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문자와 서예의 도시 인천, 그리고 문자박물관 6
국립 세계문자박물관과 문자도시 인천(최종회)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기획취재] 문자와 서예의 도시 인천, 그리고 문자박물관
1. 인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건립 배경
2. 전통 서예의 맥은 인천서 어떻게 이어졌나?
3. 제주도의 추사 활용한 관광정책 (상)
4. 제주도의 추사 활용한 관광정책 (하)
5. 남도로 이어지고 꽃피운 추사의 서예
6. 국립 세계문자박물관과 문자도시 인천(최종회)

문헌이 기록한 세계 최초 금속활자인쇄의 고장, 강화도

강화도 외규장각.
강화도 외규장각.

2022년 인천 연수구 송도동(송도국제도시)에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개관할 예정이다. 이 박물관은 국내를 넘어 세계 문자 관련 연구ㆍ교육ㆍ학술 교류의 세계적 거점이 될 전망이다.

인천이 다른 도시와 경쟁해 세계문자박물관을 유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인천이 역사적으로 문자도시라는 게 있다. 인천은 또한 활자의 도시이며 서예의 고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치 배경을 아는 인천시민은 드물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기 전 인천 강화도는 몽골 침략에 맞서 재조대장경(1236~1251년, 강화도 선원사에서 두 번째로 만든 목조 대장경)을 만든 곳이다.

강화도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개성에서 수도를 천도한 곳으로, 재조대장경을 만들기 전에 금속활자를 찍어낸 기록도 남아 있다. 바로 ‘상정고금예문’이다.

상정고금예문은 고려 때까지의 예문(역대 종조의 헌장, 왕실과 문무백관의 예복ㆍ면복 등 예절 양식)을 모아 편찬한 책으로, 50권으로 돼있었다. 고려 인종 때 최윤의(崔允儀)가 지었지만 현존하진 않는다. ‘동국이상국집’에 고려 고종 21년(1234년) 활자로 찍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상정고금예문은 현존하진 않지만 기록으로 보면 현존하는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 직지(1377년)보다 143년 앞선다.

이규보가 진양공에 책봉된 최이(崔怡, 초명은 최우崔瑀)를 대신해 지은 ‘신인상정예문발미(新印詳定禮文跋尾)’에 최윤의 등이 엮은 ‘상정예문’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책이 낡아지자 최이의 선친 최충헌이 보완해 2부를 작성한 뒤, 1부는 예관한테 주고 나머지 1부는 자기가 보관했다.

그런데 몽골 침입으로 도읍을 강화도로 천도할 때 예관이 미처 챙기지 못해 최충헌 소장본만 남게 됐고, 이를 금속활자로(鑄字)로 28부 찍어 여러 관사(官司)에 보관하게 했다.

이 금속활자 인쇄본을 제작한 때는, 최이가 진양후에 책봉된 게 1234년이고 이규보가 1241년에 죽었으므로 그 사이인 강화도 천도시기로 추정된다.

시각장애인의 한글 ‘훈맹정음’을 창제한 애민도시

강화 선원사 재조 팔만대장경.
강화 선원사 재조 팔만대장경.
강화 선원사 재조 팔만대장경.
강화 선원사 재조 팔만대장경.

인천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과 ‘의궤’를 보관하던 고장이다. 강화도에는 조선의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이 있었고,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보’(왕실 족보)를 보관했던 정족산사고가 있었다.

외규장각(外奎章閣)은 1782년 2월 정조가 왕실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규장각이다. 도성 안에 설치한 규장각을 내규장각이라고 했으며, 내규장각과 외규장각에 서적을 나눠 보관했다.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 극동함대에 의해 외규장각이 소실될 때 서적 5000권 이상이 함께 소실됐고, 의궤(儀軌)를 비롯한 책과 문서, 은괴 등을 빼앗겼다. 당시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의궤만 297권에 달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전에 서울 춘추관과 충주(忠州)ㆍ성주(星州)ㆍ전주(全州) 삼사고(三史庫)에 왕조실록을 나눠 봉안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본만이 묘향산으로 이장됐고, 나머지는 모두 소실됐다.

1606년(선조 39년)에 다시 활자본 3부와 전주사고의 원본ㆍ교정본을 합해 왕조실록 5부를 제작해 서울 춘추관과 강화도 마니산, 봉화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 사고에 보관했다. 인조 이후에는 실록 4부를 작성해 정족산ㆍ태백산ㆍ적상산ㆍ오대산 등 사사고(四史庫)에 나눠 조선 말기까지 안전하게 보존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정족산사고 실록 일부를 약탈했다. 정족산사고에 봉안했던 실록과 서적은, 일부는 서울로 가져가고 일부는 약탈되는 시련을 겪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보존ㆍ관리하고 있다. 인천이 문자도시로서 더욱 훌륭한 역사성을 지니는 대목은 시각장애인들의 한글인 ‘훈맹정음(=점자)’을 창제한 곳이라는 점이다.

훈맹정음은 강화도의 송암 박두성 선생이 창제했다. 훈맹정음 창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한글을 처음 창제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훈민정음에 담긴 애민정신이 같다는 점에서 더욱 훌륭하다.

아울러 15세기 세종이 창제한 ‘천지인 한글’은 20세기 ‘디지털 한글(=한글과컴퓨터)’로 이어져 한국이 21세기 IT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발판이 됐는데, 한글과컴퓨터를 만든 이는 인천 부평사람 이찬진이다.

원교체와 추사체를 모두 계승한 서예의 고장

왼쪽부터 검여 유희강, 동정 박세림, 우초 장인식, 송석 정재흥, 무여 신경희.
왼쪽부터 검여 유희강, 동정 박세림, 우초 장인식, 송석 정재흥, 무여 신경희.

인천이 예술적으로도 문자도시라고 긍지를 가질만한 것은 서예의 역사이다. ‘서예’라는 말은 추사 김정희와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계승한 소전 손재형 선생이 처음 만든 말이다. 중국은 서법, 일본은 서도라고 부른다.

인천은 20세기 중후반 한국의 서예를 이끈 이들을 배출했다. 해방 이후 한국 서예 중흥기를 이끈 인천의 5대 서예가는 검여 유희강, 동정 박세림, 우초 장인식, 송석 정재흥, 무여 신경희 선생이다.

5명 모두 정부가 1949년부터 1981년까지 주관한 국전에서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현대 서예를 이끌었다. 소전이 이들을 발굴했고, 이 다섯명이 발탁한 이들이 현대 서예를 이끌고 있다.

소전은 추사만이 아니라 원교의 영향도 받았다. ‘동국진체’로 유명한 원교 이광사는 강화도에서 하곡 정제두(1649~1736, 1709년 강화 이주)한테 양명학(陽明學)을 사사하고 윤순(尹淳, 1680~1741) 문하에서 필법을 익혀 ‘원교체(圓嶠體)’를 이룩했다.

소전의 스승은 무정 정만조와 성당 김돈희인데, 두 사람 모두 원교의 동국진체 영향을 받았다. 원교의 서예가 소전으로 이어지고, 소전의 서예는 다시 20세기 인천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인연이 됐다.

현재 인천에선 동정 박세림의 예맥이 청람 전도진으로 이어져 계승되고 있다. 청람 전도진은 전각에 조예가 깊은데, 석봉 고봉주에게 이를 사사했다. 청람 전도진의 예맥은 다시 인천의 홍백열ㆍ정태종, 안양 이남아, 수원 신현숙, 광주 박래창, 포항 정규원한테 이어지고 있다.

세계문자박물관에 문자도시 인천의 전통과 역사 반영 안 돼

송암 박두성 창제 훈맹정음.
송암 박두성 창제 훈맹정음.

이처럼 인천은 문자도시의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도시다. 이를 배경으로 세계문자박물관을 유치할 수 있었다.

지난해 11월 세계문자박물관 착공식에서 박남춘 인천시장은 “우리 인천은 역사적으로 세계 최초 금속활자로 인쇄된 상정고금예문을 간행했고 팔만대장경을 재조했으며, 외규장각을 간직하고 한글점자 ‘훈맹정음’을 창제한 문자문화의 역사 도시”라며 “세계문자박물관 건립은 인천이 명실상부한 글로벌 문화도시로 도약하고 관광산업이 부흥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세계문자박물관 건립 과정에 인천의 문자도시 역사와 전통은 반영되지 않고 있다. 인천시는 땅만 내준 꼴이다.

정부는 연수구 송도동 24-8번지 1만9418㎡에 세계문자박물관 건립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내년에 준공해 내후년에 개관하는 게 목표다.

지하1층에 전시실ㆍ수장고ㆍ학예실, 지상1~2층에 전시실ㆍ도서관ㆍ다목적강당ㆍ세미나실ㆍ강의실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사업비는 유물 구입비 등을 포함해 총 908억 원 규모이다.

하지만 세계문자박물관 콘텐츠 구성 계획에 인천에서 이어지고 있는 문자와 인쇄 역사, 기록문화와 문자 예술은 없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쐐기문자와 이집트 문자 등 인류 최초의 문자부터 라틴문자, 한자, 한글 등을 종합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라고 밝혔지만, 전시 콘텐츠에 인천과 관련된 것은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세계문자박물관 건립위원회 일부 위원의 경우 “인천이 왜 건립지로 선정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실정이다. 금속활자 인쇄부터 훈맹정음과 서예까지 문자도시 인천의 역사와 전통은 훌륭하지만 국비 사업이라는 미명 아래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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