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장호영 기자|

‘인천투데이’는 ‘인천민주화운동센터’의 도움을 받아 이달의 민족‧민주‧노동열사를 소개합니다. 열사의 삶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이 앞으로 한국과 인천의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천에서 1970~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하다 운명한 열사는 89명에 달합니다. 매월 초 민족‧민주‧노동열사의 삶을 소개하고 열사의 삶을 기억하는 이의 목소리도 담습니다.

▲김기욱 - 2002년 4월 2일 40세 운명

김기욱.
김기욱.

1963년 출생해 1987년 6월 대우종합기계(전 대우중공업)에 입사하고 당시 노동자 대투쟁을 경험하면서 노동조합 간부로 열성적인 활동을 했다. 노동문화운동이 노조운동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된 영역이길 바라던 인천 노동문화일꾼들의 노력으로 인천 노동자 연대체계를 함께 만들었다.

인천지역 금속노동자 노래패 연합 ‘철의 노동자’ 초대회장을 역임하는 등 지역 문화활동을 했다. 노동문화운동이 국내 모범이 되기도 했으나 업무가 늘 과중돼있었고 간암 말기 판정으로 2년간 투별생활을 하다 2002년 4월 2일 오후 11시께 운명했다.

▲최완용(사진 없음) - 1989년 4월 9일 25세 운명

1964년 11월 충청남도 천원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세에 부모와 어린 동생에 “도시에 나가 열심히 일해 부모님을 모시고 살 수 있는 그날까지 고생이 되더라도 참고 견디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인천에 왔다.

1983년 공장생활을 시작했다. 1989년 3월 1일 휴일임에도 출근했는데 안전장치 없는 프레스 기계에서 작업하다 오른 손이 잘렸다. 중앙병원 산업재활원에서 재활기술을 배우기 희망했으나 회사와 병원의 거부로 이루지 못했다.

1989년 4월 9일 “죽으면 중앙병원 영안실에 안치해달라. 죽어서도 산재노동자들과 함께 하겠다”는 취지의 유서를 남기고 부평구 원적산에서 분신해 운명했다.

▲강희철 - 2003년 4월 13일 41세 운명

강희철.
강희철.

1962년 12월 인천 출생으로 1989년 인천민주청년회 노동분과 활동을 했고 인천민주노동청년회 조직국장을 역임했다. 1993년 통일을 여는 민주노동자회 조직위원장과 노동자 통일대 ‘백두’ 활동을 했고, 1996년 인천평화복지연대 전신인 평화와참여로가는시민문화센터 사무처장과 1998년 평화와참여로가는인천연대 본부장을 맡았다.

1999년 민주주의민족통일 인천연합 조직위원, 2000~2002년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 조직위원장을 했고, 2003년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정치위원장을 맡아 활동 중 뇌출혈로 입원해 투병 중 4월 13일 운명했다.

평생을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길을 걸었으며, 청년‧노동‧문화예술‧매체운동 등 다방면의 활동을 했다. 전국연합 중앙집행위원회 회의 중 뇌출혈로 입원 후 함께 한 많은 동지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41세에 세상을 떠났다.

▲김용관 - 2003년 4월 23일 49세 운명

김용관.
김용관.

1954년 6월 인천에서 태어나 1977년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를 졸업했다. 1982년 인천 광성고등학교 수학교사로 임영된 후 1985년 인천‧경기교사협의회 창립활동을 했고 광성고교 교사협의회 창립을 주도했다.

1989~1992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인천지부 사립지회 광성고교 대표자 활동을 했고 1999년 전교조 인천지부 초대 사립지회장을 맡았다. 2001~2002년 광성고교 학교운영위원을 했고 2002년 10월 담도암 판정 후 수술했으나 2003년 병세가 악화하면서 4월 23일 운명했다.

민주적인 학교 인사제도 정착을 위한 학교인사위원회 설립, 교사협의회 창설, 학교운영위 참여, 탈춤반과 장기반 창설, 레크리에이션 보급 등 다양한 활동으로 교육 현장에서 참교육 실천에 매진해 선‧후배 교사들의 귀감이 됐다.

▲김병상 - 2020년 4월 25일 88세 운명

김병상.
김병상.

1932년 충청남도 공주 요골공소에서 태어나 1961년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 서울가톨릭신학대에 입학했다. 1963년 사제로 서품을 받고 경기도 김포와 인천 답동‧주안1동‧만수1동‧부평1동 성당 주임신부를 지냈다.

1977년 유신헌법 철폐 기도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는 고초를 겪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창립회원이었고, 인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대책위원장을 맡아 노동자를 위해 활동했다. 1989~1995년 정의구현사제단 공동대표를 지냈고 인천 양심적인 지식인 40여명과 ‘목요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했다. 1995년 굴업도핵폐기물처리장반대 대책위원회 상임대표도 맡았다.

실업극복국민운동 인천본부 상임대표와 인천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는 등 사회운동을 계속했고, 2004년 학교법인 인천가톨릭학원 이사장 대리로 활동하다가 2006년 11월 사목 일선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도 2008~2013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맡기도 했으며, 2018년 3월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요양시설에 머물다 2020년 4월 25일 선종했다.

[열사를 기억하다] 치열한 혁명가 강희철을 따라 배운다

강주수 인천평화복지연대 상임대표

강희철 열사의 묘소.
강희철 열사의 묘소.

강희철 열사는 인천평화복지연대의 전신인 평화와참여로가는인천연대를 만들 때 많은 역할을 했다. 강주수 인천평화복지연대 상임대표는 “본부장으로 조직과 사업 등 많은 업무를 총괄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또한, 매순간 치열하게 살고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혁명가였다고 전했다. 낮은 곳을 향해 흐르는 강물처럼 어떤 때는 폭포가 돼 뛰어 내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바위를 만나 굽이굽이 돌아서 앞으로 나가는 치열한 물처럼 산 친구라고 회상했다.

강 대표는 “동갑인데 살아 있었다면 올해가 같이 회갑”이라며 “함께 활동했던 동갑 친구들이 회갑기념으로 제주도 여행을 계획 중인데, 아마 뒤풀이 시간에 강희철과 함께 했던 추억에 관한 이야기도 나눌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올해는 쓰러진지 19년째가 되는 해이다. 이제 우리가 강희철의 정신을 이어받아 ‘해불양수’의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며 “활동가에게 끝없이 치열함을 강조하고, 대중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바다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이 강희철을 기억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열사 관련 정보와 사진은 인천민주화운동센터가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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