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문자와 서예의 도시 인천, 그리고 문자박물관
2. 전통 서예의 맥은 인천서 어떻게 이어졌나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코로나19 수도권 집단감염으로 정부가 다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면서 5월 말부터 관람이 중단된 가운데,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뜻 깊은 전시회가 열렸다.

한국 근ㆍ현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동시에 관람할 수 있는 ‘미술관에 書(서) : 한국 근현대 서예전’이 열린 것. 한국 근ㆍ현대 미술에서 서예가 담당하고 있는 역할과 의미가 무엇인지 모색하기 위한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는 전통 서예가 근대 이후 ‘조선미술전’(일제강점기)과 ‘국전’(해방 후 정부 주관)을 거치면서 현대 서예로 다양하게 변화하는 과정을 한국 근ㆍ현대를 대표하는 1세대 서예가 12인의 작품으로 보여준다.

대표하는 작가는 손재형ㆍ김충현ㆍ김규진ㆍ배길기ㆍ유희강ㆍ고주봉 등인데, 이중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을 대표하는 서예가는 검여 유희강이다. 손재형ㆍ배길기ㆍ고봉주는 인천 사람은 아니지만, 인천의 서예가들을 길러냈다.

해방 이후 현대 서예를 대표한 인천의 서예가들

인천은 팔만대장경을 제조한 문자의 고장이자, 동국 진체(원교 이광사)를 완성한 서예의 고장이다. 인천에는 여전히 서예의 맥이 흐르고 있으며, 인천 5대 서예가는 국전에서 현대 서예를 대표했다.

해방 이후 한국 서예를 대표하는 인천 5대 서예가는 검여 유희강, 동정 박세림, 우초 장인식, 송석 정재흥, 무여 신경희이다. 5명 모두 정부가 1949년부터 1981년까지 주관한 국전에서 초대 작가와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현대 서예를 이끌었다.

검여 유희강은 추사 김정희를 잇는 육조체의 대가이고, 동정 박세림은 검여와 어깨를 나란히 한 해서의 대가이다. 우초 장인식은 한글 궁서체와 전서ㆍ예서에 능했고, 송석 정재흥은 초서에 능했으며, 무여 신경희는 안로공체로 유명했다.

검여의 예맥은 검여가 서울로 가면서 서울에서 이어져 남전 원중식, 송천 정하진, 하촌 유인생으로 이어졌다.

인천에선 동정 박세림의 예맥이 청람 전도진으로 이어져 지금 계승되고 있다. 청람 전도진은 전각에 조예가 깊은데, 석봉 고봉주에게 전각을 사사했다. 청람 전도진의 예맥은 다시 인천의 홍백열ㆍ정태종, 안양 이남아, 수원 신현숙, 광주 박래창, 포항 정규원한테 이어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인천에는 미술품 수장고가 없어 검여와 동정의 작품은 후손들이 각각 성균관대학교와 대전대학교에 기증했다. 남아 있는 작품이라도 잘 보존하고 계승하는 게 인천의 과제다.

유희강ㆍ박세림ㆍ장인식ㆍ정재흥ㆍ신경희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미술대전(국전)으로 바뀌었다. 정부가 주관한 국전은 1949년에 시작해 1981년 30회까지 열렸다. 한국전쟁으로 제2회 대전은 1953년에 열렸으며, 1982년부터는 (사)한국미술협회가 주관했다.

제30회까지 국전에 초대작가(또는 추천작가)는 많지 않았고, 특선과 입선도 어려웠다. 미술계에서도 이 국전에서 입상한 작가와 작품이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기간에 인천의 5대 서예가 중 검여 유희강(1911년생)이 초대작가로 12번, 심사위원으로 6번 참여했다. 동정 박세림(1925년생)은 초대작가 11번, 심사위원 4번을 기록했다. 둘은 해방 이후 한국 서예의 토대를 닦았다.

우초 장인식(1927년생)과 송석 정재흥(1917년생), 무여 신경희(1918년생)는 검여와 동정을 이어 1970년대 중반부터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으로서 한국 서예를 이끌었다.

우초는 초대ㆍ추천작가 17번과 심사위원 1번을, 송석은 초대ㆍ추천작가 11번에 심사위원 4번을, 무여는 초대작가ㆍ추천작가 9번에 심사위원 3번을 기록했다. 추천작가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국전에서 특선을 연달아 네 번 해야 추천작가가 될 수 있었다.

3년 연속 특선했더라도 한 해를 거르고 이듬해 특선해도 안 됐다. 또, 특선에 총 6번 선정돼야 추천작가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그만큼 추천작가는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예술가였다.

제1회 추천작가는 황용하ㆍ김충현ㆍ손재형ㆍ안종원ㆍ김용진ㆍ정대기ㆍ오일영ㆍ박청이었고, 심사위원은 안종원ㆍ김용진ㆍ손재형이었다. 1953년 제2회 추천작가는 손재형ㆍ김용진ㆍ김충현ㆍ 배길기이었고, 심사위원은 김용진ㆍ손재형이었다. 제3회 추천작가는 손재형ㆍ김충현ㆍ배길기ㆍ김용진ㆍ박청ㆍ오일영ㆍ황용하이었고, 심사위원은 김용진ㆍ손재형이었다.

소전 손재형과 시암 배길기 등이 해방 이후 현대 서예의 기초를 다졌는데, 인천 서예는 이 둘과 인연이 깊다.

인천을 대표하는 검여 유희강은 소전이 국전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발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동정 박세림은 시암과 소전의 영향을 받았다.

우초 장인식은 시암의 문하생이며, 송석 정재흥은 동정 박세림이 인천 중구 내동에 설립한 동정서숙의 회원이었고, 무여 신경희도 동정의 가르침을 받았다.

인천 서예 스승, 소전 손재형과 시암 배길기

검여 유희강을 이끈 소전 손재형(1903~1981)은 일본에서 추사의 세한도를 찾아온 것으로 유명하다. 소전은 전남 진도 출생으로, 어려서부터 조부 손병익에게 한학과 서예를 익혔으며, 중국 금석학자 나진옥(羅振玉)에게 사사했다.

1924년 제3회 선전(鮮展)에서 처음 입선한 뒤 해마다 입선했고, 제10회 선전에서도 특선했다. 1932년 선전에서 조선서도전(朝鮮書道展)이 분리됐고, 소전은 1933년 제2회 대회 심사위원이 됐다.

소전은 1945년 광복 직후 조선서화동연회(朝鮮書畫同硏會)를 조직해 초대회장이 됐다. 1949년 제1회 국전부터 제9회(1960)까지 심사위원으로 활동했고, 그 뒤 국전 고문(1961)과 심사위원장(1964, 제13회)을 역임하며 국전을 통해 현대 서예가를 발탁하고 육성하는 등, 한국 서예에 큰 족적을 남겼다.

소전은 중국에서 서법(書法), 일본에서 서도(書道)로 불리던 것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서예’라는 말을 창안했다. 19세기에 추사가 있다면, 20세기엔 소전이 있다고 할 만큼 당대를 대표하는 서예가로, 19세기 추사체에 이어 20세기 소전체를 확립했다.

동정 박세림을 이끈 시암 배길기(1917~1999)는 전서에 능했고, 서예 행정가로도 유명했다. 시암은 1941년 니혼대학(日本大學) 법학과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상업학교와 경남중학교 교사를 지냈다. 1952~1964년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지냈다.

1953년 문교부 예술과장을 맡아 예술행정의 토대를 쌓았고, 1957년 최연소로 예술원 회원이 됐으며, 한국서예가협회 초대회장을 지냈다. 1952년 이후 동국대와 서울대 미대에서 강사로 재직했고, 1958년 동국대 교수가 됐다.

시암은 특히 1960년부터 국전 심사위원과 운영위원을 지내면서 ‘국전 선생’으로 불릴 정도로 서예계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19세기 추사, 20세기 초중반 소전, 20세기 중후반 검여

인천에선 검여 유희강이 1959년 제8회 국전 때 처음 초대작가에 올랐다. 이 때도 손재형이 심사위원을 맡고 있었다. 검여는 제9회 대회 때도 초대작가에 오르는 등, 국전에서 11번 초대작가에 올랐다.

검여 유희강(1911~1976)은 인천 시천동(현재 검암 시천동) 출신으로 한국서예가협회 회장과 인천시립도서관 관장, 인천시립박물관 관장 등을 지냈다.

1937년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졸업하고 1938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동방문화학회(東方文化學會)에서 중국의 서화와 금석학을 공부했다. 또, 상하이 미술연구소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1939년 베이징 동학회어학교(同學會語學校)를 졸업했고, 1940년에는 ‘강서시보((江西時報)’ 편집장을 지냈다.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 지대장(支隊長)의 비서로 있다가 해방과 함께 1946년 귀국하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1961년부터 국전 심사위원을 6번 지냈다.

검여는 서울에서 ‘검여서숙(劍如書塾)’을 열어 후배들을 지도했다. 후학 양성 중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실어증과 반신불수의 병고를 치렀다.

병고도 그의 예술혼을 꺾지는 못했다. 추사를 흠모한 검여 또한 추사를 따라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서예에 정진했다. 오른손이 마비된 상태에서 왼손으로 쓴 글씨로 1971년 제3회 개인전을 열어 반향을 일으켰다.

인천 5대 서예가, 1970년대 한국 서예 이끌어

동정 박세림 용동큰우물 현판.
동정 박세림 용동큰우물 현판.

동정 박세림(朴世霖, 1925~1975년)은 강화 출신이다. 현대 서예 2세대로 불리며 현재 인천의 서예를 이끌고 있는 청람 전도진과 강란주가 동정한테 사사했다. 동정은 8세 때부터 조부한테 서예를 배우고 익혔다.

동양한의대(東洋韓醫大)를 중퇴했으며, 1960년 제10회 국전에서 처음 초대작가로 올랐고, 이후 모두 11번 초대작가가 됐다. 1965년에 처음 국전 심사위원을 맡아 모두 4번을 지냈고, 문교부 신인예술상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동정은 3년간 예총(藝總) 경기도지부장을 지내면서 인천여자고등학교에서 서예를 지도했다. 육조체(六朝體)를 정교하게 쓰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인천 내동 창제한의원 2층에 동정서숙을 설립해 후학을 양성했고 서울 종로에도 서숙을 설립해 후학을 길렀다.

우초 장인식은 1961년, 송석 정재흥은 1969년, 무여 신경희는 1970년에 처음으로 국전 초대작가로 등장했다. 1970년 제19회 국전에 인천의 서예가 5명(검여, 동정, 우초, 송석, 무여)이 모두 초대작가와 추천작가로 이름을 올렸다.

이 5명은 1973년까지 계속 국전에 이름을 올렸고, 1974년에는 동정을 제외한 4명이 이름을 올렸다. 1974년은 동정이 작고하기 한 해 전이다. 1976년 검여가 작고한 후, 나머지 3명이 정부 주관 국전이 1981년 제30회로 끝날 때까지 계속 이름을 올렸다.

21세기 서예 이끄는 청람 전도진

청람 전도진.
청람 전도진.

현재 인천에서 서예의 맥을 이으며 후학을 양성하는 사람은 청람 전도진(1948년생)이다. 청람은 1966년 송도고등학교 재학 시 동정한테 서예를 사사했고, 1968년 석봉 고봉주한테 전각을 사사했다.

청람은 1968년 제4회 경기도전 최우수상과 제7회 대한민국 신인예술상 장려상 수상으로 한국미술협회 회원이 됐으며, 1968년부터 국전 특선 3회, 입선 7회를 거쳐 최연소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가 됐다.

1974년 한국전각협회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으며, 1976년엔 인천서도회(청람묵연회)를 설립해 지금까지 청람서예전각연구실을 운영하며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1981년 인천서예가협회 초대회장을 맡았으며, 1990년부터 목원대학교 미술대학에서 16년간 겸임교수로 재직했다.

그런데 인천에서 청람 선생을 알아주는 이가 별로 없다. 청람은 오히려 전남과 광주, 대전 등에서 더 유명하다. 그의 글씨를 알아봐주는 이들은 남쪽 사람이고, 강의와 교육도 주로 호남과 충청에서 요청이 많다.

청람 전도진은 “인천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서예를 이끌었고, 현재도 이끌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정작 인천에선 이를 알아주지 않는다. 검여 선생과 동정 선생의 작품을 인천이 보듬지 못한 게 인천의 현실”이라며 “서예는 인천에 전통이 있고, 현재도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대표적 예술분야다. 이를 육성하고, 작품들을 보관하며 알리는 방안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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