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 경인씨그랜트센터 정책위원장 조현근

“이동권이란 누구든지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 안전하게 쾌적하게 갈 수 있는 권리이며, 주민 이동의 발을 지키는 일은 지방자치단체 및 국가의 큰 책무다.”

백령도 주민인 김필우 전 인천시의원이 환갑을 지나 만학(晩學)에 나이에 쓴 ‘서해5도서의 지역적 특성과 이동권 보장에 관한 연구’에서 정의한 이동권의 개념이다.

그는 서해5도 주민의 고립 원인을 6.25전쟁 정전협정에서 찾았다. 당시 UN연합군은 군사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옹진반도를 조기 휴전을 위해 버렸고, 이 ‘버려진 옹진반도’가 백령도 등 서해 5도서 주민의 이동에 제약을 가져왔다고 여겼다.

그러면서 논문 서두에 “무엇보다 주민의 희생 위에 서해 최북단의 안보가 지켜지고 있음으로, 5도서 주민의 이동권을 보장해줘야 하는 정당성은 아무리 거듭해 주장해도 넘침이 없을 것”이라며 울분을 담아 강조했다.

이 울분은 2003년 10월 10일 대한민국 최초로 섬 주민의 이동권을 보장한 ‘인천광역시 서해5도서 등 주민여객선 운임조례(인천시 조례 3706호)’를 발의와 제정으로 이어졌다.

인하대 경인씨그랜트센터 조현근 정책위원장
인하대 경인씨그랜트센터 조현근 정책위원장

이 조례는 정부가 연안여객선을 대중교통으로 접근하는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에 농어민의 삶의 질 향상법 제35조 농어촌지역 교통편의 증진 지원과 해운법 제44조 여객선 이용자에 대한 운임지원 조항이 개정돼 현재 국내 모든 섬 주민이 혜택을 보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상 이동권은 명시적·독립적으로 규정돼 있지 않으나, 헌번에 나와 있는 인간으로서 존엄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 평등권, 거주·이전의 자유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외국의 경우 독일, 캐나다, 핀란드 등 국가는 주민의 이동권을 독립 조항으로 규정하고 이동의 자유나 권리를 다른 권리와 구분해서 명시하고 있다.

현재 국내 연안여객선은 섬 주민에게 유일한 대중교통수단이다. 하지만 ‘사회적 기본권’으로서 주민 이동권을 국가가 적극적으로 보장하고 있지 않다. 2021년 1월 개정된 대중교통법 정의에 연안여객선을 추가했지만, 부처 간 이견으로 연안여객선은 대중교통기본계획을 수립할 때만 국토부 장관이 해수부 장관과 협의하게 하고 있다.

2010년 11월 23일 발생한 연평도 포격 사건 때 ‘서해5도 지원특별법’을 제정했다. 군사적 위협으로 인해 북과 직접 대치하고 있는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소연평도 주민이 안심하고 거주할 수 있는 정주여건을 조성하는 게 목적이다. 특별법이니 서해5도의 개발과 지원에 관해 다른 법률에 우선해 적용한다. 주민이 섬을 떠나 빈 섬이 되면 국가 안보에 더 큰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서해5도법은 이명박 정부가 연평도 주민의 집단 이주 요구에 대해 이주 대신 재정착을 하기 위해 만들었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이후 4일 뒤 27일 주민비대위는 국무총리와 비공개회의에서 이주대책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집권당인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은 이미 주민 재정착 목적의 법안을 준비해 11월 29일 발의해서 12월 8일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이 과정에 당사자인 주민 의견은 없었다.

서해5도 어민들이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며 어선에 게양한 한반도기.
서해5도 어민들이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며 어선에 게양한 한반도기.

당시 서해5도서 주민들 대한 정부의 입장을 알 수 있는 국회 회의록을 살펴보자.

행정안전부장관 맹형규(2010.11.30. 행정안전위 전체회의)

“우선 현재 피난민이라고 부르는 게 적절할 것 같습니다만 그분들은 오만정이다 떨어진 것 같습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여기에 정주여건을 마련해 줬으면 좋겠다 하는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의 입장은 과연 그렇게 돼 가지고 주민들이 전부 다 그 섬을 떠났을 적에 그것이 비단 연평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옆에 백령도도 있고 대청도도 있고 또 국가 군사 전략적인 문제도 있고 그런 문제가 좀 있습니다.”

행정안전부제2차관 안양호(2010.12.3. 행정안전위 법안심사소위)

“이주대책은 우리가 이분들이 나오도록 지원을 한다는 것은 영토 수호 개념하고도 봐야 되고요, 주민들이 다 빠져나오고 군인들만 있으면 이것이 여러 가지 국제 분쟁지역이 될 수 있다는 전문가 의견도 있고 NLL에 대한 사수를 하려는 우리 국방안보 정책상으로도 주민들이 빠져나오게 하는 지원 대책을 하는 것은 저희들은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이처럼 서해5도서 주민의 섬 생활은 국가 안보를 위해 짊어진 현실적 굴레가 됐다. 이러한 ‘정주의 특수성’으로 주민들은 직업 선택과 대체 소득의 한계뿐 아니라 뭍으로 이동하는 것을 지금까지 제약받고 있다. 최근엔 여객과 화물을 동시에 싣는 여객선이 예비선도 없이 긴급 수리에 들어간 채 무려 열흘 넘게 중단돼 수산물 판매는 고사하고 생필품 보급에 심각한 차지를 빚는 고립된 상태가 열흘 넘게 지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는 ‘안보의 특수성’을 이유로 주민의 재산권과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주민의 조업 규제 완화와 정주개선 요구에 대해서는 ‘타 지역과 형평성’을 이유로 거절하는 핑계를 대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모순된 태도와 입장은 5도서 주민에게 피해와 희생만을 강요한다. 특히, 주민 이동의 자유는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임에도, 연평도 포격 이후 지난 12년간 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2020년 문재인 정부는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을 5년 더 연장하면서 백령공항 건설, 연평도항 건설, 백령항로 대형여객선 도입 지원, 전화·인터넷 통신망 품질 개선 등 주민숙원사업 4건을 반영했다.

당시, 백령도 대형카페리여객선 도입은 2000톤급 선박이 3년 뒤 선령이 만료될 예정이라 해수부·인천시·옹진군이 함께 논의해 조속히 문제를 해결키로 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간만 흐르고 달라진 게 없다. 정부가 반영한 정책을 지금까지 옹진군수나 인천시장이 왜 못 챙긴 건지 알 수가 없다. 무능인지 무관심인지 모르겠다.

서해5도 주민은 울릉도, 흑산도 등 육지와 먼 곳에 있는 섬과 비교해 봐도 이동권이 가장 열악하다. 5도서 주민 수 대비 여객선 운항 정원은 16.8%밖에 되지 않으며 결항률도 무려 30.5%에 달한다. 반면 뭍으로 왕래하는 섬 주민의 이용객 수는 38.0%로 이들 섬 3개(울릉도, 흑산도, 서해5도) 권역 중에 가장 높다. 연평도 주민의 여객선 이용객은 52.1%나 된다.

표. 서해5도·울릉도·흑산도 섬주민 연안여객선 이용현황(해양수산부·행정안전부 통계) ·
표. 서해5도·울릉도·흑산도 섬주민 연안여객선 이용현황(해양수산부·행정안전부 통계) ·

서해5도는 인구가 비슷한 울릉도와 비교해도 주민들의 여객선 이용이 더 많은데 전체 주민에 대한 운항 여객선 수용률은 낮다. 평상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문제뿐 아니라, 유사시 여객선은 주민의 피란 수단이 되기 때문에 더 심각하다.

연평도 포격 사건 백서에 따르면, 2010년 북의 포격 당시 연평도 주민은 약 1300명이었다. 북의 추가 공격의 가능성으로 인해 겁에 질린 주민의 96% 이상이 섬을 떠났고, 거동이 불편하거나 고령자 등 약 30여 명과 공공기관 직원들만 잔류하고 있었다.

문제는 포격 당일 피란을 위해 가용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이 없어 주민 394명은 급히 야밤에 위험을 무릎쓰고 어선을 이용해 인천으로 나왔다. 주민들은 4일간에 걸쳐 해경정, 공기부양정, 여객선을 이용해 인천 뭍으로 피란했다.

이처럼 서해5도 주민에게 여객선은 평상시 이동의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한 대중교통뿐 아니라 유사시 목숨과 연결 된 생존 수단이다. 단순히 경제성과 형평성의 대상이 아니다. 사실상 여객선 공영제가 필요한 곳이다.

연평도는 1960년대 어로저지선 남하로 인해 생계가 막막해진 주민들이 첫 번째 집단 이주를 요구했고, 2010년 포격 사건 이후 두 번째 집단 이주를 요구했다. 그때마다 정부는 안전과 지원을 약속하며 정착을 시켰다.

더 이상 서해5도 주민의 이동권 보장을 외면하면, 언젠가는 참아왔던 분노가 표출될 수밖에 없다. 또 다시 집단 이주를 요구했을 때 정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잠잠하고 조용한 바다 뒤에는 언제가 태풍이 온다는 걸 깊이 생각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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