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장호영 기자|

‘인천투데이’는 ‘인천민주화운동센터’의 도움을 받아 이달의 민족‧민주‧노동열사를 소개합니다. 열사의 삶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이 앞으로 한국과 인천의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천에서 1970~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하다 운명한 열사는 89명에 달합니다. 매월 초 민족‧민주‧노동열사의 삶을 소개하고 열사의 삶을 기억하는 이의 목소리도 담습니다.

▲ 조금분 - 2019년 7월 1일 64세 운명

조금분 열사.
조금분 열사.

1955년 4월 인천 부평에서 태어났다. 1967년 북인천 여자중학교를 중퇴한 뒤 바로 부평공단에서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1974년 4월 15일 반도상사 노동조합을 결성했으며 1978년에는 반다상사 신용협동조합 설립에 기여했다. 1980년 반도상사 노조 지부장을 맡은 후 전두환 군사정권의 정화사업에 의한 조치로 집단해고됐다.

1982년 부평 산곡동 골목다방을 운영했는데, 골목다방은 민주노조 결성을 위한 교육과 만남의 장소로 활용됐다. 1983년 반도상사 해고 노동자들의 퇴직금을 모아 계양구 효성동에 노동센터 ‘골목집’을 운영했다.

1985년 효성동 골목자금과 주위 지원금으로 공간을 구입해 주안에 노동자 쉼터 ‘골목길’을 운영하면서 천주교 인천교구 노동사목위원회 활동을 시작했다.

1986년에는 맞벌이 노동자를 위한 ‘골목어린이집’을 설립하고 1987년 노동상담소 ‘내일을 위한 집’을 개소하면서 주안 5‧6공단의 민주노조 건립을 위한 선두적인 연대사업과 지원사업을 전개했다.

1988년 주안 산동네 세입자 철거민 대책위원회와 함께 하며 살인 철거 반대와 주거권 쟁취 투쟁 지원 연대사업을 했다. 1994년 전국노동사목협의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2017년 9월 충남 당진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뒤 투병생활을 시작했고 2019년 7월 1일 오후 3시 병원에서 운명했다.

▲송철순 - 1988년 7월 17일 25세 운명

송철순 열사.
송철순 열사.

1963년 7월 13일 강원 화천군에서 출생했다. 1982년 인천 신명여고를 졸업하고 판매사 자격을 취득했다. 1987년 1월 세창물산에 입사했다.

1988년 6월 29일 노동조합 창립과 함께 사무장으로 선출됐다. 같은해 7월 15일 파업기금 마련 연대집회 준비로 공장 지붕 위에 현수막을 설치하던 중 추락해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이틀 뒤인 17일 오후 9시 45분께 운명했다.

1988년 6월 28일부터 노조는 임금 인상과 어용 노사협의회 타도를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 그런데 사측은 휴업조치를 단행했다.

당시 노조 사무장이던 열사는 열악한 근로조건 개선과 파업기금 마련을 위한 연대집회를 준비하던 중, 허술한 슬레이트 지붕 위에 현수막을 설치하기 위해 작업을 하다 지붕이 내려앉으면서 공장바닥으로 떨어졌다.

동료와 다른 회사 노조원들의 안타까움과 분노 속에 17일 생을 마감했다. 다음날 세창물산 건물 벽에는 열사가 걸어놓은 ‘사장 놈이 배짱이면 노동자는 깡다귀다’라는 현수막과 채 걸지 못한 현수막 ‘노동자의 서러움 투쟁으로 끝내자’가 매달려 있었다.

▲정성희 - 1982년 7월 23일 21세 운명

정성희 열사.
정성희 열사.

1962년 1월 인천에서 출생했다. 1981년 연세대학교 영독불계열 학과에 입학했고 같은해 11월 25일 시위 관련으로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3일 뒤인 28일 군대로 강제 징집됐다.

훈련을 마치고 1982년 1월 4일 자대 배치를 받은 뒤 학원 소요 관련자로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다. 같은해 7월 23일 의문의 죽음을 당해 운명했다.

열사는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대학입시 준비에 바빴던 시간에도 틈틈이 많은 문학작품과 철학책을 읽고 시국, 민주화, 언론 등에 관심이 많았다. 연세대 영독불계열 학과에 입학한 열사는 일차 문무대 훈련(군사 훈련) 당시 시위를 선동하고 노래를 선창했다는 이유로 문교부 리스트에 기록돼 연행된 후 강제징집됐다.

1982년 7월 23일 의문의 죽음을 당하며 전두환 정권시절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으로 인한 첫 번째 희생자가 됐다. 녹화사업은 ‘강제로 징집한 학생들을 좌익으로 규정하고 붉은 색깔 의식을 푸르게 한다’는 취지로 추진한 사업이다. 이로 인한 피해자가 1200여명(의문사 9명 포함)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열사의 죽음 후 가족들이 부대에 방문했으나 군 당국은 사고현장이 최전방 민간인 통제구역인 이유로 현지답사는 불가능하다며 간단한 도면 설명으로 자살임을 믿어 달라고 간청했다.

군 당국은 부모로부터 부검포기서와 화장동의서, 사망사인에 이의 없고 이후 법적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 등을 받았다.

군 당국 발표를 보면, 열사의 유서는 없었고 ‘또 백양로를 걸어보고 싶다’ ‘죽음 앞에서 내가 이렇게 담담하다니’ ‘윤희(동생)야, 네가 배운 지식을 가난하고 병들고 눌린 자들을 위해 활용해라’는 낙서 쪽지만 있다고 했다.

▲김근수‧이병덕‧김태흥‧조현길‧박정관‧이남규‧이병화 - 1994년 7월 26일 운명

1994년 7월 26일 오전 9시 30분께 인천 주안5공단(서구 가좌3동 543-6번지)에 위치한 진흥정밀화학(주)에서 폭발로 인한 화재가 발생해 노동자 7명이 사망하고 5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폭발사고 현장은 콘크리트 밑에 깔려 비명을 지르는 사람, 양팔이 잘린 채 죽어가는 사람, 열폭풍에 얼굴가죽이 벗겨져 피투성이가 된 사람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사건 다음달 7일 ‘진흥정밀화학 산업재해 노동자장’에는 사망자가 7명이지만 관은 8개가 나갔다. 시신을 찾기 위해 사고현장을 뒤졌던 유족들이 온전한 시신은 찾지 못하고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는 시신 조각들을 수습해 관 하나를 더 만든 것이다.

언론은 처음에 변압기 폭발로, 다음에는 건조기 폭발사고라고 발표했으나 경찰의 조사결과 진흥정밀화학 측이 주의사항을 어기고 작업을 하게 지시하면서 약품이 자체 폭발한 인재로 나타났다. 민주노조 활동 중이던 7명은 폭발 사고로 운명했다.

[열사를 기억하다] 열정적이고 카리스마 넘친 금분 누나

한상욱 전 천주교 인천교구 노동사목위원회 부위원장

한상욱 전 부위원장은 1987년 부평노동사목에서 먼저 활동하고 있던 선배로 열사를 처음 만났다. 평생 노동사목 활동과 민주노조 운동, 노동자를 위한 삶을 산 열사는 매우 열정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선배였다.

매우 강한 카리스마 때문인지 노동사목에 들어왔던 후배들이 오랜 기간을 버티기 어려워할 정도였다고 한 부위원장은 기억했다.

주안공단 쪽에 노동상담소인 ‘내일을 위한 집’을 운영하며 많은 노동자를 만나고 민주노조 지원활동을 했는데, 당시 주안공단에서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골목집을 방문해야할 정도였다고 했다.

또한 노동자 뿐 아니라 가족을 위한 어린이집(당시 탁아소)을 설립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노동자들의 공동체를 만들고 폐식용유를 이용한 재활용 비누 공장을 만들었던 일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한 전 부위원장은 “주안공단에 내일을 위한 집이 있었기에 많은 공장에 민주노조가 생길 수 있었다”며 “열정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금분 누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열사 관련 정보와 사진은 인천민주화운동센터가 제공했습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