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장호영 기자|

인천투데이’는 ‘인천민주화운동센터’의 도움을 받아 이달의 민족‧민주‧노동열사를 소개합니다. 열사의 삶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이 앞으로 한국과 인천의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천에서 1970~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하다 운명한 열사는 89명에 달합니다. 매월 초 민족‧민주‧노동열사의 삶을 소개합니다. 

▲ 이대용‧유인식‧김현욱‧박용선(사진없음) - 1987년 8월 1일 운명

이대용, 유인식, 김현욱 열사.
이대용, 유인식, 김현욱 열사.

인천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던 열사 4명은 1987년 8월 1일 한국기독노동자 인천지역연맹에서 진행한 ‘인천지역노동자 여름수련회’에 참석했다가 물에 빠진 동료를 함께 구하다 운명했다.

이대용 열사는 1963년 4월 전라북도 고창 출생으로 1977년 인천 서구 석남동 소재 선학알미늄에 입사하고 야간중학교를 다녔다.

1982년 강제징집된 후 군 생활을 하면서도 노동자로서 신념과 강한 의지를 다졌으며 공부하고 실천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제대 후 1986년 초 진흥요업에 취업해 착취와 비인간적인 대우에 반대하며 투쟁을 주도했고 이후 동양튜브, 선창상업에 입사해 투쟁을 벌였다. 1987년 8월 24세 나이로 운명했다.

유인식 열사는 1963년 7월 인천 출생으로 1982년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학내 서클에 가입해 고교시설부터 생각했던 민주화의 대열에 앞장섰다.

1985년 구로공단 내 금속공장에 들어갔으나 몇 개월 만에 대학생 신분이 드러나 공장을 나와야했다. 1986년 9월부터 인천대학교에 앞에서 사회과학 전문서점 ‘밀물’을 운영했다. 1986년 7월 말 샘터교회에 첫발을 내딛고 1987년 5월 샘터교회 청년회를 만들었다. 한국기독노동자 인천지역연맹 대표자회의 성원으로 6월 항쟁 투쟁에 적극 참여했다. 1987년 8월 24세 나이로 운명했다.

김현욱 열사는 1966년 3월 인천 출생으로 1985년 운봉고등학교 졸업 후 진흥요업에서 근무했다. 공장생활을 하며 지긋지긋한 노동조건과 기계 같은 생활의 반복 속에서 큰 고민 끝에 ‘이것은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사회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던 중 1986년 가톨릭 노동사목회에서 주최하는 자기발견 교육에 참여하면서 노동운동에 적극 나서게 됐다. 같은 해 임금인상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해군 방위병으로 입대했다.

군복무 휴가기간을 맞이해 수련회에 참여했다가 1987년 8월 21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박용선 열사는 1967년 10월 강원도 홍천 출생으로 1983년 동인천중학교를 졸업하고 9185년 한국릴레이에서 근무했다. 1987년 친구를 따라 백마교회 문화잔치 프로그램에 참석하며 사회와 노동자의 현실을 깨달았다.

1987년 6월 항쟁 때 거리투쟁에 참여하면서 더 깊은 고민을 했고, 어머니의 병환과 다가오는 군 입대 문제에도 친구들과 함께하기 위해 수련회에 참여했다가 1987년 8월 20세 나이로 운명했다.

▲ 최동 1990년 8월 7일 30세 운명

최동 열사.
최동 열사.

최동 열사는 1960년 8월 서울 출생으로 1980년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해 대표적인 이념서클 중 하나였던 ‘동양사상연구회’에 가입해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1983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학내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됐고 1984년 2월 석방됐다.

출소 후 복학을 반대하고 노동현장에 투신하기로 결심했고 1984년 경기도 부천 삼창정밀과 동광정밀 등에서 프레스공으로 일했다. (주)세일과 극동금속 등에서 근무하며 부천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1989년 2월 검찰이 인천부천노동자회(인노회) 관계자 6명을 이적단체구성죄를 적용해 구속했는데, 이 사건으로 1989년 4월 부천 심곡동 자취방 앞에서 치안본부 대공 3계 요원들에 의해 연행‧구속됐다.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며 자신을 자해하는 등 죽음을 각오한 투쟁을 벌였고 수감 중 구치소 의무과에서 지급한 신경안정제를 복용한 이후 발작과 실어증세가 나타났다.

9월 18일 집행유예로 출소했으나 극도의 심리적 불안상태가 계속돼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이후 종로 신경정신과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다. 2개월 뒤인 8월 7일 한양대에서 ‘미제와 적들의 탄압을 고발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해 오후 10시 30세 나이로 운명했다.

김주리 1993년 8월 8일 29세 운명

김주리 열사.
김주리 열사.

1964년 2월 전라남도 목포 출생으로 1982년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현실의 모순을 알게 됐고 졸업 후 출판사에서 일하다 노동자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고 미싱일을 배워 취업했다.

1989년 우진상사와 진영물상에 입사했다. 1992년 부평공단과 주변 봉제공장에서 노동조합 결성을 위해 활동하다 해고당한 노동자들과 ‘미모사’를 설립했다. ‘미모사’는 해고노동자들의 생계를 해결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는 공장을 이루기 위한 생산 공동체였다.

1993년 7월 미모사 근무 중 화상을 입고 한강성심병원에 입원한 뒤 32일 간의 투병생활 끝에 8월 8일 29세 나이로 운명했다.

▲ 박광남 1996년 8월 13일 23세 운명)

박광남 열사.
박광남 열사.

1973년 11월 전라남도 신안 출생으로 인천지역 기독노동자연맹 회원이자 새벽교회의 교인이었다.

장애가 있음에도 구김없는 활발한 모습으로 활동하던 중 고향에서 불의의 물 사고로 23세 나이로 운명했다.

 

▲ 김상열 2006년 8월 21일 48세 운명

김상열 열사.
김상열 열사.

1962년 4월 인천 동구 송림동 출생으로 1981년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5년 인천기독교청년회 활동을 시작했고 같은 해 부평공단 인성전자에 입사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파업에 참여해 투쟁의 승리를 쟁취했다. 1988년 분사한 인우데코레코 노동자들의 104일 간 투쟁을 주변 대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지원했다.

한양공영에 입사해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노동조합 조직쟁의부장과 사무국장을 맡았다. IMF 이후 정리해고 반대와 고용안정 보장을 위한 투쟁을 하다 구속과 해고를 당했다. 회사 정리 후 경제적 어려움과 정신적 스트레스로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2년 간 투병생활을 하다 2006년 8월 21일 48세 나이로 운명했다.

▲ 김종근(사진없음) 2012년 8월 운명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 인천건설기계지부 지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2012년 8월 운명했다.

*열사 관련 정보와 사진은 인천민주화운동센터가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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