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은 풍신수길 관련 명칭이나... 일본인 복숭아 과수원 실존
1906년 주권 찬탈중인 시기 명명... 일제식 표현 비판은 지속

인천투데이=이형우 기자 l 인천 중구 도원동에 위치한 도로명 주소 ‘도산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을 기리는 표현이라는 지적이 나왔으나 오해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일제 잔재라는 비판은 지속될 전망이다.

2014년 행정안전부는 대대적으로 주소 표기를 도로명주소로 변경했다. 인천시와 군·구 지명위원회가 도로명을 논의해 결정했다.

이때 중구 도원동 소재 도산로가 일제식 표현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도산(桃山)정이란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다.

특히 풍신수길과 관련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풍신수길이 일본을 통치한 시기를 도산(모모야마)시대라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풍신수길과 관련한 것은 아니라는 반박이 나왔다. 실제 기록을 보면 이 지역은 1906년부터 복숭아 과수원이 있다는 이유로 도산리로 불렀고 일제가 그대로 도산정으로 바꾼 것으로 나타났다.

1946년 인천시 지명위원회는 일제식 표현을 청산하기 위해 도산정을 도원동으로 변경했다. 풍신수길과 관련된 건 아니지만 굳이 일제가 사용한 도산이란 표현을 도로명 주소에 부활시켰는지는 의문이다.

인천 중구 도원동에 위치한 도산로
인천 중구 도원동에 위치한 도산로

도산시대란 풍신수길(도요토미히데요시)이 일본을 통일하고 통치한 시대 이름이다. 풍신수길이 거주한 복견(후시미)성의 별명인 도산성에서 유래했다. 복견성은 복숭아 나무가 많아 도산성이라 불렀다.

1914년 일제는 인천 중구 도원동 일대를 도산정이라 명명했다. 도산정이라 명명한 이유는 일제가 자신들의 위인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인천에 남아있는 대표적 일제 지명은 ‘송도’다. ‘송도’라는 지명은 일본제국주의 군함에서 비롯했다. ‘송도’는 일본 3대 절경 중 하나인 미야기현(宮城縣) 마츠시마(松島)를 뜻한다. 일본은 이 3대 절경을 기리는 뜻에서 군함 ‘삼경함(三景艦)’을 취역시켰다.

이중 송도함 즉, 마츠시마함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참전했다. 일제는 군함 송도(松島)함의 이름을 따 인천과 부산, 의정부 지명에 사용했다. 송도함은 조선에서 치러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참전해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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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일제는 자신들이 기념할 만한 것들을 지명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도산정이란 이름도 의심할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여러 기록들을 본 결과 도산정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인근 복숭아 과수원 때문에 지은 도산리에서 따온 것으로 밝혀졌다.

대한제국 시기 도원동 일대는 일제가 군사작전 요충지라 여겨 일본군이 주둔했다. 이후 전염병 격리수용소인 피병원(덕생원)과 화장터가 들어오면서 사람이 살기 어려운 동네가 됐다. 신태범 박사는 ‘인천한세기’에서 이 지역을 음산하다고 표현했다.

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이 번역한 ‘인천개항25년사(1908)'을 보면 일본인 중야(나카노)가 1891년 복숭아나무를 심었고 봄마다 복사꽃이 만발했다고 기록했다. 그의 공로가 인정돼 1906년 새로 마을을 만들 때 마을 이름을 도산리라고 불렀다.

또 ‘인천부사(1933)'를 보면 중야가 복숭아 과수원을 개척하고 난 뒤 지역 주민들이 산책할 수 있는 휴양지가 됐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다만, 풍신수길을 기리는 표현이라는 오해는 풀렸지만 일제식 표현이라는 비판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도원동은 조선시대 인천부 다소면 장천리와 독각리의 일부였다. 도산리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지명 이름이 아니다. 

1906년은 대한제국이 이름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을사조약 등 주권을 박탈당하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마을 이름을 도산리라고 정한 것을 대한제국이 주도적했다고 보기 어렵다.

또 일본인이 복숭아를 심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목적이 회유인지 수탈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도산을 지명에 사용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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