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헌신했지만 ‘국가보훈처’ 또 외면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3ㆍ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광복절에도 죽산 조봉암 선생은 결국 독립운동과 건국 훈장을 받지 못했다.

죽산은 강화에서 3ㆍ1운동을 시작으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맡아 민주주의 정착과 토지개혁을 이끌며 산업화의 초석을 닦았다.

올해는 죽산이 태어난 지 120주년이자 서거 60년 되는 해이이고, 3·1운동 100주년 되는 해이다. 그래서 올해가 서훈 추서 적기로 기대됐다. 하지만 정부는 이번에도 죽산을 외면했다. 기념사업회와 유족은 더 이상 서훈 신청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국가보훈처는 제74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178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13일 밝혔다.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49명, 건국포장 28명, 대통령표창 101명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독립유공자와 후손을 청와대로 초청해 “3ㆍ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맞는 광복절이기에 더욱 각별하다. 독립유공자와 후손을 제대로 예우하는 일은 한시도 게을리할 수 없는 정부의 책무이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죽산은 초대 받지 못했다.

죽산 조봉암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제가 7월 31일 오전 11시 서울 망우리 공원묘지에서 열렸다.

죽산은 1899년 강화군 선원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강화 3ㆍ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한 당대 엘리트였다.

죽산은 제1차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하며 일제강점기 국내와 만주, 모스크바 등에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1932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가 1939년까지 신의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감옥에서 나와 인천에 정착했다. 박헌영과 갈등 끝에 공산당과 선을 긋고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제헌 국회의원과 농림부 장관을 맡아 토지개혁을 주도하며 대한민국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한 뒤, 평화통일을 주창하다가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누명을 쓰고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죽산에 대한 첫 명예회복은 2011년 2월 이뤄졌다. 죽산은 서거 53년 만에 대법원 무죄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공로는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1941년 12월 23일 자 신문에 ‘인천 서경정(현 중구 내동)에 사는 조봉암 씨가 국방헌금 150원(현재 9000만 원)을 냈다'는 단신 기사를 토대로 추서를 안 하고 있다. 죽산이 일제와 타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죽산의 주소는 소하정(현재 부평)이었고, <매일신보>에 실린 그만한 성금을 낼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는 증언에도 불구하고 국가보훈처는 2017년 유족에게 서훈에 필요한 보완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죽산념사업회는 더이상 제출할 자료도, 더 얘기할 필요도 없다는 입장이다. 죽산기념사업회는 “죽산은 1945년 1월 일제예비검속으로 구속됐다가 8월에 풀려났다. 일제에 부역했다면 구속됐겠나. 우린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 정부의 판단과 결정만 남아 있을뿐이다”고 질타했다.

죽산 평전을 쓴 소설가 이원규 선생도 국방성금 단신기사의 신빙성에 의문을 표했다. 이원규 선생은 “죽산이 진짜 친일을 했으면 일제가 이 사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죽산은 헌금을 낼 만큼 여유롭지도 않았다. 오히려 8.15 해방 당시 죽산이 머물던 인천 집에 수백여명이 모여 그를 연호하며 환호했다. 친일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며 타협 논란을 일축했다.

죽산기념사업회와 죽산 유족들은 더이상 서훈 신청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죽산의 장녀 조호정 여사의 딸 이성란 여사는 “왜곡된 일제 기관지에 나온 한 줄짜리 단신 기사를 가지고 친일 행위로 매도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서훈 신청을 또 하는 것은 할아버지에게 오히려 누가 되는 행위라고 본다”고 질타했다.

기념사업회도 더이상 정부에 서훈 추서를 신청하지 않겠다고 했다. 사실 지난해 서훈 신청도 기념사업회와 유족이 신청한 게 아니라, 정부가 자체적으로 검토한 뒤 추서를 보류했을 뿐이다.

죽산은 독립유공 못지않게 대한민국 건국과 산업화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죽산이 추진한 토지개혁은 강제로 땅을 뺏는 농지개혁이 아니었다. 정부가 지주한테 토지를 매입할 때 현금을 준 게 아니라 정부 농지채권을 줬다. 그런데 이 채권으로 땅을 살 땐 시중 가격의 30%밖에 안 됐다.

반면 일본 적산(=적의 재산)을 매입할 땐 채권 가격 그대로 인정해줬다. 즉. 땅을 사는 것보다 적산을 매입하는 게 나았다. 죽산은 이를 통해 남한 지주가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반면, 농민들에겐 무상에 가깝게 공급했다. 그렇게 1950년 4월부터 농민들에게 토지분배가 시작됐다. 죽산의 토지개혁 덕분에 한국전쟁 당시 오히려 남한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게 학계의 전반적인 평가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박헌영 등은 남쪽 농민들이 들고 일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남측에선 토지개혁이 단행돼 농민들이 굳이 북한을 지지할 이유가 없었다. 아울러 토지를 얻은 농민들의 후손은 훗날 고등 교육을 받고 한국 경제발전을 이끄는 주역으로 성장하게 된다.

죽산의 온전한 명예회복은 그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유공에 대한 서훈 추서에 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과 74주년 광복절, 죽산의 명예회복은 아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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