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장호영 기자|

인천투데이’는 ‘인천민주화운동센터’의 도움을 받아 이달의 민족‧민주‧노동열사를 소개합니다. 열사의 삶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이 앞으로 한국과 인천의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천에서 1970~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하다 운명한 열사는 89명에 달합니다. 매월 민족‧민주‧노동열사의 삶을 소개합니다.

▲김성애 - 1987년 11월 3일 18세 운명

김성애 열사.
김성애 열사.

1986년 7월 24일 당시 인천 남구 신기촌 소재 도자기공장인 진흥요업에 입사했다. 같은해 9월 12일 진흥요업에서 작업 중 화공약품에 의식을 잃고 반신불수가 됐다. 1987년 11월 3일 산재 중앙병원에서 산재 없는 세상을 염원하며 투신해 운명했다.

해당 공장은 입사 초기부터 작업장 공기가 매우 혼탁했고 지독한 약품냄새 때문에 두통이 심했다.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9월 10일에는 갑자기 많은 양의 코피가 쏟아졌고, 9월 12일에는 두통이 매우 심했는데 점심 때 쯤 갑자기 의식을 잃고 기절해 뇌진탕으로 반신불수가 되는 등 극심한 장애에 시달렸다.

병원 측은 오염된 작업환경을 무시한 채 ‘선천성 빈혈’로 쓰러졌다고 진단했고, 회사 측은 보상은커녕 열사의 모친과 외숙을 불러놓고 고혈압으로 쓰러졌다며 사건을 은폐했다. 가족을 협박해 산재처리를 해줄 테니 추후 어떤 법적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강요한 뒤 도장을 찍게 했다.

1987년 3월 6일 중앙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으면서 호전되는 것에 희망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8월부터 벌어진 산재환자들의 투쟁을 보면서 자신의 모친과 외숙이 회사와 합의한 내용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무척 억울함을 느꼈다.

인천 산업재할원(중앙병원)에 입원 중이던 열사는 투병 중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진정하는 등 치료를 위해 애쓰다가 1987년 11월 3일 오후 4시 10분께 병원 7층에서 투신해 운명했다.

▲정봉기 - 2003년 11월 10일 33세 운명

정봉기 열사.
정봉기 열사.

1970년 5월 20일 출생으로 1997년 5월 (주)삼한강에 입사했고 2000년 노동조합을 결성에 참여했다.

인천에선 2000년이 되면서 아이엠에프(IMF) 시기 이후 구조 조정과 고통 강요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각성하면서 노동조합이 재조직되는 경우가 늘었다.

2월 삼한강과 3월 인천공항에너지 등을 시작으로 2002년까지 노조 40여개가 새로 결성됐다. 열사는 당시 민봉기와 함께 유령노조가 있던 회사에 노조를 결성해 승리할 때까지 투쟁을 전개했다.

40여명으로 시작한 노조가 사측의 회유와 탄압으로 2000년 6월 말경에는 4명 만이 남게 됐다. 그 중 한명은 투쟁과정에 몸이 손상돼 귀향했고, 6월 29일 정봉기와 민봉기 등 3명은 연안부두 남항 모래장에 위치한 회사 앞에 천막을 치고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3인이 하루 종일 진행하는 회사 앞 투쟁집회, 인천노동연구원 등의 지원과 연대집회, 상급단체의 해결촉구투쟁 등으로 9월 5일 노조는 승리해 노조사무실 등을 갖추고 현업에 복귀했다.

이후 열사는 노조 확대를 위한 장기 사업 등을 준비했으나, 2003년 11월 10일 18시께 작업현장에서 바다로 실족해 운명했다.

▲천덕명 - 2002년 11월 22일 38세 운명

천덕명 열사.
천덕명 열사.

1964년 경상남도 고성 출생으로 20살인 1984년 인천으로 상경해 합판 공장에서 근무했다. 1993년 경인운수(전 영화교통)에 입사해 입사 초부터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노조 회계감사를 역임하며 노조간부로 활동했고 특히 택시노동자들의 염원인 완전월급제 쟁취를 위한 민주택시연맹 인천본부의 65일간의 총파업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사측이 부당한 불성실근무 제재와 임의적인 성과급 감산, 개인택시 경력을 축소 조작하는가 하면서 징계위원회에 회부한 뒤 열사에게 참석을 통보했다.

이에 평소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지 않던 열사였지만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회사가 해도 너무한다” “회사를 가만히 두고 봐서는 안된다”며 분개했다.

결국 열사는 개인택시 수령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 측의 부당한 노동탄압에 맞서기 위해 새벽이던 0시30분께 회사 내 차고지에서 자신의 차량에 신나를 끼얹고 분신해 운명했다.

▲이덕인 - 1995년 11월 28일 28세 운명

이덕인 열사.
이덕인 열사.

1967년 12월 14일 전라남도 신안군 출생으로 동인천고등학교를 졸업했다. 4급 장애인이던 열사는 인천시가 휴식공간 목적으로 군사보호시설 지구였던 아암도의 철조망을 제거하자 1995년 7월 3일부터 전국노점상연합회 소속 장애인 22명, 빈민 20명과 함께 노점을 시작했다.

구청에서 수차례에 걸쳐 노점 철거를 지시하자, 철탑망루를 설치해 대항했다. 같은해 11월 24일 오전 7시 경찰과 철거용역회사 직원 등 1500여 명이 아암도 노점상을 철거하기 위해 난입하자 노점상인 30여명이 망루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전개했다.

경찰에 의해 외부와 단절되고 음식물 반입이 차단되자, 같은달 25일 오후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외부로 탈출하던 열사는 3일 뒤인 28일 오전 10시께 아암도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발견 당시 열사는 상의와 신발이 벗겨진 채 물속에 엎어져 있었으며 팔과 두 손목은 밧줄에 묶여져 있었다. 또한 시신의 얼굴과 뒷머리, 양쪽 어깨, 팔 등에는 상처와 피멍이 수두룩했고 눈을 부릅뜬 상태였다.

시신이 발견되자 경찰은 황급히 망루를 무력 철거했고, 농성자 전원을 인천 남부경찰서로 연행했다.

열사의 시신은 같은달 28일 오전 11시 50분께 유가족에 의해 세광병원으로 옮겨졌다. 이날 당시 남인천의원 원장이던 박용섭씨는 “얼굴과 팔, 상체 등에 상처와 피멍든 자국이 선명한 것으로 보아 구타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된다”고 소견을 말했다.

하지만, 경찰은 다음날 강제로 시신을 탈취한 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결과를 인용하며 ‘익사’라고 발표했다.

▲김형선 2006년 11월 30일 40세 운명

김형선 열사.
김형선 열사.

1966년 인천 출생으로 1989년 한양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교사가 됐다. 1997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인천지부 국공립중등지회 활동을 하며 소식지 ‘처음처럼’ 창간호 발행에 참여했다.

1998년 전교조 인천지부 ‘인천교사신문’ 창간준비호 발행에 참여했고 2002년에는 ‘인천교사신문’ 편집실장을 맡았다. 2005~2006년 전교조 인천지부 중등남부지회 사무국장을 역임하던 중 2006년 11월 30일 교통사고로 운명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