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 1월 9일, 조선 왕 인조 남한산성 피난
45일 처절한 항전 끝에 청나라 여진족에 항복
경술국치 이전 조선 왕조 최대 굴욕의 역사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1637년 1월 9일, 조선의 왕 인조(1595~1649)는 청나라의 침입을 피해 한양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란을 떠났다.

그 결과 인조는 차가운 삼전도(현재 서울 송파) 바닥에 무릎을 세 번 꿇고 머리를 아홉 번 박았다.

경기 광주시에 위치한 남한산성 (사진제공 남한산성 도립공원)
경기 광주시에 위치한 남한산성 (사진제공 남한산성 도립공원)

조선이 ‘변방 오랑캐’로 취급했던 여진족에 굴종한 ‘삼전도 굴욕(1637.2.24)’은 경술국치 이전 한국 역사 최대 굴욕으로 꼽힌다.

삼궤구고두례(신하나라가 큰 나라를 만났을 때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예법)로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다. 조선은 청의 신하가 되었고 항복 대가로 배상금과 함께 소현세자(1612~1645)와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훗날 효종, 1619~1659), 조선 백성 20만명이 청에 인질로 보냈다.

앞서 청(당시 후금)은 반정을 일으킨 인조의 광해군(1575~1641) 폐위 문제를 구실로 조선을 침입해 정묘호란(1627)을 일으켰고, 조선과 협상을 벌인 뒤 강화를 맺고 돌아갔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사이에는 약 10년의 간격이 있었다. 한 번 당했으면 이를 반성하고 대비했어야 했다. 하지만 인조와 인조 반정을 주도한 서인 세력은 그러지 못했다. 광해군의 실리외교는 인조 반정 세력에 의해 폄훼됐다.

무능하기 짝이 없던 인조는 '싸워야 한다', '화친해야 한다'는 척화파와 주화파의 말싸움에 이리저리 휘둘려 시간만 허비했을 뿐, 결단하지 못했고 조선을 망국의 벼랑 끝으로 밀어 넣었다.

애석하게도 당시 심양에 머물며 급변하던 국제 정세를 면밀하게 파악했던 소현세자는 귀국 후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망조든 나라의 무능한 임금의 세자로 태어난 게 애석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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