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길-김숙경-황정선, 독립운동가 가족
김알렉산드리아. 최초의 사회주의 운동가
백정 아들 출신 ‘최초 외과 의사’ 박서양

인천투데이=이재희 기자│소설 ‘범도’에는 등장하지만 학교 역사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이름없는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한 평생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이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열사가 일제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저격한 날은 1909년 10월 26일이다. 이날과 홍범도 장군 순국 80주기(10월 25일)를 맞아 <인천투데이>는 소설 '범도'의 방현석 작가 인터뷰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독립운동가를 5회에 걸쳐 소개한다.

역사교과서에 등장하지 않지만 ‘범도’ 속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황병길-김숙경-황정신, 김알렉산드리아, 박서양, 최재형, 리범진, 안경신 등이 있다.

황병길-김숙경-황정선,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가족

독립운동가 황병길.(국립대전현충원 유튜브 갈무리)
독립운동가 황병길.(국립대전현충원 유튜브 갈무리)

황병길 독립운동가는 1885년 4월 15일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황병길은 결혼한 지 한 달만에 독립군이 됐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 시베리아로 망명해 이범윤의 사포대에 가입했다. 이후 독립운동가 최재형과 안중근이 조직한 의병대 소속으로 함북의 국경지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다.

당시 함경북도 경원의 신아산에서 일본군 여러명을 사살하면서 ‘훈춘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아내 김숙경도 남편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이들은 중국 만주 훈춘지역에서 만세 시위를 조직해 참가했다. 또한 건국회와 북로군정서에도 가담하는 등 훈춘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서 활약했다.

황병길은 일본군에게 쫓기던 생활을 하던 와중, 병을 얻어 1920년 6월 36세로 사망했다.

소설 범도는 김숙경과 황정선을 ‘조선의 독립’을 항상 우선으로 뒀던 모녀 독립운동가로 표현했다.

- 용정의 명신여고에 다니던 맏딸 정선에게 유학의 기회가 찾아왔다. 영국인 여교장은 비용을 모두 대겠다며 인물도 좋고 성적도 뛰어난 정선의 영국 유학을 권유했다. 김숙경은 딸에게 조용히 물었다.

“정선아, 망국노 신세에 박사가 대수일까? 우리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

김숙경은 황정신에게 학업보다 ‘조선의 독립’이 먼저라며, 독립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항상 가르쳤다. 결국 이 둘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치다가 숨졌다.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것이다.

김알렉산드리아, 한국 최초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리아.(KBS 역사저널 그날 유튜브 갈무리)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리아.(KBS 역사저널 그날 유튜브 갈무리)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리아는 1885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함경도 경원 출신의 김두서로, 김두서는 통역사로 일하며 임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도우며 치료받을 수 있게 지원했던 인물이다.

아버지의 친구인 폴란드계 러시아인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혼인했다가 1914년 이혼한 뒤, 1915년부터 우랄 지방의 벌목장에서 통역관으로 일했다.

김알렉산드리아는 1916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한 뒤, 레닌과 협력관계를 맺었다. 그 뒤 김알렉산드리아는 극동 지역의 공산주의 확산을 위해 떠나, 1917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김알렉산드리아는 이렇게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운동가가 됐다.

김알렉산드리아는 독일의 밀정으로 오해받아 러시아 감옥에 체포돼 있던 이동휘를 석방할 수 있게 도왔으며, 이후 1918년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결성했다. 이는 한국 최초의 볼셰비키 정당이었다.

그 뒤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위협을 느끼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인 부대를 구성해 반일 항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일본군에 체포됐고, 1918년 9월 처형당했다.

소설 범도는 김알렉산드리아가 순국할 당시를 표현하며, 죽기 전까지도 ‘조선 독립’을 간절히 원했던 인물임을 보여줬다.

- 제가 방금 걸어온 열세 걸음은 제 심장에 새긴, 빼앗긴 조국 조선의 13도입니다. 조선동포 여러분, 연해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제가 밟아보지 못한 조선 13도에 여러분이 평등의 씨앗을 심고 해방의 꽃을 피워주십시오.

노동자, 농민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일해온 극동인민정부의 외교장관으로서 저의 마지막 인사를 여러분께 전합니다. 볼세비키혁명 만세! 조선독립 만세!! -

백정 아들 출신 ‘최초 외과의사’ 박서양

독립운동가 박서양.(KBS 다큐 유튜브 영상 갈무리)
독립운동가 박서양.(KBS 다큐 유튜브 영상 갈무리)

독립운동가 박서양은 1885년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조선인 최초로 외과의사가 됐던 인물이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외과의사로 재직했다.

1917년 만주 연길로 망명해 용정에서 병원을 세워 운영하고 숭신소학교 등 학교 7곳을 세워 민족 교육을 지원했다. 당시 학생들을 교육하면서 독립운동을 끊임없이 지원했다.

1930년 숭신소학교 학생 100여명이 광주학생운동과 제2차 서울만세운동을 펼치다 일본군에 의해 연행되기도 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사건 의후, 숭신소학교는 임시로 폐교당했다가 다시 복교됐다. 그 뒤 1935년 최종적으로 폐교됐다.

박서양은 숭신소학교 폐교 이후 독립운동 기반이 무너지자, 1936년 귀국해 황해도 연안에서 개인 병원을 운영하다 1940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소설 범도는 박서양을 조선 독립을 위해 다친 열사들을 치료하고, 교육 운동으로 미래 세대를 키워 낸 ‘등불’이라고 표현했다.

- 박서양은 한해 1만명에 달하는 환자를 보았는데 3분의 1은 무상 진료 환자였다. 이름 그대로 세상을 구하는 병원이었다. 그의 구세의원은 가난한 동포들의 목숨을 지키는 등불이었고, 독립운동의 연락 거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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