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장호영 기자|

인천투데이’는 ‘인천민주화운동센터’의 도움을 받아 이달의 민족‧민주‧노동열사를 소개합니다. 열사의 삶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이 앞으로 한국과 인천의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천에서 1970~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하다 운명한 열사는 89명에 달합니다. 매월 민족‧민주‧노동열사의 삶을 소개합니다.

▲이창훈 - 2014년 10월 20일 운명

이창훈 열사.
이창훈 열사.

1971년 충남 태안 안면도 출생으로 1995년 대우자동차에 입사해 2000년부터 사무노동직장발전위원회 대의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사무직의 척박한 노동 환경 개선과 권익 향상을 위해 2005년 사무노조 설립을 주도했으며, 이후 회사의 징계 탄압에 굴하지 않고 투쟁했다.

2011년 3대 사무지부장을 역임하면서 소통과 결단의 리더쉽으로 전국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와 1사1조직 통합을 이끌어 냈고, 조합원 4000명으로 구성된 사무직 노조를 완성했다.

2012년 사무직 최초로 3000여명이 16일간 파업으로 노동3권을 쟁취했고, 2013년에는 연봉제를 철폐하고 호봉제를 쟁취했다.

노조 일정을 마치고 새벽 귀가 중 교통사고를 당했고 투병 중 2014년 10월 20일 운명했다. 노조는 업무 수행 중 사고를 애석하게 여기고, 업적과 노고를 기려 노동조합장으로 장례를 치루고 마석모란공원 묘역에 안장했다.

▲강석태 -1988년 10월 22일 운명

강석태 열사.
강석태 열사.

1962년 9월 16일 출생으로 인천가톨릭 노동청년회(JOC) 회장으로 활동했다,

1985년 동흥전기에서 해고된 노동자였던 열사는 1987년 6월 인천지역의 노동단체, 청년단체, 사회단체가 모여서 6월 항쟁을 이끌어가는 조직이 만들어지고 6월 내내 동인천, 석바위, 부평 등 뜨거웠던 민주의 거리를 활보했다는 이유로 구속이 됐다가 6월 29일 이후 석방됐다.

해고 노동자로, 가톨릭 노동청년회의 투사로 동료들을 지원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다. 인천, 부천 지역의 성당마다 노동청년회 조직을 만들고 모임을 지도하기 위해 분주했던 열사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늘 밝았다.

1986년 말 부천에서 있었던 권인숙 성고문사건 지역대책위 활동, 1987년 박종철 고문사건 때 답동성당에서 상여를 메고 거리로 나섰던 일, 4월 사제단 단식, 5월 광주영령 추모집회, 6월 항쟁, 7월 노동자 대투쟁. 인천지역 노동자들의 가톨릭회관 점거농성 등 그해 봄부터 여름까지 숨 가쁘게 활동했다.

1988년 10월 22일, 심곡동 노동청년회의 모임을 지원하러 갔다가 교통사고로 운명했다.

▲최웅 - 1993년 10월 26일 운명

최웅 열사.
최웅 열사.

1964년 5월 1일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1983년 강릉고 졸업 후 서강대 물리학과를 입학했다. 동아리 ‘탈 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1986년 노동운동을 위해 인천으로 이전했다.

1987년 경동산업에 입사해 풍물패 활동과 디딤돌 소모임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열사의 활동을 주목하기 시작한 사측에 의해 1989년 봄에 해고됐다. 이후 1990년 초까지 인천지역해고자협의회 실무자로 근무하며 복직투쟁을 전개했다.

1990년 초 인천민중교육연구소와 1992년 인천민중연합 상담실 실무자로 근무했으며 전두환 정권 때부터 계속해온 병역징집 거부투쟁을 계속 수행했다. 이로 인해 노동조합 방문조차도 커다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어려운 지경에 놓였다.

열사는 생활비 마련을 위해 2년여 가까이 새벽에 아파트 자동차 세차를 했고 일주일에 3번 정도 중학생 과외지도를 하며 생활을 꾸렸다. 처가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식을 올리며 노동자의 삶을 결의하던 1993년 10월 26일, 신혼여행 중 불의의 조난사고로 운명했다.

▲하재승 - 2010년 10월 26일 운명

하재승 열사.
하재승 열사.

1953년 부산 출생으로 1999년 동양레미콘에 입사했다. 특수고용노동자로 살아온 레미콘노동자인 열사는 10여년동안 동양레미콘에서 일하면서 노조 깃발을 지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조합원과 비조합원 가릴 것 없이 전체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노심초사하며 지샌 밤이 수없이 많다.

동양레미콘 인천공장이 10년이 넘게 조합원에게 회유와 협박을 하며 노조 탈퇴를 강요하고 해고 등 노동자에게 상시적인 고용불안을 조장하면서 조합원과 비조합원간의 갈등을 조장했다.

열사는 이런 과정에서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됐다.

▲정해진 - 2007년 10월 27일 운명

정해진 열사.
정해진 열사.

1962년 인천 출생으로 1994년까지 한국전력공사 구리지점 관내에서 근무했다. 1994년부터 2007년까지 영진전업, 뉴서울전력, 창전, 상신 등 사업장에서 일했다. 2007년 영진전업 파업 현장에서 “파업 투쟁 정당하다” “단체협약 체결하라” 등을 요구하며 분신해 운명했다.
 

▲이재호 - 1989년 10월 29일 운명

이재호 열사.
이재호 열사.

1964년 5월 전북 부안출생으로 부안중학교 졸업 후 가정을 돕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표구 제작 계통 회사에서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고 1988년 액자 제조업체인 협신사에 입사했다.

노동조합 재건을 위해 동료들과 ‘등불회’를 결성해 활동하던 중 1989년 10월 29일 의문의 피살을 당해 운명했다.

1989년 10월 29일 0시 40분경 인천 주안4동에서 노조 관련 상담을 마치고 귀가하던 열사는 둔기에 턱을 맞고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단순 폭행치사 사건으로 종결하고자 했으나, 열사가 그동안 회사 측에 의해 파괴된 노조를 재건하기 위해 열성적으로 일하다 끊임없는 탄압과 협박을 받았기 때문에 동료 노동자와 가족은 경찰에 정확한 사인규명을 요구했다.

당시 협신사의 사장은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이 정한 최소한의 규정조차 지키지 않은 채 가혹한 노동을 강요해 노동자들이 1989년 2월 27일 노조를 결성하고 협상을 요구했으나 온갖 폭력을 동원해 노조 탄압을 일삼고 협상에는 응하지 않았다.

이후 사장의 폭력과 반인륜적 행위로 노조 간부들이 강제 사직과 부당해고를 당했고 노조도 파괴됐다. 열사와 노동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7월이 되면서 다시 노조 재건의 기치를 세웠고 회사측은 다시 탄압을 하는 상황이었다.

동료들은 사망 당시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열사의 면식범이나 계획적인 피살(살해는 아니라도 혼내려는)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으나 경찰은 범인을 밝히지 못하고 미제사건으로 종결 처리했다.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다시 조사를 벌여 2002년 9월 4일 결과를 발표했으나 공권력 개입 여부나 사망 경위를 밝히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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