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우현 고유섭 80주기 맞이해
고유섭 평전 저자 이원규 작가 인터뷰
인천이 배출한 한국 최초의 미학자

인천투데이=심형식 기자│대한민국 미술사와 미학 학문체계를 정립한 우현 고유섭 선생(1905~1944년)의 서거 80주기를 맞이해 이원규 작가가 집필한 '우현 고유섭 평전'이 12월 초에 나온다.

이원규 작가는 그의 저서 '민족혁명가 김원봉'으로 2020년 제 14회 우현예술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 작가의 대표작은 '김경천 평전', '조봉암 평전', '누가 이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 등이다. 이 작가가 죽산 조봉암 다음으로 평전을 쓰겠다고 마음 먹은 인물이 바로 우현 고유섭 선생이다. 

우현 고유섭 선생이 있어 국내 최초 공립박물관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지낸 석남 이경성 선생이 있을 수 있었고, 국보급 문화재의 보고 간송미술관의 토대를 마련한 간송 전형필 선생이 나올 수 있었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저술한 유홍준 교수의 스승 이자 전 국립박물관장 최순우 선생도 우현 고유섭의 3대 제자(최순우, 황수영, 진홍섭) 중 한 명이다. 

우현 고유섭.(사진제공 인천문화재단)
우현 고유섭.(사진제공 인천문화재단)

이처럼 우현 고유섭 선생은 대한민국의 미술사와 미학의 체계를 정립한 선구자로 통한다. 일제 강점기 때 경성제대 철학과 졸업 후 개성박물관 관장으로 지내며 고대국가부터 조선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미술사와 미학을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인 시각에서 정립했다.

우현은 일제강점기 개성박물관장,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하며 조선인의 눈으로 조선 작품을 해석하고자 했다. 국내 명승·고적·사찰을 답사·연구해 책으로 집대성하고 한국 미학과 미술사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그의 저서로는 ‘조선미술사’, ‘송도의 고적’, ‘조선탑파의 연구’, ‘고려청자’, ‘조선건축미술사 초고’, ‘미학과 미술평론’, ‘수상 기행 일기 시’, ‘조선금석학 초고’ 등이 있다.

<인천투데이>는 우현 고유섭의 80주기를 맞아 고유섭 평전을 탈고한 이 작가와 지난 24일 만났다.

이 작가는 우현의 연구 중 특히 탑에 대한 연구는 후대가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고 평가했다.

아래는 지난 24일 이 작가와의 인터뷰를 정리한 글이다 <기자말>

고유섭 평전 저자 이원규 작가. (12월 초 출간 예정)
고유섭 평전 저자 이원규 작가. (12월 초 출간 예정)

우현 고유섭 선생이 개성박물관에 약 1931년부터 작고하기 전까지 몸담고 있었다. 그곳에서 남긴 업적은 어떤 것이었나?

이를테면 오국시대와 고구려시대 미술에 대한 저서가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80년이 넘도록 후학이 못 따라가는 것은 우현의 탑에 대한 연구다.

제자인 최순우(1916~1984), 황수영(1918~2011), 진홍섭(1918~2010)은 고려시대 회화 같은 부분에서는 스승을 넘어서기도 했다. 그러나 탑과 불교미술에 관한 부분은 우현을 따라갈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학자들은 정림사지 5층 석탑을 신라의 탑이라고 규정했었다. 당시 일본학자들은 신라 탑의 특징이나 양식만을 가지고 정림사지 5층 석탑을 신라의 것이라 주장했는데, 고유섭은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백제의 것임을 알아보고 이를 뒤집었다.

우리가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백제의 문화제로 기억하고 있는 것도 우현의 업적인 것이다.

이원규 작가가 설명하는 모습.
이원규 작가가 설명하는 모습.

죽산 조봉암 평전 이후 왜 고유섭 평전을 쓰고자 했나?

우현 고유섭 선생은 미술사, 미학이라는 장르를 대한민국에서 처음 개척하고, 도입한 사람이다. 그래서 미술사와 관련해선 고유섭에 관한 논문이 많다.

그러나 우현의 생애에 대한 글은 아무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인천에 있는 내가 우혀의 삶을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현 고유섭 선생은 1905년에 태어나 1944년까지 40년을 살았는데, 그 40년 생애 중 개성에서 개성박물관장으로 지내던 10여년의 시간에만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수년간 우현 고유섭의 흔적을 쫓았다. 자료를 수집하다보니 우현이 경성제국대학이나 보성고등학교를 다닐 때 썼던 글들이 있었다. 인천을 묘사한 글, 고향을 묘사한 글, 고유섭의 가정사 등을 접하며 고유섭의 생애사를 정리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술을 깊이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고유섭 평전을 쓰더라도 의견을 개진하기는 어려웠다. 내 역할은 고유섭의 생애를 정리해 후대 연구자를 위한 기초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미술사를 공부한 사람들이 미술사 부분을 보충해주면 되겠다고 생각한다.

이원규 작가가 지도를 보는 사진.
이원규 작가가 지도를 보는 사진.

평전을 탈고한 후 소감은?

연민이 생겼다. 우현이 넘어서고자 했던 사람이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라는 일본의 학자다. 고유섭 선생에 대해 ‘일본을 넘어서려고 했으나 식민사관을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니냐’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어 한동안 논란이 됐다.

해방 직전 1944년 고유섭 선생이 돌아가신 다음에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우현이 저술한 10권의 책을 한 권 한 권 발간해서 연구자들이 나눠보게 하는 작업이었다.

두 번째로는 우현의 제자들이 책을 해체하고 붙이고 해석을 해서 우현의 책을 사람들이 이해하게 만들었다. 세 번째에는 우현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네 번째로는 다시 우현이 가진 업적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졌다.

평전의 서문에다 우현에 대해 비판적인 논문을 쓴 모든 분들한테 고맙다고 썼다. 우현에 매몰되지 않고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었다.

우현 선생의 생애를 담은 책은 없었다. 최초로 이 책을 발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우현이 인천 출신이어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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