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활자‧청타에서 디지털 출력 방식으로 변화
“코로나19 등으로 어렵지만 인쇄소 지켜가고 싶다”

인천투데이=서효준 기자│“어릴 적엔 가게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운 활자가 장남감이자 친구였죠. 돌이켜 보면, 활자를 이용한 인쇄에서 청타를 지나 이젠 디지털 출력으로 인쇄 기술 발전과 함께 걸어 온 곳이네요”

인천 계양구 작전2동 계양구의회 인근에서 ‘정인기획사’를 운영하는 정정섭(48)씨의 말이다. 정정섭씨는 선친 정무영씨 뒤를 이어 2대째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정인기획사 정정섭 대표
정인기획사 정정섭 대표

고 정무영씨는 1976년부터 북인천세무서 인근에서 도장과 고무도장을 제작하는 일을 시작했다. 도장 파는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활자(인쇄를 위한 글자틀)와 연이 닿았고, 인쇄소로 발전했다.

정정섭 씨는 “도장 파는 가게는 자연스레 인쇄업을 주로 하는 가게가 됐다”며 “당시 명함을 주로 제작했다. 가게를 떠올려 보면, 명함 제작을 위한 활자가 가게 한 쪽 벽을 가득 채웠었다”고 전했다.

이어 “초등학교 때부터 일을 도왔다. 활자를 만지는 건 자연스러웠다. 지금은 컴퓨터로 디자인을 하지만 당시엔 만들어 둔 활자를 배치해 조판(인쇄를 위한 활판)을 짜는 게 디자인이었다”고 설명했다.

1980년대 후반 활자를 이용한 조판 제작 방식은 청타기를 활용한 방식으로 발전했다. 청타기는 활자 배치를 기계화 한 방식이다. 수동 타자기와 원리는 비슷하지만 자음과 모음을 따로 입력하는 타지기와는 다르게 청타기는 완성된 글자를 한 번에 찍는다.

정인기획사도 시대 흐름에 맞춰 청타 방식을 도입했다. 청타기는 정정섭씨의 어머니 조현순(74)씨가 맡았다.

조 씨는 “청타기는 이후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금방 사라졌지. 그래도 당시엔 활자를 하나씩 배치해 조판을 제작하는 것보다 훨씬 빨랐어. 모든 글자가 조합돼 있으니 원하는 위치에 찍기만 하면 됐지”라고 회상했다.

이후 정인기획사는 1996년 아날로그식 인쇄기를 구입하며 가게를 키워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정 씨는 “장사가 무척 잘됐다. 특히 청첩장 인쇄가 쏠쏠했다. 당시 동네 주민들 청첩장은 모두 우리가 인쇄한 것 같다. 덕분에 동네 결혼 소식은 누구보다 빨리 알았다. 소식통 역할도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 정무영씨가 운영하던 '정인기획사' 사진(사진제공 정인기획사)
아버지 정무영씨가 운영하던 '정인기획사' 사진(사진제공 정인기획사)

아버지 투병, 컴퓨터 도입 등 큰 변화를 겪은 1999년

장사가 잘 되던 정인기획사는 1999년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아버지 고 정무영씨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3년간에 투병생활 후 고 정무영씨는 세상을 떠났다.

정 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본격적으로 가게를 맡았다. 당시 인쇄업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컴퓨터가 도입돼 청타 방식은 사라지고 컴퓨터를 활용한 디자인이 시작됐다. 옛 방식을 고집하기보단 변화에 빨리 대응했다. 빨리 컴퓨터를 배우고 디자인 기술을 익혔다”고 말했다.

컴퓨터를 빠르게 익혀야 한다는 정 씨의 판단은 정확했다. 2002년 기회가 찾아왔고, 정인기획사는 그 기회를 잡아 천주교 인천교구와 주보 인쇄를 17년 담당하는 인연을 맺게 됐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정인기획사' 아날로그 인쇄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정인기획사' 아날로그 인쇄기

천주교 인천교구 지정 인쇄 업체  “매주 주보 8만장 뽑아”

정 씨는 “어릴 때부터 성당을 오래 다녔다. 그러다 천주교 인천교구에서 주보 인쇄 업체를 선정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때 익힌 디자인 기술을 활용해 포트폴리오를 제작했다. 당시 포트폴리오를 제출한 업체는 우리뿐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천주교 인천교구 지정 인쇄업체로 선정됐다. 그 인연은 2018년까지 약 17년 동안 이어졌다”며 “인천지역 성당의 한 주간 소식을 모두 모아 주보를 제작하고 인쇄했다. 약 8만장에 달하는 주보를 매주 인쇄했다”고 전했다.

아울러 “주보뿐만 아니라 인천교구 내 각종 행사 포스터와 책자 제작, 인쇄 등을 모두 맡았다. 정말 바빴다. 쉬는 날이 따로 없었다. 100여개가 넘는 성당에서 주보 외에도 각종 의뢰가 들어오곤 했다. 성당이 급히 뽑아야할 인쇄물이 있으면 밤을 새서 인쇄해 주곤 했다”고 회상했다.

천주교 인천교구와 인연은 주보 인쇄 업체가 바뀐 2018년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정 씨는 “단가 문제 등으로 2019년부터 주보를 인쇄하진 않는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어 온 인연이 있어 성당에 인쇄할 일이 생기면 아직 정인기획사를 찾는다”고 말했다.

정인기획사는 지난해 '디자인 정인'으로 간판을 바꿨다.
정인기획사는 지난해 '디자인 정인'으로 간판을 바꿨다.

“코로나19 등으로 어렵지만 인쇄소 지켜가고 싶다”

정인기획사도 많은 소상공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코로나19 영향을 피할 순 없었다. 많은 행사나 축제 등이 취소되면서 인쇄 주문 자체가 많이 줄었다.

정 씨는 “코로나19는 인쇄업에도 영향을 끼쳤다. 각종 행사 등이 취소되고, 연기되면서 덩달아 인쇄 주문이 많이 줄었다. 직접적인 영업제한 조치를 받진 않았지만 경기 불황이 지속되니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전자책과 같은 디지털 매체들이 발전하면서 인쇄업 자체가 축소되고 있다. 지금까지 기술 발전에 발맞춰 정인기획사가 계속 변화해 온 만큼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며 “각종 영상이나 전자매체에서 사용되는 디자인을 제작 쪽으로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끝으로 “지난해 정인기획사에서 ‘디자인 정인’으로 간판을 바꾸기도 했고 변화를 준비 중이지만 가게의 뿌리인 인쇄업은 계속 지켜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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