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우영 광복회 인천지부장

"독립운동가 등급나누지 말고, 같은 예우해야"
"친일세력 청산과 통일돼야 완전한 광복"
"조봉암 선생 등 서훈받지 못한 독립유공자 밝힐 것"

인천투데이=이서인 기자│“국립대전현충원에는 애국지사와 이들을 때려잡았던 장군들의 묘가 함께 있다. 지난 5월 갔을 때 장군들의 묘 앞에는 값비싼 석재 화병이 있고, 애국지사 묘 앞에는 시커먼 비닐 화분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 또, 애국지사들의 묘소를 이장할 때 1평 공간에 해야 돼 제를 지내기도 어렵다. 이는 지사와 장군이 오히려 반대 대우를 받는 것 아닌가.”

18일 만난 김우영 광복회 인천지부장이 한 말이다. 올해는 8·15 광복 75주년이다. 광복회 인천지부는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 중 수권자 363명으로 이뤄진 단체다. 광복 75주년이 됐지만, 친일세력 청산은 아직이다. 독립유공자 후손 지원책도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게 김 지부장의 설명이다.

“독립운동가 등급나누지 말고, 같은 예우해야”

김우영 광복회 인천지부장.
김우영 광복회 인천지부장.

김 지부장은 독립운동가 김관기 선생의 손자다. 김관기 선생은 3·1 운동이 발발되고, 독립운동이 국내 곳곳으로 확산되던 1919년 4월 1일 안성시 양성면사무소와 우체국을 불태우고, 군중 1000여 명과 만세운동을 했다. 김 지부장은 직접 자료를 찾아 할아버지의 공적을 증명했고, 김관기는 2001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독립운동가들에 수훈하는 훈장·포장은 7가지 등급으로 나뉜다. 대한민국장(1등급)·대통령장(2등급)·독립장(3등급)·애국장(4등급)·애족장(5등급) 훈장과 건국포장·대통령표창 등이다. 건국포장은 훈장의 다음가는 훈격이다. 서훈 등급 심사 기준은 수형 기록과 독립운동단체 활동기간, 직책 등 문서로 남아있는 자료를 종합해 결정된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독립유공자서훈 공적심사 대상은 1945년 8월 14일까지 독립운동단체 활동기간 또는 수형 기록이 8년 이상이면 1~3등급, 4년 이상이면 애국장, 1년 이상이면 애족장에 해당한다. 수형 10개월 이상은 건국포장, 10개월 미만은 대통령 표창을 받는다.

이에 김 지부장은 수형 기록 등 공식기록이 없다고 독립운동을 덜한 게 아닌데, 이 기준으로 독립운동가 등급을 나누는 것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 기준은 공식자료를 기반으로 해 비공식적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가진다. 더욱이 김 지부장은 같은 맥락으로 1945년 8월 15일 이전 돌아가신 분은 순국선열, 이후 돌아가신 분들을 애국지사로 구분하는 것도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할아버지(김관기)는 국내 독립운동 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행방불명됐다. 이 때문에 독립유공자로서도 누락이 됐고, 3년간 자료를 찾은 끝에 할아버지 공적을 겨우 증명했다. 할아버지는 만주로 가시고,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셔 아버지는 7살부터 홀로 자랐다. 독립운동가 가족들은 어려움을 겪었고, 분명히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부분이 있는데 징역 기록이 없다고 훈장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아울러 김 지부장은 독립유공자와 참전유공자를 분리해 예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둘 다 국가 보훈처에서 담당하고 있다. 국가를 위한 희생은 같지만, 참전유공자는 국가 전시상황에 강제로 동원됐고, 독립유공자는 권력 밑에서 억눌려 자의로 재산을 팔고 독립운동했다는 게 차이다. 또,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핍박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핍박을 받고, 잘 살 수 없었다”라며 “유족을 엄청나게 대우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독립유공자 자손으로서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예우해달라는 것”이라며 호소했다.

이어 “독립운동가들은 전부 다 국가에 바치며 살았다.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에 따라 등급으로 나누지 말고 전부 같은 독립운동가로서 최상의 예우를 받아야한다”며 “그래서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를 심사하는 게 아닌, 국무총리실 산하로 들어가 제대로 심사해야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지사 후손 중 1명에게만 수권을 주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다들 어렵게 사는데, 1명만 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보훈급여금, 연금 등 혜택을 받을 수 있어 실제로 수권자가 되는 것을 두고 갈등이 빈번하다고 했다. 독립유공자 수권자만 광복회에 등록할 수 있는데, 이런 이유로 광복회 회원은 7000여 명에 불과하다.

김우영 광복회 인천지부장은 친일청산을 의미하는 반민특위 뱃지를 매일 단다.
김우영 광복회 인천지부장은 친일청산을 의미하는 반민특위 뱃지를 매일 단다.

“광복 75주년, 부끄럽지 않게 친일청산 제대로 해야”

김 지부장은 독립이후 이승만이 일제강점기 시 관직에 있던 사람들을 그대로 등용했고, 현재까지도 곳곳 주요관직을 차지하고 있어 일제의 잔재로 남아있다고 했다. 이는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민족반역 등 친일반민족행위를 자행한 친일세력은 4776명에 이른다.

한국은 1948년 10월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해 제헌국회에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러나 1949년 6월 6일 이승만이 사주한 경찰들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위원을 폭행하고, 그해 말 해산됐다. 이를 두고 김 지부장은 현재 현충일로 돼있는 6월 6일은 한국전쟁 이후 만들어진 날이 아니며,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49년 6월 6일은 이승만이 서울 중부경찰서장에게 반민특위를 없애라고 명령한 날”이라며 “이승만은 이를 감추기 위해 현충일을 만들었고, 현충일은 광복회에 있어 최악의 날이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가슴에 반민특위 뱃지를 하고 다닌다.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날인 6월 6일을 ‘민족정기 짓밟힌날’로 정하고,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의미다. 뱃지는 하얀색 산작약꽃 모양으로 돼있으며, 그 꽃말은 분노, 슬픔, 수치다. 그리고 뱃지에는 6월 6일이 새겨져있다.

“친일청산은 정치적 문제가 아닌,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희생하신 독립운동가 분들께 부끄럽지 않게 후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과업이다. 독립운동을 하면 몇 대에 걸쳐 거지꼴을 하고, 친일을 하면 몇 대에 걸쳐 떵떵거린다는 말이 있다. 지금 현실이 그러하다. 친일세력들은 일제의 잔재로 주요 관직에 있다. 반면 독립운동가들은 집안 모든 재산을 팔아 독립자금으로 바친 분들이 많아 가난하고, 그 후손들은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제경찰들에 쫓겨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도 어렵게 사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많은 게 현실이다.”

김 지부장은 친일청산 일환으로 광복회 차원에서 국립묘지법 개정에 힘쓰고 있다고 했다. 광복회가 파악한 바로는 친일행적을 한 사람들 69명이 현충원에 묻혀있다고 했다. 친일파와 독립운동가가 같은 곳에 안장돼있는 모습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친일파를 다른 곳으로 이장이 불가하다면 앞에 친일파를 명시한 비석이라도 세워야한다고 했다.

아울러 현충원은 2014년 7월부터 애국지사 묘역을 3.3㎡(1평)에 조성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 지부장은 일반병보다도 못한 처우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이전에는 묘역이 모두 8평이었는데, 현재 애국지사 묘역을 이장하는 경우에는 1평에 조성하고 있다”며 “제를 지낼 수 있는 자리조차 없다”고 강하게 말했다.

광복회 인천지부 사무실 한켠에 독립유공자 공훈록들이 진열돼있다.
광복회 인천지부 사무실 한켠에 독립유공자 공훈록들이 진열돼있다.

“통일이 돼야 완전한 광복, 밝혀야할 독립운동가 많아”

김 지부장은 독립운동가 다수가 타지에서 돌아가시거나, 실종된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래서 아직도 3·1절, 8·15 광복절 행사할 때마다 광복회 회원이 30~40명씩 생긴다고 했다. 이들은 그동안 몰랐다가 법적 근거를 마련해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인정받은 경우다.

김 지부장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독립유공자가 많으나 국가차원에서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가 나서서 할아버지 관련 자료를 찾지 않았다면 김관기 선생의 공적은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울러 인천 강화 출생인 죽산 조봉암 선생도 아직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다. 그는 1919년 강화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독립운동을 했지만,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간첩혐의로 사형됐다. 사형 집행 52년만인 2011년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서훈 추서는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이분의 자손들은 이제 서훈 추서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지부장은 “조봉암 선생같이 독립운동을 하셨는데도 서훈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며 “정치적 이유가 얽혀있어 명예회복이 되지 않고 있는데, 광복회가 앞서서 밝히고 행동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광복회가 할 수 있는 것은 회원들이 뭉치는 것인데 7000여 명이라 광복회 요구에 힘이 약하다”며 “광복회 인천지부 재정도 어려운 상태로 국가차원에서 독립유공자 지원에 대해 나서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통일이 완전한 광복이라며 현재 북한과 긴장관계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한반도는 주변국들 때문에 통일이 안 되고 있으며, 통일이 될 시 점령국을 넘어서는 대국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물론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지고 난 다음 가능한 얘기라고 했다. 그리고 통일이 돼야 김원봉 선생 등과 같은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김 지부장은 “통일이 돼야 완전한 광복”이라며 “광복회 회원들이 다 잘 살고, 어렵지 않았으면 좋겠다. 화합과 단결로 진정한 광복이 이루어질 수 있게 우리 후손들부터 의식을 깨우고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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