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 자식에서 연해주 최고의 사업가가 된 최재형
대한제국의 외교관 리범진, 스스로 생을 마감하다
백무아의 모티브가 된 여성 독립운동가 ‘안경신’

인천투데이=이재희 기자│소설 ‘범도’에는 등장하지만 학교 역사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이름없는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한 평생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이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열사가 일제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저격한 날은 1909년 10월 26일이다. 이날과 홍범도 장군 순국 80주기(10월 25일)를 맞아 <인천투데이>는 소설 '범도'의 방현석 작가 인터뷰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독립운동가를 5회에 걸쳐 소개한다.

‘범도’ 속에서 등장하지만 역사책에 등장하지 않는 대표적인 인물로 황병길-김숙경-황정신, 김알렉산드리아, 박서양, 최재형, 리범진, 안경신 등이 있다.

노비 자식에서 연해주 최고의 사업가가 된 최재형

독립운동가 최재형.(출처 독립운동가 최재형 기념사업회)
독립운동가 최재형.(출처 독립운동가 최재형 기념사업회)

독립운동가 최재형은 노비의 자식에서 러시아 연해주 최고의 군인이자 사업가가 된 인물이다. 연해주 독립운동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최재형은 1860년 함경도 경원에서 태어났다. 1869년 아버지와 함께 조선인이 정착해 살던 러시아로 가게 됐다.

조선인 최초로 러시아 정교회 학교에 들어갔고, 러시아에서 서양 학문을 배우며 풍부한 학식을 갖춘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1878년 최재형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돌아와 한인 노동자들의 부당한 대우를 시정해주고 이들을 금전적으로도 지원해줬다. 조선인 중 최재형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최재형은 당시 부동항 밖에 없던 러시아에 블라디보스토크항을 만들어주고, 독립운동 자금도 지원했다.

세부적으로 연해주에 왔던 류인석과 리범윤이 13도의군을 조직할 때 총기 구입비를 지원했다. 독립운동을 하다 1920년 일본군에 의해 체포돼 5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가족들은 시신을 끝내 찾지 못했다.

소설 범도는 최재형의 비극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최재형의 흔적을 지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재형의 수난은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일본군은 그의 시신을 없앴고, 러시아는 그의 가족들을 일본 간첩으로 몰아 살해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묻힐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채 외로운 영혼으로 돌아온 그의 허묘마저 없애버렸다.

대한제국의 외교관 리범진, 스스로 생을 마감하다

이범진 초대 러시아 상주공사.(사진제공 외교부)
이범진 초대 러시아 상주공사.(사진제공 외교부)

독립운동가 리범진은 1879년 병과에 급제해 관료가 됐다. 이후 공조 참판, 호조 참판, 이조 참판, 고등 재판소 재판장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1895년 명성황후 등 무리에 붙었던 친러시아파 정치인이었다.

같은 해 을미사변이 발생한 이후, 친일정권 타도를 위해 ‘춘생문 사건’을 도모했으나 실패했다. 그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1896년 아관파천을 일으켜 친일내각이 붕괴됐다. 같은해 리범진은 대한제국의 주미공사로 발령받아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 뒤 러시아 공사로 전임됐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공사를 겸임했다.

리범진은 러시아 공사 시절 당시, 국권 수호를 위해 노력했다. 또한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로 이준과 이상설을 보내려고 하자 자신의 아들인 이위종을 보내 도움을 주게 했다.

하지만 헤이그 특사 파견이 실패로 끝났고, 직후에 홍범도를 비롯해 유인석, 이상설, 이범윤, 최재형 등이 모여 연해주 독립 운동을 도모했는데 1910년 한일 강제 합병이 이뤄졌다.

리범진은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전 재산을 모두 독립 운동을 위해 사용하며 투쟁했는데, 경술국치가 발생하자 결국 절망에 빠져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범도는 이렇게 기술했다.

우리나라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으렵니다.

백무아의 모티브가 된 여성 독립운동가 ‘안경신’

독립운동가 안경신.(사진제공 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 안경신.(사진제공 국가보훈처)

소설 범도에서 홍범도의 절친인 백무현의 여동생이자, 첫사랑 상대로 나오는 백무아는 여성 독립운동가 ‘안경신’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소설에서 백무아는 조선의 독립뿐만 아니라 불평등한 조선 사회의 모든 부조리에 맞서 싸웠던 당찬 여성으로 그러졌다.

소설에서 백무아와 홍범도의 관계는 이뤄질 듯 이뤄지지 않아 애틋함과 절절함을 남긴다. 

소설에서 백무아는 홍범도를 놔두고 미국으로 떠난 뒤 소식이 끊긴다. 다음은 백무아가 미국으로 떠나며 홍범도에게 남긴 편지 내용이다. 

- 나는 떠나지만, 그래도 부탁합니다. 당신만은 조선의 여자 누구에게도 조선의 남자가 되지 마십시오.

강자의 종이 아닌 약자의 벗으로 사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내 심장이 멈추는 순간까지 당신은 내 심장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부디, 당신이 양반과 침략자, 남자의 편에 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현 오빠가 당신을 내게 남겨주고 가서 행복하고 고마웠습니다. -WFR, WFJ 백무아. -

백무아의 모티부인 독립운동가 안경신은 1888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안경신은 일제 경찰로부터 체포돼 20여일 넘게 수감되기도 했다.

같은 해 안경신은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본부에서 모집한 군자금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1920년 일본 군인들이 대한애국부인회를 찾아내면서 회원들이 대거 체포됐으나, 안경신은 체포를 면하고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 뒤 안경신은 대한광복군에서 활동했다. 광복군은 서울과 평양, 신의주 등 3곳에서 폭탄 거사를 진행하기로 했는데, 당시 결사대 3개로 나눠 전략을 세웠다.

안경신은 제2대 소속으로, 평양파출소를 폭파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계획은 실패했다. 당시 안경신은 임신 중이었다.

이후 1921년 피신해 있던 중,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평양으로 압송됐고, 그 과정에서 아기를 출산해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으로 호송됐다.

안경신은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됐으나, 김구와 이탁, 장덕진이 논의해 안경신을 무죄 판결하라고 항의했다. 2심에서 안경신은 감형을 받아 감옥에서 20년을 살았다.

소설 범도를 집필한 방현석 작가는 "안경신의 그 뒤 행적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임신한 상황에서도 조선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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