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역지침 속 묵념·헌화만으로 넋 기려
문 대통령 조화 지난해 이어 올해도 없어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 내년 서훈 신청

인천투데이=이종선 기자 | 전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1899~1959) 선생 62주기 추모제가 7월 31일 서울 망우리공원묘지에서 열렸다. 올해도 죽산의 명예회복을 위한 서훈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추모제는 예년처럼 오전 11시를 엄수했다.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와 유족회는 죽산이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를 기려 매년 11시에 추모제를 진행한다.

죽산 조봉암(1899~1959) 62주기 추모제가 7월 31일 서울 망우리공원묘지에서 열렸다.
죽산 조봉암(1899~1959) 62주기 추모제가 7월 31일 서울 망우리공원묘지에서 열렸다.

올해도 지난해처럼 코로나19 방역지침에 따라 참가자들은 묵념과 헌화만으로 죽산의 넋과 뜻을 기렸다.

정치권에선 박남춘 인천시장과 신은호(민주, 부평1) 인천시의회 의장은 추모제 1시간 전 미리 방문해 헌화했다. 송영길(인천 계양구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윤호중(경기 구리시) 민주당 원내대표는 조화를 보냈다.

또한 류경기 서울 중랑구청장이 처음으로 참석했다. 류 구청장은 죽산을 포함해 망우리공원에 안장된 독립유공자와 애국지사들을 기리고 모시겠다고 약속했다.

이외에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노회찬재단, 새얼문화재단, 창녕조씨중앙화수회 등이 조화를 보내 죽산의 뜻을 기렸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3년간 자리를 지켰던 문 대통령 조화는 지난해 이어 올해도 오지 않았다. 그와 함께 죽산의 명예 회복을 위한 독립유공자 훈장 추서도 이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죽산 조봉암 유족들이 헌화하고 있다.
죽산 조봉암 유족들이 헌화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조선총독부 기관지 한줄로 죽산 명예회복 외면

지난 2007년 대통령 직속 진실화해위원회는 “조봉암이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복역한 사실이 있음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이 상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2011년, 진보당 사건 재심에서 죽산은 무죄를 선고받으며 명예회복이 이뤄지는 듯했다.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1941년 12월 23일 자 신문에 ‘인천 서경정(현 중구 내동)에 사는 조봉암 씨가 국방헌금 140원(현재 150만원)을 냈다'는 단신 기사를 토대로 추서를 안 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죽산의 사회적 위상을 고려했을 때 그만한 돈을 냈으면 일제가 이를 이용하기 위해 대서특필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보이지도 않는 단신 기사로 처리됐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또한 당시 죽산의 주소는 부평이었다. 그만한 성금을 낼만한 형편도 아니었다. 국가보훈처의 외면에 유족들은 2019년부터 더 이상 정부에 서훈 추서를 신청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는 죽산을 비롯한 인천의 독립유공자들을 발굴해 서훈을 신청할 예정이다. 인천시는 이를 지원하기 위한 예산을 내년에 반영할 계획이다. 독립운동사연구소는 이르면 내년 3월 또는 8월 죽산 서훈을 다시 신청할 방침이다.

토지개혁 산업화 기틀 마련... 이승만, 간첩 누명 사법살인

죽산은 1899년 강화군 선원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며 독립운동에 눈을 떴다. 이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을 다녀와 제1차 조선공산당을 창당하며 사회주의 계열 항일혁명가로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제헌의회 국회의원과 농림부 장관을 맡아 토지개혁을 주도해 산업화 기틀을 마련했다. 당시 죽산은 강제로 땅을 뺏는 게 아니라, 지주에게 농지채권을 주는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지주들이 이 채권으로 땅을 살 땐 시중 가격의 30%밖에 쳐주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적산을 매입할 땐 채권 가격 그대로 인정해 줬다. 지주들은 정부로부터 적산을 매입했고, 이는 자본 축적의 토대가 됐다. 또한 농민들에겐 무상에 가깝게 토지를 공급했다.

죽산은 1952년 8월 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후 1956년 진보당을 창당해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죽산은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를 노선으로 내걸고 30%가 넘는 지지율(=216만표)를 보였다.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 정권은 죽산에 간첩혐의를 씌워 체포했다.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죽산은 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대법원에서도 같았다. 이후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재심 요청에도 불구하고 죽산은 서거했다.

사법살인을 당한 죽산의 온전한 명예회복은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유공 서훈 추서로 이뤄질 수 있다. 이는 죽산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며, 국가의 양심을 회복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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