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실 외척의 반란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898년 전인 1126년 3월 28일 고려시대 인주(현 인천) 이씨 문벌귀족이자 권신이었던 이자겸(출생연도 미상~1126)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자겸의 난’은 왕실의 외척이었던 이자겸이 왕위를 찬탈하고자 일으킨 사건이었다. 앞서 고려시대 문벌귀족이 정권을 장악하는 방법 중 하나는 왕실과의 혼인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막대한 권력을 가진 인물은 대표적으로 인천 이씨 집안 이자겸이었다.

이자겸은 자신의 딸들을 예종과 인종에게 시집을 보내 막강한 왕실 외척 권력자로 자리를 잡았다. (사진출처 KBS 역사저널 그날)
이자겸은 자신의 딸들을 예종과 인종에게 시집을 보내 막강한 왕실 외척 권력자로 자리를 잡았다. (사진출처 KBS 역사저널 그날)

그는 둘째 딸을 예종(1079~1122, 향년 43세)의 왕후로 보내 예종의 아들인 인종(1109~1146, 향년 36세)의 외할아버지가 됐다.

1124년 4월 예종이 승하하자 이자겸은 어린 인종(당시 14세)을 왕위에 올렸다. 그리고 이자겸은 자신의 셋째와 넷째 딸을 외손자인 인종에게 시집을 보냈다.

이자겸은 이로 인해 왕실 외척 인물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그의 전횡은 점점 심해져갔다.

이에 인종은 이자겸 일파를 축출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자겸은 ‘이씨가 왕이 된다’라는 ‘십팔자도참설’을 믿으면서 인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했다.

이 사실을 파악한 인종은 이자겸의 심복이자 한국 역사상 무력으로 손에 꼽는 무신 척준경(출생연도 미상~1144)을 회유해 병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인종은 척준경에게 이자겸은 신의가 없다며 이자겸과의 사이를 이간질 했고 차라리 왕실을 위해 층성을 바칠 것을 권유한다.

이에 척준경은 인종의 말에 수긍하고 이자겸을 배신하며 개경 왕궁에 침입한 이자겸의 반란 세력들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그렇게 왕이 되고자 한 이자겸은 반란에 실패하고 전남 영광으로 유배길에 올라 생을 마감했다.

한편, 척준경 역시 이자겸과 반란에 가담한 죄로 정지상(출생연도 미상~1135, 서경 출신 관료)의 탄핵을 받아 토사구팽 당해 유배 길에 오른다. 

이자겸과 인주 이씨, 그리고 인천

문벌귀족이자 욍실 외척으로 권력을 떨친 이자겸은 인주 이씨였다. 여기서 인주는 현재 인천의 옛 지명으로 인주 이씨들이 세거하던 곳이었다. 

특히, 이곳 인주와 인주 이씨 가문은 고려 11대 왕 문종(1019~1083, 향년 63세)부터 17대 왕 인종(1109년 생, 재위 1122년 ~ 1146년)까지 7대에 걸쳐 5명의 태후와 5명의 왕후를 배출했다.

그렇게 인주 이씨는 고려 왕실 외척 가문의 막강한 권력 집단으로 성장했고 이 중 대표적 인물이 이자겸이었다.

비록 이자겸의 난으로 인주 이씨가 큰 타격을 입긴 했으나 인주 이씨 가문의 위상과 인주의 지역 위상은 조선까지 이어진다. 

인주는 1459년에 군에서 도호부로 승격했다. 이는 왕이 즉위했을 때 왕과 왕비의 친가와 외가의 고을 등급을 올려주는 관례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당시 조선 임금이었던 세조는 파주에 기반을 둔 윤번(1384~1448, 향년 64세, 공판 역임한 문신)의 딸과 혼인했다. 그리고 윤번은 인주 이씨인 이문화(1358~1414, 향년 56세)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즉, 세조의 비인 자성 왕비(慈聖王妃, 윤번의 딸)의 외향(왕의 외가가 있던 곳)이 인주라는 이유로 도호부로 승격한 것이다.

아울러, 인주의 현 지명인 ‘인천’엔 지역 격하의 역사도 존재한다. 

인주는 조선 태종(1367~1422, 향년 54세) 시기 국내 군현의 이름 중에서 주(州)로 불리던 것을 산(山) 또는 천(川)으로 바꿨다. 

이로 인해 주 보다 작은 행정단위인 천으로 명칭이 변경돼 지금의 지명인 인천(仁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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