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서거 60주기, 명예회복은 국가 양심의 회복”
“죽산 서거 60주기, 명예회복은 국가 양심의 회복”
  • 이종선 기자ㆍ김갑봉 기자
  • 승인 2019.07.19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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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 서거 60주년 고향 강화에서 첫 기념강연 열려

[인천투데이 이종선 기자] 올해는 죽산 조봉암 선생이 태어난 지 120주년이자 서거 60년 되는 해이며, 3·1운동 100주년이다. 이를 기념해 죽산의 삶을 되짚어보는 강연이 열렸다.

<강화뉴스>는 18일 오후 7시 ‘조봉암 평전(한길사)’의 저자 이원규 선생을 초빙해 ‘죽산 조봉암의 삶과 사상’을 주제로 강연을 개최했다.

강화뉴스는 죽산의 서거 60주년을 맞아 18일 오후 7시 ‘조봉암 평전’의 저자 이원규 교수를 초빙해 강화뉴스 강의실에서 ‘죽산 조봉암의 삶과 사상’을 주제의 강연을 개최했다.
강화뉴스는 죽산의 서거 60주년을 맞아 18일 오후 7시 ‘조봉암 평전’의 저자 이원규 선생을 초빙해 강화뉴스 강의실에서 ‘죽산 조봉암의 삶과 사상’을 주제의 강연을 개최했다.

죽산은 강화군 선원면 태생이다. 죽산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빨갱이 누명을 쓰고 1959년 7월 31일 11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죽산 서거 60년이지만 여전히 그의 생가를 찾지 못할 정도로 죽산은 강화도에서 금기어에 해당했다. 그리고 죽산이 죽고 나서 60년 만에 고향 강화도에서 처음으로 죽산의 삶을 조명하는 강연회가 열렸다.

죽산은 1919년 강화에서 일어난 3ㆍ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한 당대 엘리트였다. 죽산은 제1차 조선공산당을 창당하며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1932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가 1939년까지 신의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감옥에서 나와 인천에 정착했다. 박헌영과 갈등 끝에 공산당과 선을 긋고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제헌 국회의원과 농림부 장관을 맡아 토지개혁을 주도하며 대한민국의 기틀을 닦고 평화통일을 주창했다.

죽산의 출생과 청년 시절

문헌에 죽산의 본적은 강화군 관청리 550번지로 나온다. 현재 강화군 남문안길이다. 그러나 평전을 쓴 이원규 선생은 죽산이 1899년 기해년 강화 선원면 금월리 ‘가지마을’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원규 선생은 “문서에는 관청리 550번지로 나오지만 죽산 조상의 선영이 거의 대부분 선원면 금월리에 있다. 금월리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열에 아홉은 모두 죽산이 이 동네에 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며 “죽산는 근현대 금기어였다. 이제는 강화도 사람들이 죽산의 생가를 바로 잡을 때가 됐다”고 말했다.

죽산은 금월리에서 강화 보통학교를 걸어 다녔다. 그는 보통학교에 다니며 강화에 보창학교를 설립한 이동휘의 영향을 받았다. 이동휘는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으로 강화유수 사령관으로 와 있다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넘어가 한인사회당을 설립한 인물이다. 죽산도 훗날 만주에서 활동하게 된다.

죽산은 총명했지만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학급회 토론과 주산에 탁월한 모습을 보였다. 죽산은 이후 농업보습학교를 나와 강화군청 보조원으로 근무했다. 이때 잠두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청년회 활동을 하며 민족정신을 길렀다.

1919년 3월 강화군 전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에 참가한 그는 구속돼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했다. 이후 죽산은 광복 후 1948년 가을이 돼서야 농림부 장관으로서 다시 고향을 찾을 수 있었다.

죽산은 1920년 5월 대동단 의친왕 탈출 사건에 연루돼 평양경찰서에 구속돼 조사를 받았다. 그 뒤 1921년 7월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대학 정경학과 입학했다. 이 당시 사조를 이루던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서적을 탐닉하며 공산주의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죽산은 1922년 귀국해 공산주의 그룹에 가입하고, 고려공산당 연합대회 국내 대표로 뽑혀 베르후네우딘스크(오늘날 울란우데)에 갔다가 모스크바로 가서 소련 부하린의 추천으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다녔다. 폐결핵으로 중퇴해 고국으로 돌아온 죽산은 1925년 4월 조선공산당(1차) 창당을 주도하고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후 만주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했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죽산은 1932년 9월 체포됐다. 같은 해 12월 고국으로 압송돼 신의주에서 7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 죽산은 인천 중구 도원동에 정착해 강화구락부 출신 지인들의 도움으로 왕겨를 취급하는 인천비강조합장을 맡아 생계를 유지했다.

강화뉴스는 죽산의 서거 60주년을 맞아 18일 오후 7시 ‘조봉암 평전’의 저자 이원규 교수를 초빙해 강화뉴스 강의실에서 ‘죽산 조봉암의 삶과 사상’을 주제의 강연을 개최했다.
강화뉴스는 죽산의 서거 60주년을 맞아 18일 오후 7시 ‘조봉암 평전’의 저자 이원규 선생을 초빙해 강화뉴스 강의실에서 ‘죽산 조봉암의 삶과 사상’을 주제의 강연을 개최했다.

죽산의 토지개혁은 한국 자본주의의 기반

죽산은 일제의 패망이 짙어가던 1945년 1월 일제의 예비 구금령으로 헌병대에 구속됐다가 8월 15일 해방을 맞아 풀려났다. 이후 바로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했다.

1946년 죽산은 공산당을 약화하기 위한 미군의 공작으로 전향성명을 내고 공산당과 결별했다. 이후 죽산은 1948년에 치러진 5·10 총선거에서 인천을구(현재 인천 부평ㆍ계양ㆍ서구 일원)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죽산은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 장관을 맡아 경자유전(=땅은 농사짓는 사람의 소유) 원칙 아래 농지개혁법을 시행했다. 원칙은 소작농에게 땅을 주는 것이고 방식은 유상몰수 유상분배였다.

죽산의 토지개혁은 강제로 땅을 뺏는 농지개혁이 아니었다. 우선 정부가 지주한테 토지를 매입할 때 현금을 준 게 아니라 정부 농지채권을 줬다. 그런데 이 채권으로 땅을 살 땐 시중 가격의 30%밖에 안 됐다.

반면 일본 적산(=적의 재산)을 매입할 땐 채권 가격 그대로 인정해줬다. 즉. 땅을 사는 것보다 적산을 매입하는 게 나았다. 이 과정을 통해 남한 지주가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는 토대가 마련됐다. 반면, 농민들에겐 무상에 가깝게 공급했다. 그렇게 1950년 4월부터 농민들에게 토지분배가 시작됐다.

이원규 선생은 “죽산의 토지개혁 덕분에 한국전쟁 당시 오히려 남한이 유지될 수 있었다. 박헌영 등은 남쪽 농민들이 들고 일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남측 방식의 토지개혁으로 농민들이 굳이 북한의 편에 설 필요가 없었다”며 “또한 이 시기 땅이 생긴 농민들은 그 돈으로 자녀들을 교육했다. 이들이 훗날 한국 경제발전을 이끈 베이비붐 세대로 자라게 되는데, 그 뿌리는 죽산의 토지개혁에 있다”라고 강조했다.

“죽산의 명예회복 마지막 단추 채울 때 됐다”

1950년 2대 국회의원에 재선한 죽산은 국회부의장에 선출됐다. 그 뒤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1952년 8월 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이승만 정권의 방해 공작으로 후보 등록조차 못 했다.

죽산은 1956년 진보당을 창당했다.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를 주요 노선으로 내걸고 1956년 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30% 넘는 지지율(=216만 표)을 기록했다.

1958년 1월,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권은 진보당에 대한 탄압을 시작해 죽산에 간첩혐의를 씌워 체포했다.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죽산은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대법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재심 요청에도 불구하고 죽산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원규 선생은 “죽산이 농민들의 지지로 216만 표를 받았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오히려 100만 표쯤 받았으면 살아서 4·19혁명 이후에 출마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죽산에 대한 명예회복은 2011년 2월 이뤄졌다. 죽산은 서거 53년 만에 대법원 무죄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공로는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죽산이 잠시 일제와 타협했다는 논란이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1941년 12월 23일 자 신문에 ‘인천 서경정(현 중구 내동)에 사는 조봉암 씨가 국방헌금 150원(현재 9000만 원)을 냈다'는 단신 기사가 그것이다.

이에 대해 이원규 선생은 “죽산이 진짜 친일을 했으면 일제가 이 사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죽산은 헌금을 낼 만큼 여유롭지도 않았다”며 “8.15 해방 당시 죽산이 머물던 인천 집에 수백여명이 모여 그를 연호하며 환호했다. 친일을 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며 친일 논란을 일축했다.

이어 “사법살인을 당한 죽산의 진정한 복권은 국가의 마지막 양심”이라며 “죽산을 독립과 대한민국 건국의 유공자로 인정하고 서둘러 훈장을 추서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죽산은 진보정당과 보수정당이 양 날개처럼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두루두루 고루고루 잘 사는 나라를 꿈꾸고 남북이 대화로 평화통일을 지향하기를 기대했다. 그가 주창한 진보적 노선은 오늘날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와 다름없다. 다만, 분단된 남북 상황 속에서 죽산의 노선은 설 자리가 없었을 뿐이다.

죽산의 명예회복에 앞장선 기념사업회와 유족, 새얼문화재단은 올해를 독립유공 훈장 추서의 적기로 보고 있다. 7월 31일 죽산 서거 60주기 추모제, 그의 영정에 이젠 서훈을 추서하는 게 시대의 양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