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책으로 세상 읽기 7.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 줬으면 그만이지’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 줬으면 그만이지’ | 김주완 | 도서출판 피플파워

작년 마지막 날과 새해 첫날, 한 지역방송이 2부작으로 내보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하나가 ‘매우 감동적’이라는 입소문을 탔다. <MBC 경남>이 방영한 <어른 김장하>였다.

유튜브로 ‘다시 보기’ 하던 많은 사람이 TV에서 다시 보고 싶다는 응원 글들을 올렸고, 열띤 호응에 힘입은 문화방송이 설 연휴 특집으로 재편성했다. 진정한 어른과 스승이 드문 우리 시대에 단비처럼 도착한 진주의 한 어른, 김장하 선생. 그리고 선생에 대한 뒤늦은 '발견'이었다.

이 책은 오랜 세월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경남도민일보> 출신 김주완 기자가 그와 직접 나눈 대화, 그리고 김장하 선생의 지인들을 만나 나눈 얘기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만든 ‘허락받지 못한 취재기’다

김장하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다. 졸업 후 농사를 짓고 있던 김장하에게 그의 할아버지는 당신 친구가 경영하던 한약방의 점원 일을 권했다. 김장하는 낮엔 한약방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밤엔 한약 관련 공부를 하던 중 우연히 신문에 난 한약업사 시험공고 기사를 봤다. 열심히 공부했고 합격했다. 약관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한약업사 합격은 그의 운명을 바꾼 일이었다. 그는 한약방을 개업했다. 결혼도 안 한 젊은 총각이 연 허름한 한약방은 1년쯤 지나자 ‘명의’로 소문났다. 높은 품질의 한약재로 약을 짓는데 값은 매우 저렴하니 어느 순간 손님이 확 늘었다.

한약방이 얼마나 잘 됐느냐 하면, 환자들이 번호표를 받고 한참을 기다려야 했는데,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이 한약방 근처 다방으로 갔다. 그러면 다방 종업원이 약방을 왔다 갔다 하면서 차례를 알려주는 식이었다.

심지어 다방 주변에는 기다리던 환자들을 상대로 채소 등을 파는 임시 장이 설 정도였다. 한약방 직원만 해도 20여명이나 됐다. 그의 약방은 직원 월급은 가장 많았고, 약값은 가장 싼 한약방이었다.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 줬으면 그만이지’ | 김주완 | 도서출판 피플파워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 줬으면 그만이지’ | 김주완 | 도서출판 피플파워

그동안 그가 살아오면서 세상에 베푼 선행을 따라가 보자. 그의 가장 큰 선행은 아마도 그가 세운 학교를 국가에 헌납한 일 텐데, 그는 자신이 설립한 명신고등학교를 1991년 국가에 헌납했다. 학교 이름은 4서 3경중 ‘대학’ 1장에 나오는 ‘명명덕신민(明明德新民)’에서 따왔다.

학생 저마다의 소질과 덕을 밝히고, 학생의 지식과 역량이 매일 매일 새롭게 발전할 수 있게 지도한다는 뜻이다.

당시 학교 땅과 건물의 시세만 백억원대에 달했는데 현재 가치로 280억원정도 된다고 한다. 학교를 헌납하면서 모든 교직원은 공립으로 특별채용 됐는데, 서무과장 단 한 명은 제외했다고 한다. 서무과장은 자신의 동생이었다.

그는 20대 젊은 시절부터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남몰래 장학금을 주었다. 지금까지 그의 장학금을 받은 사람이 무려 1000여명을 웃돈다고 한다. 그가 학생들에게 지급한 장학금은 무려 30~40억원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배우지 못한 게 가난 때문이었고, 그 억울함이 후대까지 이어져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번 돈은 세상의 병든 이들,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기에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필생의 사업이었던 남성한약방을 2022년에 접으면서 장학사업 등을 하던 남성문화재단도 함께 해산했다. 해산하고 남은 자산 30억여원도 국립 경상대에 기부했다.

그는 진주의 언론과 문화계, 환경운동, 여성운동 등도 후원했다. 그는 <진주신문>에 매년 1억원 정도의 적자를 메워주었고, 계간지 <한민족문학>의 발간 비용을 지원했다. 향토서점 ‘진주문고’도 그의 도움을 받았고, 전문예술법인 극단 ‘현장’, 예술공동체 ‘큰들’, 진주환경운동연합,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진주지부, 가정폭력피해 여성들의 단기 보호시설 ‘내일을 여는 집’ 등등도 후원했다.

그의 지원은 진주의 교육계뿐 아니라 사회·문화·역사·예술·여성·노동·인권 등 정치를 제외한 모든 영역에 걸쳐 있었다. 모든 감투를 외면한 그가 형평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이사장 등의 직책을 맡았다고 한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의 이런 나눔 정신은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 그의 성품과 철학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승용차가 없었다. 웬만한 거리는 걷거나 자전거를 탔고, 먼 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었던 명신고등학교에 갈 때도 버스나 자전거를 타고 갔다. 이사장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 학교는 전교조 사태 때 단 한 명의 해직교사도 나오지 않았다.

한약방의 소파와 차탁은 최소 35년이 넘었다. 부서지지 않아서 계속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맑은 정신으로 환자를 돌봐야 한다는 직업의식의 발로였다. 아무리 반가운 사람이 찾아와 점심을 먹더라도 약방 근무시간이 되면 딱 끊고 일어섰다.

그는 나라 밖을 나간 적도 없다. 아니 진주를 떠난 적이 거의 없다. 물론 약방 때문이다. 딱 한 번 약방을 비운 적이 있는데, 형님이 북한에 살아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통일 단체와 함께 4박 5일 평양에 다녀온 일이 유일하다.

또한, 사람들은 그가 화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화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자식들의 청첩장도 주위에 돌리지 않았다. 알음알음으로 온 하객들도 많았는데, 축의금 접수창구가 아예 없었다.

그는 사진을 잘 찍지도 않지만, 어쩌다 사진을 찍게 될 때도 가운데 자리에는 서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이만큼 베푼 사람은 많지만, 그이만큼 드러내지 않은 이는 없다.

그렇게 열심히 번 돈을 그는 왜 그렇게 아낌없이 기부하고 나누고 베풀었을까. 그렇게 세상과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 조금은 내세우고 싶었을 텐데 그는 어떻게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을까. 그의 대가 없는 나눔, 간섭 없는 지원은 어떤 철학에서 비롯됐을까. ​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무재칠시(無財七施)’를 설명한 적이 있다. ‘무재칠시’란 재물 없이 베푸는 7가지 보시라는 말이다.

좀 자세히 살펴보면, 화안시(和顔施) : 얼굴에 화색을 띠고 부드러운 얼굴로 남을 대하라. 언시(言施) : 사랑의 말, 칭찬의 말,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양보의 말, 부드러운 말 등 고운 말로 베풀라. 심시(心施) : 마음의 문을 열고 따뜻한 마음으로 남을 대하라. 안시(眼施) : 호의를 담은 눈으로 사람을 보라. 신시(身施) : 무의탁 노인을 돌보거나 짐을 들어 주는 등 몸으로 도우라. 좌시(座施) : 남에게 자리를 내주어 양보하라.​​ 찰시(察施) : 굳이 묻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알아서 도와주라 등이다.

가장 유명한 불경 중의 하나인 <금강경>에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말이 나온다, ‘상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라는 뜻이다. 즉, 내가 내 것을 누구에게 주었다는 생각조차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착한 일을 행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순간 나에게 자만심과 자긍심이 생겨나서 진정한 선행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른 김장하 선생은 <금강경>에 나오는 “무주상보시”를 현실에서 실천하려고 한 건 아닐까. 산이 내게 뭘 해주기를 바라면서 참 좋다고 칭찬하는 건 아닌 것처럼, 꽃이 내게 뭘 해주기를 바라면서 참 예쁘다고 칭찬하는 건 아닌 것처럼. ​"똥은 쌓아 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다.". 김장하 선생이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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