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장호영 기자|

인천투데이는 ‘인천민주화운동센터’의 도움을 받아 이달의 민족‧민주‧노동열사를 소개합니다. 열사의 삶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이 앞으로 한국과 인천의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천에서 1970~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하다 운명한 열사는 89명에 달합니다. 매월 초 민족‧민주‧노동열사의 삶을 소개하고 열사의 삶을 기억하는 이의 목소리도 담습니다.

▲최영준(사진 없음) - 1994년 3월 2일 20세 운명

1974년 5월 강원도 태백의 광산노동자 아들로 태어났다. 1993년 2월 인천 부평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고등학생 때 KSCM(한국고등학생기독운동단체) 활동을 했다. 같은 해 2월 인천민주노동청년회 3기 청년강좌를 수료했다.

같은 해 4월 인천 소재 기업 ‘파란들’에 입사했고 인천민주노동청년회 활동 중 간염으로 같은 해 5월 해고됐다. 1994년 3월 2일 대구에서 요양 치료를 받던 중 교통사고로 운명했다.

▲유순조 - 2002년 3월 8일 52세 운명

1950년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10대에 노동을 시작해 20대에 참담한 노동현실에 눈을 뜨고 많은 노동현장을 전진했다. 1984년 인천 소재 이천전기에 입사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 참여했다가 투옥됐다.

3차에 걸친 해고를 투쟁으로 무력화 시켰다. 1998년 금융위기 때 정리해고를 반대하고 생존권을 지키려다 다시 투옥됐다. 이천전기 해고 후 인천지역해고자협의회 활동했다. 암 발병으로 투병하다 2002년 3월 8일 운명했다.

▲박영상 - 1997년 3월 9일 37세 운명

1960년 1월 강원도 춘천 출생으로 1979년 강원대학교 역사교육과 입학 후 1980년 민중문화연구회에 가입해 민주화운동을 했다. 1984년 춘천 교동교회 청년회장을 맡아 독재정권에 저항했고 1985년 복학 후 학회장과 기독 학생운동을 하며 학내민주화운동에 기여했다.

1987년 졸업 후 1988년 3월 인천 부흥중학교로 발령이 인천교사협의회 활동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에 참여했다. 1992년 전교조 인천지부 국공립중등지회장으로 해직교사 원직 복직에 앞장섰다가 1993년 2월 해직됐다. 재판에서 승소 후 같은 해 6월 복직했고, 1996년 3월 9일 부평공업고등학교에서 근무하던 때 갑자기 운명했다.

▲김장수 - 1988년 3월 9일 31세 운명

1957년 9월 충청남도 서산 출생으로 1975년 2월 인천 향도고등학교 중퇴 후 극동운수·조준택시·안성화물·유성화물 등에서 근무했다. 1985년 9월 경기교통에 입사한 뒤 1987년 6월 인천 경기교통노조 조합장 활동 중 해고됐다.

1987년 8월 파업투쟁으로 해고를 철회시켰으나 다음해 2월에 해고예고를 통보받고 부당해고에 항의해 단식농성 중 3월 1일 분신했다. 병원 치료 중 8일 만에 운명했다. 김장수 열사의 운명 후 계속된 탄압에도 빈소를 지켰던 동료들과 유가족의 힘으로 끝내 회사가 노조의 요구사항을 수용했다.

▲신현기 - 2006년 3월 14일 49세 운명

1957년 3월 경기도 수원 출생으로 고아원에서 생활하다 11세에 입양됐고, 19세가 돼 입양된 집에서 출가했다. 2002년 3월 인천 남동구 만수향촌으로 이주 후 ‘청솔의 집’에서 근무하며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봉사활동을 했다.

2006년 3월 인천시와 남동구, 주택공사가 환경개선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용역깡패 300명을 동원해 향촌세입자들의 집을 무차별 철거했다. 강제철거 부당성에 항의하는 투쟁을 벌이던 중 2006년 3월 14일 친구집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며 운명했다.

당시 타살 의혹이 확산되자,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부검을 의뢰했는데, 부검 후 공권력이 영안실의 시신을 탈취해 부평공동묘지(현 인천가족공원)에 강제 매장하는 행위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인천시민사회단체는 대책위원회를 결성해 투쟁했고, 2007년 5월 31일 향촌 민중장을 거행해 고인의 영혼을 위로했다.

▲이문식 - 2004년 3월 23일 40세 운명

1964년 1월 전라남도 강진 출생으로 초등학교 졸업 후 강진에 있는 목공소에서 노동을 시작했다. 16세에 서울로 상경해 천호동 소재 목공소에서 일했고 20세 전후에 인천에 터를 잡아 용접공으로 남동공단에서 일했다.

남동공단의 작은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을 창립하고 위원장을 맡기도 했고, 민중당 인천시당 청년노동분과위원장을 역임했다. 1990년 7월 주안6공단 소재 한양공영에 용접공으로 입사한 후 노조 교선부장, 풍물패장, 문화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2000년 정리해고에 맞서 마지막까지 투쟁했다.

공장 폐업 후 남동공단 사업장 등에서 일하던 중 2004년 3월 23일 산업재해사고로 운명했다.

▲김미영 - 2007년 3월 26일 38세 운명

1969년 10월 출생으로 1988년 인천 문성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미추홀구 소재 삼기전자에 입사했다. 1990년 노동조합 결성 후 1992년과 1993년 노조 위원장을 역임했다.

1999년부터 전국여성노동조합 인천지부 조직부장과 사무국장, 부지부장을 맡아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조직화와 권리 확대를 위해 활동했다. 여성노조 사무국장으로 조합원의 근황과 고충처리에도 앞장섰으며, 청소 분회의 근로조건 개선 교섭 투쟁에선 뛰어난 선동력과 지도력을 발휘했다.

2007년 3월 26일 노조 활동 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운명했다. 마지막까지 비정규직 철폐와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열사를 기억하다] “사람을 너무 좋아한 영상이형”

임병구 인천 석남중학교 교장

박영상 열사의 묘역에 있는 추모글.(사진제공 인천민주화운동센터)
박영상 열사의 묘역에 있는 추모글.(사진제공 인천민주화운동센터)

당시 전교조 활동을 함께 했던 임병구 인천 석남중학교 교장은 박영상 열사를 ‘사람을 너무 좋아한 형’으로 기억했다.

임 교장은 형이 세상을 떠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술자리에서 나눴던 대화들이 기억난다고 했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술자리에서 만나면 학교에서 있던 일을 다정하게 이야기해주는 선배였다. 자신이 근무하던 학교 교사들과도 항상 가깝게 어울리는 모습도 많이 봤다.

임 교장은 “형이 세상을 떠난 뒤 3월 첫 주말에는 전교조 활동 교사들과 춘천의 묘소를 방문해 추모행사를 했었는데, 묘소를 옮기면서 못하게 된 지가 오래돼 죄송한 마음”이라며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서, 우리가 형의 뜻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자꾸 되돌아보게 한다”고 말했다.

*열사 관련 정보와 사진은 인천민주화운동센터가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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