단을 가져왔다는 것은 이미 밝힌바 있다.

속칭 사이비언론사와 기자들이 사회적 혼란기를 틈타서 이권을 챙기는 폐단이 심했고, 이로 인해 언론의 신뢰성을 저해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경향은 4.19 혁명 이후 언론사 설립이 등록제로 완화되며 더욱 심각해졌다.

4.19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 내각이 들어서면서 언론 자유는 무제한으로 보장됐다. 언론사의 설립은 기존의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고, 이에 따라 언론사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신문사, 통신사, 주간지 등의 언론사 숫자는 우후죽순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급증했다. 등록제가 실시되고 5개월 후에 일간지는 41개에서 389개, 주간지는 136개에서 476개, 통신사는 14개에서 274개로 증가했다.

4.19 당시 조선총독부 중앙청 서쪽 정문의 시위대.
4.19 당시 조선총독부 중앙청 서쪽 정문의 시위대.

언론사의 설립이 등록제로 바뀌어 누구나 언론을 설립할 수 있게 된 것은 언론 자유를 보장하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일이었지만, 반면에 제대로 된 언론의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단순히 이권과 이익을 위해 급조된 언론사가 급증하다보니 심각한 사회적 부작용을 초래하게 됐다. 언론의 본령과 무관한 사이비 기자의 창궐은 그 자체로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다.

이승만 정권 시절의 언론이 권력을 행사하고 상당한 특혜를 누린 것이 사실이었고 그런 언론에 대한 만연한 인식이 등록제가 실시되자마자 각종 사이비언론이 창궐하게 된 배경이었다.

즉, 언론을 사회적 책임이 있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각종 이권을 챙길 수 있는 권력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등록제가 실시되자마자 이런 이권을 노리고 언론사가 우후죽순으로 설립됐다.

사이비 언론사의 기자들은 월급을 받지 않고 기자증으로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므로, 이들의 행태가 어떠했을지는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고, 실지로 여러 문헌에서 당시 사이비기자들의 행패를 기록하고 있다. 사이비언론의 폐단은 사회 여러 곳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당시의 사회적 혼란상이 오롯이 타락한 언론으로 인한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언론 자유를 빙자한 무책임한 사이비 언론의 난립이 혼란에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5.16 군사쿠데타는 사회적 혼란상을 빌미로 이를 바로잡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따라서 쿠데타의 배경에는 통제되지 않고 난립한 사이비 언론이 일정부분 기여한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겠다.

5.16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군사 정권은 한국 민주주의의 암흑기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한국의 언론 지형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중요한 계기가 됐다.

역사적으로 쿠데타 세력이 가장 먼저 장악을 시도한 것은 언론사인데, 여론 형성이 쿠데타의 성공여부에 중요한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의 쿠데타 세력도 이점을 간과하지 않았고, 언론사 장악을 시도했다.

쿠데타 세력은 계엄령을 실시하는 동시에 언론의 사전 검열을 시작했고 사이비 언론을 정화한다는 미명으로 언론 통제를 시작했다. 국내 신문사의 상당수가 폐간을 당했고 언론 통폐합이 시작됐다. 군사 정권이 언론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시도였다. 중앙지는 물론이고 지방지도 통폐합을 면치 못했는데 인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인천 언론 현황을 살펴보면, 우선 인천신보는 기호일보로 제호를 바꿨다가 1960년 7월에 경기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발행하고 있었다.

1960년 8월 15일에는 허합을 사장으로 인천신문이 창간됐다. 인천신문은 주간인천을 인수해 운영하던 허합이 주간인천을 개편해 창간한 신문이다. 주간인천에 근무하던 고일과 김응태는 인천신문에서 각각 주필과 편집국장을 맡았다.

1952년 창간한 인천일보는 경인일보로 제호를 바꿨다가 1961년 5월 군사쿠데타와 더불어 폐간됐다. 1966년 2월 22일에는 경기일보가 창간했다.

자유당 정권이 4.19로 물러나고 난 직후 인천에도 많은 언론이 난립했다. 1961년 1월 인천시 공보계에 등록된 언론사는 156개, 기자 수는 무려 600여명이었다. 인천의 인구 규모로 보면 터무니없는 숫자였다.

당시 한국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인천에도 사이비 기자들이 넘쳐났고,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 자체 발행 시설을 갖춘 언론사만을 남기고 나머지 언론사의 등록을 취소시키는 군사정권의 조치로 언론사 대부분이 정리됐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