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사의 선구자 '고유섭 평전' 출간 책담회
이원규 작가, '우현 고유섭의 생애' 주제로 강연
“우현은 일제 식민사관 깨부순 문화독립운동가"

인천투데이=심형식 기자│"한국 미술사의 선구자 우현 고유섭은 그의 학문과 정신사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우현이 쓴 '조선고적의 빛나는 미술'과 '우리의 미술과 공예'는 식민지 상황에서 민족예술사의 새 지평을 열고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했다"

우현 고유섭 평전(한길사)을 쓴 이원규 작가는 지난 19일 한국근대문학관(인천 중구 신포동 소재)에서 열린 ‘한국미술사의 선구자 고유섭 평전’ 출간 기념 책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원규 작가는 지난 16일 내년 2024년 우현 고유섭(1905~1944) 선생 타계 80주기를 맞이해 '한국미술사의 선구자 고유섭 평전'을 발간했다. 이원규 작가는 죽산 조봉암 평전과 약산 김원봉 평전을 집필한 인천의 원로 작가다. 2년여에 걸쳐 우현 고유섭 선생의 평전을 집필했다.

우현 고유섭 평전 출간 기념 책담회에서 패널 토론을 진행하는 모습
우현 고유섭 평전 출간 기념 책담회에서 패널 토론을 진행하는 모습

대한민국의 미술사와 미학을 일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자주적으로 정립

우현 고유섭 선생은 대한민국의 미술사와 미학체계를 정립한 선구자로 통한다. 우현 고유섭이 있어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신라탑이 아니라 백제탑이라는 것을 알고, 우현 선생 덕에 고려청자를 비롯한 국보를 간직할 수 있으며, 우현 선생 덕에 간송 전형필 선생이 있을 수 있고, 인문도서 '나의문화유산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선생도 나올수 있었다. 

우현 고유섭은 1905년 인천 용동 큰우물거리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보성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대(철학, 미학)를 나왔다. 대학 졸업 후 개성박물관 관장을 지내며 고대국가부터 조선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미술사와 미학을 일제 식민사관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인 시각에서 정립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조선미술사’, ‘송도의 고적’, ‘조선탑파의 연구’, ‘고려청자’, ‘조선건축미술사 초고’, ‘미학과 미술평론’, ‘수상 기행 일기 시’, ‘조선금석학 초고’ 등이 있다. 한국 미술사와 미학은 이렇듯 우현 고유섭 선생의 철학과 안목으로 시작한다. 

고유섭 평전 출간 기념 책담회는 우현의 유족에게 한길사 김언호 대표와 이원규 작가가 평전을 증정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 뒤 이원규 작가의 ‘우현 고유섭 선생의 생애’ 강연이 이어졌다.

평전을 받은 우현 고유섭 선생의 아들 고재현 씨는 “추운 날씨에도 일정을 비우고 참석해 준 여러분께 감사하다”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 책을 편찬해 주신 한길사와 이원규 선생에게 특히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원규 작가는 이날 강연에서 "우현은 일제 식민사관을 깨부수는 것을 목표로 했다"며 "식민지 상황에서 민족예술사 지식을 일깨우고 민족적 자긍을 주는 글을 썼다"고 말했다.

아래는 이 작가의 강연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기자말>

우현 고유섭 평전 출간 기념 책담회에서 이원규 작가가 강연하는 모습
우현 고유섭 평전 출간 기념 책담회에서 이원규 작가가 강연하는 모습

인천 중구 우물가서 고유섭 출생, 전통음악 연구하고 공연한 아버지 고주연

우현 고유섭 선생은 1905년 2월 5일 인천부 축현외동 외리 23통 4호 큰우물 옆 초가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주소는 인천시 중구 용동 117번지다.

우현 고유섭을 계승하고 해방 직후 국내 최초 공립박물관을 개관해 대한민국 1세대 미술 평론가로 널리 알려진 석남 이경성 선생은 우현 고유섭 선생의 일가가 평안도에서 내려왔다고 했다. 하지만 아니다.

석남 선생이 잘못 알고 말한 얘기를 언론사들이 다 받아쓰며 사실이 왜곡됐다.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문헌 ‘축현 외동 호적대장 외동2’와 '제주 고씨 족보'엔 고유섭의 아버지 고주연이 한성 용산방에서 인천으로 왔다고 적혀있다.

고유섭의 아버지 고주연은 1906년 황실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을 다녀와 무역에 성공하며 경제적으로 부유했다. 고주연은 1921년 아우 고주철(대중일보 창간)과 함께 이우구락부에 참여해 전통음악을 연구하고 공연하며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문화독립운동을 했다.

우현은 8~9세까지 인천공립보통학교(오늘날 창영초등학교) 인근에 있던 의성서숙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10~13세에 인천공립보통학교를 다니고, 14~15세에 다시 의성서숙에서 한학을 공부 한 듯 하다.

우현이 한문을 공부한 기록은 8~9세 의성서숙밖에 없는데, 그때 배운 한학 실력으로 조선시대 고서를 읽으며 훌륭한 글을 써냈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그래서 행적이 묘연한 14~15세에 의성서숙에서 한학을 더 배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1920년 4월, 16세에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다. 우현은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여해 인천에서 공립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보성고보가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3.1만세운동의 발상지였고, 교사들이 애국심 교육을 열심히 했던 점 등이 우현의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우현은 보성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해 1925년부터 1929년까지 철학과 미학, 미술사를 공부하며 독일 유학파 교수들의 강의에 몰두했다.

이원규 작가가 강연하는 모습
이원규 작가가 강연하는 모습

“우현 고유섭의 글이 식민지 상황에서 민족자긍심 일깨워”

대학졸업 후 1930년부터 경성제대 연구실에서 조수(조교와 교수의 중간 지위)로 일했다. 규장각에 있던 문헌 등을 치밀하게 필사해 초록 작업을 펼쳤다. 1931년엔 인천에서 경성 숭이동으로 이사하는데, 이게 인천에서 마지막 거주였다.

1933년부터 돌아가시는 날까지 개성박물관장으로 일했다. 개성박물관을 지을 때 기부금을 제일 많이 낸 사람이 공성학이란 사람이다. 공석학의 아들 공진항은 고유섭과 보성고보 선후배 사이다. 경성제대 조수 시절 고유섭의 글을 높게 평가했던 공성학이 고유섭을 개성박물관장으로 초빙했다.

우현은 박물관장으로 일하면서 학자와 연구자의 삶을 살았다. 당시 일제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펼치던 시기로 자기들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 하기 위해 조선엔 독자적인 문화예술이 없다고 왜곡했다. 우현은 일제의 식민사관을 깨는 것을 목표로 했다.

우현이 쓴 논문 ‘조선고적의 빛나는 미술’과 ‘우리의 미술과 공예’는 식민지 상황에서 민족예술사의 지식을 알리고 새 지평을 열고,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글이었다. 당시 중학교 교과서에 우현의 글이 실리기도 했다. 그가 최고 지성이자 문화 독립운동가로 평가받는 이유다.

1936년과 1939년 두 차례 ‘조선탑파의 연구’를 발표했다. 아울러 그 사이 고대미술연구, 수필, 미술사 서적을 여러 권 발표했다. 하지만 핵심적인 글은 그래도 ‘조선탑파의 연구’다. 탑과 불교미술에 관한 연구는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를 따라가는 후학이 없을 정도다.

1940년 ‘조선미술문화의 몇 낱 성격’을 펴내며 '조선 미술은 상상력과 구성력의 풍부함과 구수함, 무기교의 기교'라고 규정했다. 후학은 이 문장을 두고 우현이 식민사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현의 문장에 공감하고 있다.

책담회가 끝나고 찍은 단체사진
책담회가 끝나고 찍은 단체사진

“우현 고유섭 일반 대중에게 잊혀, 인천이 고유섭 80주기에 나서야”

인천에서 우현의 업적을 다시 기록하고 추켜세우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1962년 인천시립박물관이 첫 추도회를 열었고, 1974년 우현 타계 30주기엔 인천시립박물관(현 제물포구락부) 앞에 추모비를 건립했다.

2001년~2008년 인하대와 인천민예총이 우현학술제를 매년 열었고, 새얼문화재단이 ‘황해문화’에 우현 관련 논문들을 싣고 새얼문화대상 1회 수여, 청동좌상을 건립했다.

내년 2024년은 우현 고유섭 선생이 타계한 지 80주기가 되는 해다. 그러나 인천 시민에게 우현 고유섭의 이름은 거의 잊힌 상황이다. 인천에서 인천 출신 위인의 삶과 정신을 기리고 그의 업적을 재조명할 수 있는 80주기 기념 사업이라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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