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물건 구하러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없어"
김홍연 사장 “죽는 날까지 계속 가게 운영할 것”

인천투데이=서효준 기자│가을비가 내린 지난 29일 오후 인천 중구 신흥동3가 신광초등학교와 한별프라이빌아파트 사잇길로 이제는 보기 힘든 ‘미(米)점’이란 간판을 단 작은 가게가 얼굴을 드러냈다.

쌀과 잡곡을 빨간색 고무 대야에 쌓아두고 파는 ‘신천미점’이다. 신천미점은 100m 남짓한 골목 시장인 '수인곡물시장'에 자리 잡고 있다. 

신천미점은 인천 중구 신흥동3가 신광초등학교와 한별 프라이빌 아파트 사잇길. 수인곡물시장에 위치하고 있다. 
신천미점은 인천 중구 신흥동3가 신광초등학교와 한별 프라이빌 아파트 사잇길. 수인곡물시장에 위치하고 있다. 

쌀과 기름 가게가 몰려 있는 수인곡물시장은 옛 수인선(인천~수원) 꼬마열차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곳이다.

경기 수원역에서 안산, 시흥을 거쳐 인천항역까지 총 연장이 52㎞에 이르렀던 옛 수인선은 일제가 소래‧남동‧군자 등 인천 인근에서 생산한 소금과 수산물을 수탈하기 위해 부설했다. 일제는 수인선을 여주와 이천까지 연결해 쌀을 수탈했다. 

옛 수인선 종착역이었던 인천항역은 광복 후인 1948년 6월 수인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곡물시장 앞에 붙어있는 ‘수인’은 수인역에서 따온 것으로 전해진다. 나중에 남인천역으로 또 바뀌었다.

곡물시장은 역에 사람과 물자가 몰려들며 자연스레 형성됐다. 역 주변으로 노점들이 하나 둘 생기고 노점들이 가게가 되고 시장이 됐다.

신천미점도 수인곡물시장과 역사를 함께 했다. 신천미점은 황해도 신천 출신의 실향민 김인손 사장이 1964년경 창업한 미곡상이다.

김인손 사장은 전쟁이 끝나고 생계를 위해 수인역 앞에서 좌판을 시작했다. 돈을 모아 1968년 좌판을 열었던 자리 건너편인 지금 자리에 가게를 열었다.

가게 이름은 고향인 ‘신천’과 쌀가게를 뜻하는 미점(米店)을 붙여 지었다. 현재는 1994년경부터 아들 김홍연 사장(63)이 가게를 맡아 운영하고 있다.

1978년 소래철교를 달리는 수인선의 모습.(사진제공ㆍ김용수 작가)
1978년 소래철교를 달리는 수인선의 모습.(사진제공ㆍ김용수 작가)

혼분식 정책으로 신천미점 비롯 '수인골목시장' 모두 호황

김홍연 사장은 부모님이 가게를 운영했던 1970~80년대를 기억하며 “대한민국에 잡곡상인들이 모여서 장사하는 곳은 여기 밖에 없었다. 인천 사람은 모두 여기서 쌀을 사 먹었다”며 “부평, 부천, 멀리는 강화까지 배달하는 자전거 배달꾼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신천미점은 이름처럼 잡곡은 팔지 않고 쌀만 팔았다. 그러다 정부의 혼분식 장려와 잡곡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며 시대 변화에 맞춰 잡곡도 팔기 시작했다.

1960년대 말부터 정부가 잡곡을 섞어먹는 혼분식을 장려하며 신천미점을 비롯한 수인잡곡시장은 호황을 맞는다.

혼분식은 쌀 이외 여러 잡곡을 섞어 먹는 혼식과 밀가루 식단을 말하는 분식을 합친 말이다.

김 사장은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으로 잡곡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가게에 나와 있으면 앉아서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며 “물건이 없어서 못 팔았다. 수인잡곡시장 전체가 호황이었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수인곡물시장과 함께 옛 수인역 일대를 지켜온 신천미점은 1994년경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아들인 김홍연(63) 사장이 가게를 이어 받은 것이다.

김 사장은 사실 가게를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 김 사장은 "부모 밑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많을까"라고 웃으며 "가게를 물려받기 싫어서 군대로 도망쳤다"고 말했다.  

그런 뒤 "제대 후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께서 ‘힘이 드니 네가 이어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셔서 가게를 운영하기 시작한 게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덧붙였다.

김 사장이 가게를 맡게 된 직후 신천미점을 비롯한 미곡업계는 큰 위기를 맞이한다. 미곡매매업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면서 쌀 판매가 자유화돼 경쟁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이후 1996년엔 대형마트라는 경쟁자도 등장했다.

신천미점은 쌀뿐만 아니라 다양한 잡곡도 함께 판매하고 있다.
신천미점은 쌀뿐만 아니라 다양한 잡곡도 함께 판매하고 있다.

“좋은 물건 구하러 방방곳곳 안 가본 곳이 없어요”

김 사장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자 직접 발로 뛰었다. 김 사장은 좋은 물건을 싼 가격에 구해오기 위해 가게 문을 닫는 일요일이면 국내 방방곡곡 시장이 열리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다.

김 사장은 “주말마다 직접 지방에 내려가 물건을 보고, 질 좋은 물건을 싼 가격에 사왔다. 처음엔 속아서 질 나쁜 물건을 사오는 바람에 안 팔리기도 하는 등 손해도 봤다”고 말했다.

이어 “경상북도 영주에서 서리태(속이 푸른 검은콩)를 찾게 됐다. 당시 인천에서 판매되는 서리태는 모두 서울을 거쳐 인천으로 들어왔다”며 “산지에서 직접 물건을 확인하고 구매하니 타 가게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질 좋은 물건을 팔 수 있었다. 서리태로 어려운 상황에 숨통을 틔었다”고 전했다.

지난 29일 만난 김홍연 신천미점 사장은 “죽는 날까지 계속 가게 운영할 것”라고 말했다.
지난 29일 만난 김홍연 신천미점 사장은 “죽는 날까지 계속 가게 운영할 것”라고 말했다.

 추억속에 사라져가는 쌀 가게 “죽는 날까지 계속 운영할 것” 

쌀 판매가 자유화되고 1990년대 중반 대형마트가 곳곳에 들어서면서 동네에서 쌀 가게는 자취를 감췄다.

수인곡물시장도 ‘국내 유일 곡물시장’, ‘국내 최저 가격’이라는 간판을 자랑스럽게 내걸었던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문을 연 가게가 30곳이 넘었다. 하지만 지금은 5대여섯 군데만 남았다. 그러나 신천미점은 53년째 같은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현재 신천미점을 찾는 손님은 대부분 60~70대 어른이다. 시어머니 심부름을 하는 40~50대 며느리, 어머니랑 같이 다니던 추억에 아내를 데리고 오는 중년 남성들도 종종 있다.

대형마트가 많아지고 인터넷쇼핑이 흔해지며 다른 쌀가게처럼 신천미점도 매출이 줄었다. 중요한 거래처였던 학교‧공장 급식업체나 식당들도 대기업이 진출하면서 거래가 줄었다.

김 사장은 “다행히도 아직 가마니 단위로 구매하는 식당 단골들이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택배‧온라인 시장 활성화로 계속 줄어가는 추세”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끝으로 “손님이 줄고 있어 운영이 힘들긴 한다. 하지만 대형마트와 비교해도 아직 쌀과 잡곡의 가격경쟁력은 앞선다고 자부한다”며 “찾는 손님들이 있고 지금까지 해왔던 일이기 때문에 죽는 날까지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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