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2023 인천, 조봉암 심포지엄' ①정계향 교수 발제
조봉암, 인천 곳곳 지역 행사에 참석해 인적 관계 구축
조선공산당 활동으로 ‘체포’ 형무소 출옥 후 인천 정착
해방 후 인천서 정치 활동 인천 현안 대응 조직과 교류

인천투데이=박규호·심형식 기자│“조봉암이 일제 말기 인천에서 보낸 시기는 이상적 혁명가에서 현실정치인으로 변모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바탕엔 민중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자리잡고 있었다.”

정계향 울산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는 26일 인천YWCA에서 열린 ‘2023 인천, 조봉암 심포지엄’에서 이같이 말했다.

2023 인천 조봉암 심포지엄 참가자들이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2023 인천 조봉암 심포지엄 참가자들이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이날 행사엔 ▲이모세 죽산조봉암기념사업회 회장 ▲서준석 인천시 정무특보 ▲조성환(민주, 계양1) 인천시의원 등이 참석했다.

심포지엄 발제는 정계향 울산대 연구교수가 맡았으며, ▲김대영 인천시의원(비례, 민주)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 ▲양윤모 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위원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진오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이 참석해 토론했다.

이모세 죽산조봉암기념사업회 회장은 “오늘은 죽산 조봉암 선생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장녀인 조호정 여사가 소천한지 1주기가 되는 날”이라며 “조호정 여사가 하늘에서 심포지엄을 보고 있다면 누구보다 기뻐할 것”이라고 인사말을 했다.

발제를 맡은 정계향 울산대 연구교수는 이전 연구들이 조봉암의 인천 생활을 비판적으로 평가했다며 조봉암의 인천 생활은 이후 정치적 행보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아 주목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조봉암은 1939년부터 1948년까지 조봉암은 인천 지역 경험이 어떤 방식으로 남겨졌는지 흔적을 살펴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아래의 내용은 정계향 교수 발제 내용을 정리한 내용이다. <기자말>

조봉암, 인천 곳곳 지역 행사에 참석해 인적 관계 구축

조봉암은 1899년 9월 25일 강화군 신원면에서 태어났다. 조봉암이 강화군 밖으로 나가게 된 것은 1919년 강화군의 3.1 만세 시위에 가담했다가 체포된 이후이다.

조봉암은 3월 18일 시위에 참여하고 격문을 강화 읍내에 배포하는 일에 가담했다가 서대문 형문소에 수감돼 재판을 받았다.

감옥 수감을 계기로 조봉암은 나라와 민족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이후 다시 강화로 돌아와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강화는 인천 소속이 아닌 경기 소속이었기에 조봉암은 순회 강연이나 행사에 참여하는 형식으로 인천에서 활동했다.

당시 인천부와 강화군은 별개의 행정구역이라 조봉암이 인천에 대해 어떤 특별한 감정이 있었을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다만, 강화 사람들이 상급학교 진학 혹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인천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보면, 조봉암 입장에서 인천이 완전히 낯선 도시는 아니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조봉암이 활동의 근거지를 국외로 옮기면서 조봉암과 인천의 인연은 완전히 중단되는 것처럼 보였다.

조선공산당 활동으로 ‘체포’ 형무소 출옥 후 인천 정착

조봉암은 코민테른(각국 공산당의 연합)에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승인을 요청하기 위해 1925년 4월 말 모스크바로 향했고, 해외에서 활동하다 1932년 5월 1일 체포됐다.

조봉암은 출소 후 딸인 조호정을 6년 가까이 돌봐준 문중 어른이 살고 있는 인천에 정착했다. 이 때 YMCA 중등부 과정에서 만난 박남칠과 고향 친구 정수근이 조봉암의 인천 정착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남칠과 정수근은 인천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인천 사회운동에 참여했던 주요 인물인 김용규, 이보운, 김요한 등과 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조봉암은 이미 형성된 인적 관계에 편입되면서 인천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인천에서 조봉암이 정착한 것은 박남칠, 김용규 등 인천 지역 인물들과 관계가 주요하게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2023 인천 조봉암 심포지엄에 참석한 참가자들이 토론을 진행 중이다.
2023 인천 조봉암 심포지엄에 참석한 참가자들이 토론을 진행 중이다.

조봉암, 일제강점기 말기 감시로 일부 협조 '비자발적'

조봉암은 인천에서 생활하는 동안 특별요시찰인으로 분류돼 일제의 계속적인 감시를 받았다.

1941년 감시대상이던 조봉암은 그 해 연말 국방헌금을 헌납했다. 150엔을 헌금했는데 조봉암이 이 비용을 자발적으로 냈다고 보기 어렵다.

장녀 조호정 역시 자신의 회고록에서 넉넉하지 않았던 가정 형편을 여러 차례 기술했기에 이 비용을 자발적으로 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제는 조봉암이라는 이름이 필요했고, 독립운동가이자 ‘조선공산당의 거두’라고 칭해지던 조봉암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휼륭한 선전이었다.

전쟁 막바지 일제는 조봉암에 대한 압박을 늘렸고, 조봉암은 국내를 떠날 생각을 하고 상하이의 동지에게 편지를 썼지만 발각돼 구금된 상태로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인천에서 정치 활동 인천 현안 대응 조직과 교류

조봉암은 해방 후 인천치안유지회, 인민위원회 결성,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결성, 민주주의민족전선 인천위원회 등 정치활동을 이었다.

특히 이념지향이 약하지만, 인천의 현안과는 밀접한 관련을 맺는 조직과 교류했다. 인천에서 생활인으로 지내면서 조봉암은 이념을 넘어 현실을 새롭게 고민하고 발견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봉암이 생각하는 민중은 자신이 직접 만났던 이들이고 스스로의 경험으로 이해하게 된 실재적 존재들이다.

무산자계급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던 것에서 조봉암은 민중을 새로운 정치의 기반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이는 해방 공간에서 조봉암의 행보를 변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동안 조봉암의 인천 생활은 강요된 휴면기, 개인적 삶에 매몰된 시기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일제 말기 인천에서 보낸 시기는 조봉암이 이상적 혁명가에서 현실정치인으로 변모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바탕엔 민중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자리잡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조봉암은 극단적인 정치 체제를 부정하고 민중을 위한 정치, 민중을 참여시키는 정치는 구상하는 등 새로운 정치를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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