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문자와 서예의 도시 인천, 그리고 문자박물관
1. 인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건립 배경

대장경과 훈맹정음 만들고 IT강국 토대 구축

정부가 내년에 인천 연수구 송도동(송도국제도시)에 국립 세계문자박물관을 개관할 예정이다. 이 문자박물관은 국내를 넘어 문자 관련 연구ㆍ교육ㆍ학술 교류의 세계적 거점이 될 전망이다.

이 문자박물관은 토지 1만9418㎡에 건축연면적(지하 1층, 지상 1층) 1만5650㎡로 지어진다.

지하 1층에는 전시실ㆍ수장고ㆍ학예실이 들어서고, 지상 1~2층에는 전시실ㆍ도서관ㆍ다목적강당ㆍ세미나실ㆍ강의실 등을 갖춘다. 사업비는 유물 구입비 등을 포함해 총 908억 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강화도 외규장각.
강화도 외규장각.

그런데 인천에 국립 문자박물관을 유치할 수 있었던 배경을 아는 인천시민은 드물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기 전 인천 강화도는 몽고군 침략에 맞서 재조 대장경(=강화도 선원사에서 두 번째로 만든 대장경)을 만든 곳이다.

강화도에는 특히 조선의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이 있었고, ‘조선왕조실록’(=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유산)과 ‘선원보’(왕실 족보)를 보관했던 정족산사고가 있었다.

또, 시각장애인들의 한글인 ‘훈맹정음(=점자)’을 창제한 이는 강화도의 송암 박두성 선생이고, 15세기 세종이 창제한 ‘천지인 한글’은 20세기 ‘디지털 한글(=한글과컴퓨터)’로 이어져 한국이 21세기 IT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발판이 됐는데, 한글과컴퓨터를 만든 이는 인천 부평사람 이찬진이다.

그리고 추사 김정희 이후 최고의 서예가로 평가 받는 검여 유희강 선생도 인천사람이고, 그래서 서예는 인천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는 예술 장르로 꼽히며 현재도 그 예맥이 이어지고 있다. 그만큼 인천은 문자와 인연이 깊다.

프랑스의 만행이 불사른 정조의 외규장각

외규장각(外奎章閣)은 1782년 2월 정조가 왕실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규장각이다. 도성 안에 설치한 규장각은 내규장각이라고 했으며, 내규장각과 외규장각에 서적을 나눠 보관했다.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 극동함대에 의해 외규장각이 소실됐다. 이로 인해 서적 5000권 이상이 소실됐고, 의궤(儀軌)를 비롯한 책과 문서, 은괴 등을 빼앗겼다. 당시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의궤만 297권에 달했다.

세월이 한참 흘러 1993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자국 테제베(TGV)를 한국고속철도 열차로 수주하기위해 방한할 때 의궤 중 ‘휘경원원소도감의궤’ 상 1권을 반환하면서 프랑스가 소장하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 전체 반환을 약속했지만, 무산됐다.

그리고 2010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에 맞춰 열린 한국-프랑스 정상회담에서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를 한국에 5년마다 갱신 대여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현재 강화도 외규장각은 병인양요 때 소실된 것을 복원한 것으로,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해 진행한 화성 행차를 기록한 의궤 중 일부 사본을 전시하고 있다.

세계기록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과 정족산사고
 

장사각과 선원보각.
장사각과 선원보각.

강화도 정족산사고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곳이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전에 서울 춘추관과 충주(忠州)ㆍ성주(星州)ㆍ전주(全州)의 삼사고(三史庫)에 실록을 나눠 봉안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본만이 묘향산으로 이장됐고, 나머지는 모두 소실됐다.

1606년(선조 39년)에 다시 활자본 실록 3부와 전주사고의 원본ㆍ교정본을 합해 실록 5부를 완성했다. 서울 춘추관, 강화 마니산, 봉화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에 각각 사고를 설치한 뒤 춘추관ㆍ태백산ㆍ묘향산에는 신인본(新印本)을, 마니산에는 전주사고 원본을, 오대산에는 전주사고 교정본을 봉안했다.

조선은 인조 이후에 실록 4부를 작성해 정족산ㆍ태백산ㆍ적상산ㆍ오대산 등 사사고(四史庫)에 나눠 봉안했으며, 이 실록들은 조선 말기까지 안전하게 보존됐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정족산사고의 일부 실록을 약탈했다. 정족산에 봉안했던 실록과 서적은 일부를 서울로 가져가기도 했고, 일부는 약탈되는 시련을 겪었다.

대한제국시대 때는 의정부가 관리를 파견해 강화군수와 협력해 보존했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뒤, 정족산사고본은 태백산사고의 실록과 규장각 도서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이장됐다. 1930년에는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졌고, 해방 후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학교로 개편되면서 지금은 서울대가 보존ㆍ관리하고 있다.

정족산사고본이 약탈 등 시련을 겪으면서도 전해질 수 있었던 데는 전등사의 역할이 컸다. 정족산 전등사는 수호사찰로서 사고를 지켰다.

현재 사고로 남아 있는 건물은 나중에 지은 것이다. 1931년 간행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 사고의 사진이 수록돼있는데, 이때를 전후로 원래 사고는 없어진 것으로 추산된다. 본래 사고에 걸려 있던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 현판은 전등사가 보존하다가 다시 걸었다.

15세기 훈민정음 창제정신, 20세기 훈맹정음으로 계승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

인천이 문자도시라는 데 자긍심을 갖게 하는 대목은 바로 훈맹정음이다. 문화재청은 ‘훈맹정음’ 발표 96년 만에 국가 지정 문화재로 등록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훈맹정음은 강화 출신 송암 박두성 선생이 시각장애인을 위해 창제한 한글이다.

한글이 훌륭한 이유는 기능적 측면만 훌륭해서가 아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문자 창제정신과 창제 목적, 방법이 자세히 기술돼있는데, 여기에는 세종의 애민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세종이 문자를 창제한 이유는 ‘문자가 곧 힘이기에, 백성들이 글자를 몰라 억울한 일이 없게 하고자함’이라고 돼있다. 송암 박두성 선생의 훈맹정음도 훈민정음과 같은 정신을 담고 있다.

인천은 문자의 도시다. 국립 세계문자박물관이 인천에 건립되는 배경이다. 문자는 정보이며, 정보는 곧 권력이다. 21세기에 지식정보사회로 진입했고, 그 핵심은 지식과 정보이며, 그 원천은 문자에 있다.

서예로 꽃피운 문자예술의 예맥이 전승되는 곳

인천은 문자와 관련한 역사와 전통만 있는 게 아니라, 서예로 꽃피운 문자예술의 예맥이 전승되는 곳이다.

특히, 인천의 서예는 추사 이후 최고의 서예가로 평가 받는 검여 유희강 선생, 동정 박세림 선생 등이 예맥을 계승하면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동정 박세림 선생에서 이어진 예맥은 다시 청람 전도진 선생을 통해 지금도 서예와 전각, 금석학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서예는 또 다시 캘리그라피와 ‘훈민정필(=인천에서 창업한 한글 바로쓰기 기업)’로 이어지고 있다.

훈맹정음.
훈맹정음.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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