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59)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마을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한국 신문의 고질적인 문제점 중의 하나가 정파성인데, 정파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파성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문제이다. 정치적으로 특정 정파의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표방하는 신문은 드물다.

표면적으로는 거의 모든 신문이 중립을 내세우고 있고 특정 정파에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이고 불편부당한 보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거의 모든 신문이 상업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상업적 이익 추구와는 거리를 두고 공익적 목적만을 추구하는 것처럼 포장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한국 신문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금전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이지만 아무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고질적 문제를 갖고 있다. 정파성에 관해서 최근에는 비교적 어느 정도 특정 성향을 암묵적으로나마 드러내고 있는 경향이기는 하다.

그러나 상업적 성격에 관해서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신문은 스스로를 객관적 사실에 기반 한 공익적 정보 제공을 가치로 삼는 공익 기관으로 포장하고 있고, 상업적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이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한국 신문의 이런 측면은 만성화돼 있고, 사실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굳이 상업주의를 표방할 이유도 없다. 어쨌건 표면적으로 상업주의를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한국의 언론 지형에서 특이하게 상업주의를 표방한 최초의 신문이 있는데, 1954년 창간된 <한국일보>이다.

한국일보.(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일보.(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일보>는 창간사에서 “우리는 근대경제학 이론을 신봉하고 새로운 자유 경영 사회의 옹호를 자각하면서 ‘리얼리즘’에 입각한 상업신문의 길을 개척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상업주의를 이렇게 화끈하게 표방한 것은 <한국일보>가 최초였다.

<한국일보>를 창간한 장기영은 한국 언론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입사한 은행가였던 장기영은 해방 후 조선은행이 한국으로 바뀌면서 1950년에는 한국은행 부총재로 승진했다.

그러나 장기영은 부총재 승진 2년 만에 사임하고, 한국전쟁 때 납북된 방응모를 대신해 1952년 4월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장기영의 경영 능력은 탁월했는데, 그가 <조선일보> 사장을 맡고 나서 1년 만에 발행부수는 3.5배가 늘어났고, 수입은 무려 518% 증가했다.전쟁 통의 어수선한 상황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그야말로 탁월한 경영 수완을 보여준 것인데,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 사주 방 씨 일가와 불화를 빚어서 취임 후 불과 2년만인 1954년 4월에 사장에서 물러났다.

원래 5년 임기를 보장받고 사장에 취임했는데, 임기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중도퇴진하게 된 것이다.

<조선일보>에서 쫓겨난 장기영은 곧바로 <한국일보>를 창간했다. 경영난을 겪고 있던 <태양신문>을 인수해 제호를 바꾸고 1954년 6월 9일 <한국일보>를 전격적으로 창간한 것인데, 지령은 <태양신문>의 지령을 계승했다. 발행 편집 겸 인쇄인에 장기영, 주필에 오종식, 편집국장에 전홍진을 임원으로 출발했다.

<한국일보>는 한국 신문계에서 최초로 기자를 공개 채용으로 뽑았다. 1954년 8월 1일 기자 6명을 공채로 채용했고, 이후 주기적으로 기자를 공개 채용했다. <한국일보>가 시작한 기자의 공개 채용 방식은 이후 다른 신문사로 퍼져나가서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일보>는 창간 이후 조간신문 시장을 놓고 <조선일보>의 라이벌이 됐고 오랜 기간 대표적인 조간신문으로 언론 시장을 선도했다.

장기영의 <한국일보>가 <조선일보>의 라이벌이 된 것은, 사세를 극적으로 성장시킨 업적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불명예 퇴진시킨 <조선일보>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감정이 <한국일보>를 통해 <조선일보>에서 받은 수모를 되갚아 주고 싶은 경쟁의식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뉴미디어가 득세하며 신문 시장의 환경이 급변하기 전까지 <한국일보>는 한국 시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 중 하나였으나, 이제는 과거의 명성이 많이 쇠퇴했다.

<한국일보>는 한국 언론 지형에서 가장 먼저 ‘상업주의’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상업지를 공공연하게 표방했다는 점에서 다른 신문과 차별화된 신문이었다. 또한 기자 공채 제도를 정착시킨 신문이기도 했고, <조선일보>와 라이벌을 이룬 신문이었다.

만일 <한국일보>가 지금도 과거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더라면 한국의 신문 지형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한국 언론사에서 여러모로 아쉬운 신문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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