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책으로 세상 읽기 8. ‘불교개설-부처님의 가르침, 불자의 실천’

‘불교개설-부처님의 가르침, 불자의 실천’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편 | 조계종출판사

은퇴하면 해보고 싶었던 공부 중 하나가 ‘불학’ 불교 공부였다. 부처님이 2566년 전 이 세상에 오셔서 세수 80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어떤 말씀을 남기고 가셨는지 한번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교사 은퇴 후 이러저러한 공익단체 내 역할이 마무리된 후 조계종 인천 승학산 수미정사에 개설된 경인불교대학 입문반에 등록했다. 입문반에 입학해 약 6개월 동안 공부하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불교에 대한 나의 한없는 ‘무식함’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석가모니는 요즘 말로 하면 ‘혁신가'요, '혁명가'였다

​해가 바뀔 때 올해가 불기로는 몇 년인지 한 번도 따져보지 않았다. 서기가 예수님 탄생한 해를 기준으로 하는 것처럼 불기도 당연히 부처님이 탄생한 해를 기준으로 삼는 줄 알았다. ‘숫따니빠따’ 등 불교 초기 경전을 읽다 보니 석가모니는 요즘 말로 하면 ‘혁신가'요, '혁명가'였다.

“인간의 고귀함은 사회와 사람들이 정한 신분 계급에 있지 않다. 브라만 가문에 태어났더라도 그가 하는 말, 행동이 고귀하지 않다면 그는 천한 사람이요, 낮은 신분의 사람일지라도 그의 말 행동이 고귀하다면 그가 곧 브라만이다.”

입문반에서 공부하다 보니 놀라운 일도 있었다.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발우공양 체험' 시간이었는데, 밥과 국과 반찬 등을 자신의 양에 맞춰 받아먹은 다음, 말로만 듣던 일부러 남긴 김치 또는 단무지 한 조각으로 발우를 깨끗하게 닦아낸 후, 물론 발우를 닦은 김치 또는 단무지도 먹고, 마지막으로 물로 발우를 씻어내는 순서로 수업이 진행됐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우리를 지도했던 스님이 씻어낸 물은 갓 정수기에서 받은 물처럼 투명하고 맑았다.

대한불교 조계종이 펴낸 '불교개설'서
대한불교 조계종이 펴낸 '불교개설'서

자비는 상대의 괴로움을 함께 하고 가능하면 없애주려는 마음

불교 공부를 하고 싶었던 진짜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치매 걸린 어머니 때문에 몹시 괴로웠다. 정확하게 말하면 치매에 걸린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대하는 나의 태도 때문에 괴로웠다.

손자의 똑같은 질문에는 아무리 여러 번 반복해도 끝까지 친절하게 대답하면서, 왜 어머니의 똑같은 질문에는 두 번 만에 짜증이 나는가. 마음은 원래 두 개인가. 그게 너무 괴로웠다. 결론부터 말하면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쾌도난마식의 비책은 불교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불교 공부는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입문 과정을 마치고 본 과정엔 등록하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각우(覺雨)'라는 법명도 받았다. 깨달은 비? 잘 모르겠다. 나옹화상의 제자 중 각우(覺牛) 스님은 있던데…. 수료증과 아울러 수계증, 행도 품계증, 신도증 등등도 받았다.

고작 6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절에 다닌 게 무슨 큰 공부가 됐겠냐만, 그래도 사찰이 이제는 낯선 곳만은 아니게 됐다는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본 과정에 등록하지 않는 대신 ‘불교개설’, ‘부처님의 생애’, ‘불교의 이해와 신행’, ‘무비 스님의 천수경’ 등 본 과정에서 공부하는 교재만 사서 읽었다. 본 과정 교재 중의 한 권이 ‘불교개설’이다.

불교는 어떠한 종교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을 잘 닦고 다스려서 행복과 평화를 얻으려는 마음의 종교”다. 불교는 철학자의 산물이 아니다.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도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소용이 없다. 자신을 다스려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라고 강조하는 게 불교다.

불교는 모든 것이 영원히 머무르지 않고 무상하게 시시각각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통찰하는 것이다. 불교는 자비와 연민의 종교다. ’자비‘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친구‘라는 말에서 왔다. 자비는 상대의 괴로움을 함께 하고 가능하면 그 괴로움을 없애주려는 마음이다.

괴로움은 탐욕과 증오에서 일어난다. 탐욕은 증오의 원인이다. 탐욕과 증오에서 해방되면 괴로움도 없어진다.

그래서 중도는 ’정도‘다. 바른 길이다.

불교는 가르친다.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고.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라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고 지혜에 의지하라고.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불교 개념 중의 하나가 ‘중도’다. 중도는 중간만 가라는 것인가? 중도란 물리적인 정중앙이 아니라 조화, 균형, 평등, 평정한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중도란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중도는 ’정도‘다. 바른 길이다.

사성제(四聖諦)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 등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가리킨다. 이 세계는 고통(苦)이며, 고통의 원인(集)은 욕망이며, 고통을 소멸(滅)하기 위한 길(道)을 통해 열반에 이르러야 한다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다.

열반에 이르는 길인 도제(道諦)에 여덟 가지의 수행 덕목이 있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이것이 바로 팔정도(八正道)다.

‘정견’은 바르게 보기, 즉 바른 견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치우침 없이 세상을 보는 것이다. ‘정사유’는 바른 생각이라는 뜻으로, 바른 마음가짐으로 이치에 맞게 생각하는 것이다. ‘정어’는 바른말로 ‘정사유’에서 비롯한 언어 실천이다. 즉 거짓말, 속이는 말, 이간질하는 말, 나쁜 말을 하지 않고 참되고 유익한 말을 하는 것이다.

‘정업’은 바른 행동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으며, 부정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정사유’를 실천하는 것이다. ‘정명’은 바른 생활이다. 일상생활에서 건전하게 생활하고 바른 생활 습관을 지니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생활하는 것을 가리킨다.

‘정정진’은 바른 노력으로 깨달음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정념’은 바른 의식으로, 항상 이상과 목표를 간직하고 이를 잃어버리지 않게 깨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정정’은 바른 명상으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것이다.

‘무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로 나를 말하는 것

불교에서 중요한 개념이 또 있는데 우리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무아’다. ‘무아’란 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무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로 나를 말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나는 파초요, 물거품이요, 아지랑이요, 번갯불이요, 저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을 합쳐 ‘십이처’라고 하는데, ‘육근(안이비설신의, 眼耳鼻舌身義)’은 인식의 주체요, ‘육경(색성향미촉법, 色聲香味觸法)’은 인식의 대상이다. ‘육근’과 ‘육경’, 그것의 ‘좋음’과 ‘나쁨’과 ‘평등’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가 끊임없이 작용해 번뇌가 생긴다. 12처×3×3=108, 그래서 ‘백팔번뇌’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육근은 없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 흘러갈 뿐이다. 육근의 실체가 없으니 당연히 육경의 실체도 없다. 그래서 번뇌도 없다.

불교의 ‘연기법’도 궁금하다. 쉽게 말하면,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소멸하는 게 연기법이다. ‘인’이 원인이라면 ‘연’은 조건과 관계이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는 것이다.

‘생, 로, 병, 사’의 괴로움을 ‘사고’라 한다. 여기에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오온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괴로움 등을 합쳐 모두 ’팔고‘라 한다.

‘오온’이란 색(色 물질, 몸), 수온(受 : 느낌), 상(想 : 상상하고 연상하는 것.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알아온 것들), 행(行 : 행위, 해왔던 것들). 식(識 : 식별하고 구별하고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인이 지켜야 할 기본 5계로는 불상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가 있다.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음이다, 그 깨달은 상태를 ‘열반’ 혹은 ‘해탈’이라고 한다. 해탈이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 탐욕(탐), 진(분노), 치(어리석음) 등 ‘삼독’이 제거된 상태다.

세속에서 이리저리 부대끼면서 닦는 도가 훨씬 더 의미 있다

극락은 어디인가? 자신을 비우고 지혜와 자비를 베푼다면 그리고 자신들이 사는 세계를 아름답고 괴로움이 없는 평화의 낙원으로 만들어 나간다면 그곳이 바로 극락이다.

유마거사께서 말씀하셨다. “화중생련종불괴(火中生蓮終不壞), 불속에서 연꽃을 피워야 끝내 시들지 않을 것이다.” 세속에서 이리저리 부대끼면서 닦는 도가 훨씬 더 의미 있다는 뜻이다. “처염상정(處染常淨), 더러움에 처해도 항상 깨끗함을 유지한다."와 비슷한 말이다.

아만(我慢)은 “이것이 나다”라는 생각에 빠져서 잘난 체하고 우쭐대면서 거만해져서 남을 업신여기고 교만하게 구는 태도를 말한다. 아만에도 세 가지가 있는데, 내가 남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아승만(我勝慢), 내가 남과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아등만(我等慢), 마음속으로는 교만하면서도 겉으로는 겸손한 체하는 아열만(我劣慢) 등이 있다. 아, ’아열만‘이라니, 부처님 말씀이 폐를 찌른다.

아무리 절에 열심히 다니고, 아무리 경전을 많이 읽어도 괴로움은 쉽게 소멸되지 않는다. 깨달음 또한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니다. 어불성설이요, 족탈불급이다. 가능하다면 괴로움을 줄이고 내 삶이 부처님 말씀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평소에, 꾸준히, 조금씩, 노력하는 게 중요할 것이다.

얘기를 앞으로 돌려서 다시 ‘불기’ 이야기로 가보면, 부처님의 생몰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기록이 없고 구술에 의존하던 시기였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불기는 불멸기, 즉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해를 말한다. 다시 말해 불기는 부처님 태어난 해가 아니라 부처님 돌아가신 해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불교 공부 후 나는 뭐가 달라졌나. 무엇을 깨달았나. 달라진 거 없다. 크게 깨달은 것도 없다. 내 태도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괴롭고, 여전히 교만하다. 그럼 불교 공부는 아무 소용이 없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누구나 죽는다는 건 깨달았다. 원효의 말씀으로 이 글을 마치자. ‘인간은 어차피 죽으니 멋대로 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달콤한 것을 먹여 사랑스럽게 보살펴도 / 우리 육신은 반드시 무너지고, / 비단으로 감싸 곱게 보호해도 / 목숨은 끝나게 되어 있다.”  원효 스님 ‘발심수행장’ 중에서

신현수 시인은 현재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서울문화재단 이사, 비영리민간단체 라오스방갈로초등학교를 돕는모임(방갈모)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원장(직무대행),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집행위원 등으로 일했다. 
신현수 시인은 현재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서울문화재단 이사, 비영리민간단체 라오스방갈로초등학교를 돕는모임(방갈모)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원장(직무대행),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집행위원 등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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