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연재] GM대우를 위한 변명 ③

연재순서
① GM, 대우차 인수한 뒤 뭐했지?
② 문제는 유동성이 아니라 GM의 파산절차(상/하)
③ 높았던 ‘공기업화’ 여론, 매각에 눈먼 민주당
④ 2009 GM대우, AGAIN 1999 대우자동차
⑤ GM, 예상대로 '파산보호’…GM대우는?

<편집자주> 오는 6월 오바마 미국정부가 GM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GM대우의 운명도 달라진다.

미국 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에서 시작된 세계 금융위기는 더 이상 신자유주의가 만능이 아님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오바마 미국 정부 역시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닌 보이는 손의 조치를 확대하고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우는 등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려 든다.

오바마 정부와 GM의 채권단이 걱정하는 것은 자국의 산업이지 한국경제가 아니다. 냉혹한 국제질서 속에서 한국경제를 걱정해야 하는 것은 바로 한국정부와 GM대우의 한국채권단이다.
GM대우 위기와 관련해 우리가 직시해야만 하는 점들을 지난날로부터 차근차근 짚어봤다. 

숱한 난항과 아픔 속에 출범한 GM대우

대우자동차 매각 일지

1999년 6월 ‘대우-삼성’간 빅딜 무산(대우전자    ↔ 삼성자동차), 삼성차 법정관리
              8월 채권단, 워크아웃 결정
           11월 채권금융기관 협의회, 기업개선계획 확정
2000년 2월 대우계열구조조정추진협의회 설치, 국제입찰 개시
               6월 우선협상대상자로 포드 선정
               9월 포드, 대우차 인수포기
            10월 ‘GM-피아트’ 컨소시엄, 대우차 인수논의 개시
            11월 대우차 최종부도/ 법원, 법정관리 개시 결정
2001월 2월 대우자동차 1725명 정리해고 
             3월 김대중 대통령, 방미 중 GM 잭 스미스 회장 면담
             5월 ‘채권단-GM’간 인수․매각협상 개시
             9월 ‘채권단-GM’간 MOU 체결
2002년 8월 ‘산업은행-GM’, GM대우법인 설립
           10월 GM대우 공식 출범
2005년 11월 GM대우, 인천대우자동차(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인수

2001년 9월 대우자동차의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과 GM은 대우자동차 매각과 관련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대우자동차 매각방법은 GM이 대우자동차를 직접 인수하는 것이 아니라, GM과 채권단이 공동으로 신설법인(GM대우)을 설립하고 이 신설법인이 대우자동차를 인수하는 방식이었다.

신설법인에 대해 GM이 4억달러(지분의 67%)를 출자하고 채권단은 2억달러(지분의 33%)를 출자했다. 2009년 현재 지분은 GM이 72%, 산업은행이 28%를 가지고 있다. 매각당시 GM대우가 인수하게 될 대우자동차의 자산과 부채규모는 약 20억달러로 자산매각대금 12억달러와 부채 8억달러로 돼있었다.

이중 자산매각대금 12억달러는 채권단(대우자동차 채권단)에 우선주로 지급키로 하고 GM대우는 이를(매각대금 12억달러) 외상으로 인수했다.

이에 따라 GM대우는 대우자동차 채권단에게 매각대금 12억달러를 2011년부터 5년에 걸쳐 갚기로 했으며, 우선주의 평균 배당률은 3.5%로 정했다.

아울러 10년 후(2012년)부터 매각이 가능하도록 하는 한편, 채권단은 신설법인에 대해 최고 20억달러에 이르는 장기운영자금을 대출해주기로 했다.

이로써 99년 8월 워크아웃이 결정난지 3년 2개월만인 2002년 10월 GM대우가 공식 출범을 알렸다.

그동안 대우자동차는 해외매각이 결정된 뒤 미국의 포드사와의 협상 실패, 이후 부도처리 법정관리 등을 겪었고, 2001년 2월에는 1725명이 정리해고를 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GM의 철저한 계획에 농락당한 채권단과 정부

2000년 9월. 대우자동차 인수 우선협상대상자였던 포드가 갑자기 인수포기를 선언하자 단 하루 만에 주가가 폭락하며 국내주식시장에서 23조원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환율과 금리도 요동쳤다. 이를 예의 주시하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GM이다.

포드의 인수포기 선언 뒤 정부와 채권단이 소모적인 매각실패 책임론에 휩싸여있을 때 GM은 10월 17일(2000년) 대우차 일괄인수 카드를 불쑥 내밀었다. GM이 당시 홍콩에 머물고 있던 오호근 대우자동차구조조정추진협의회 의장에게 일괄 인수하겠다는 의향서를 제출한 것.

이보다 앞서 대우차채권단은 10월 5일 대우차를 법인별로 분할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대우차와 대우차판매는 산업은행이, 쌍용차는 조흥은행이, 대우통신 보령공장은 한빛은행이, 대우캐피탈은 서울은행이 각각 매각하기로 했다.

이런 결정이 있은 뒤 GM이 내민 일괄인수 카드는 우선협상의 주도권을 쥔 뒤 정확한 실사를 통해 대우차를 입맛대로 먹으려는 의도였다. 인수의향서에서 밝힌 GM의 기본방침은 말이 일괄인수이지 대우차의 국내외 41개 법인 가운데 국내법인만을, 그것도 선별 인수하려는 전략이나 다름없었다.

99년 워크아웃이 결정 나기기에 앞서 98년 대우차와 GM은 전략적 제휴를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협상에 들어갔다.

2004년 <신동아> 5월호에서 당시 협상에 참가했던 대우차 한 임원은 “GM은 대우차의 세계경영이 거둔 놀라운 성과를 궁금해했다. 18만대였던(92년, GM과 결별당시) 생산능력이 불과 6년 만에 200만대 수준까지 올라왔던 터였다. GM으로서는 대우를 통해 동구권과 중국 등에 진출할 수 있는 지름길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협상은 결과적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해 6월 미국을 방문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GM 잭 스미스 회장을 만나 ‘대우와 협상이 빨리 성사되길 바란다’고 전했지만, GM은 ‘한국기업들은 부채가 너무 많아 투자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아울러 GM은 대우차에 사실상 경영권 포기를 요구했다. 협상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

당시 협상에 임했던 한 임원은 “김우중 회장의 지시로 인원ㆍ재무ㆍ판매망 등 상세한 자료를 GM에 넘겨줬다. GM은 특히 자금상황에 대한 자료를 집중적으로 요구했다. 기업기밀과 관련된 자료를 넘겨주는 것에 대한 내부의 문제제기가 나올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결국 GM과의 협상은 98년 9월 중단됐다.

GM은 처음부터 목적이 분명했다. 대우차 사장 B씨는 “GM(의 목적)은 대우차를 인수하든지 아니면 죽이든지 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자동차산업이 그처럼 질주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거다. 잘게 쪼개 사업부형태로 인수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고사시킨다는 것은 공공연한 전략이었다”고 전했다.

게다가 GM인수가 분명해지면서 대우차의 BOM(Bill of materials, 차종별 원가계산서) 등 비밀문건이 박스 채 GM에 넘어갔다.

이처럼 대우차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알고 있는데다 정부와 채권단이 조기매각 방침을 밝히자 GM은 느긋하기만 할 뿐 애가 타는 쪽은 정부와 채권단이었다. 결국 GM에 끌려 다니다 4억달러에 매각되고 말았다.

높았던 ‘공기업화’ 여론, 매각에만 눈먼 민주당

GM에 매각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만큼 이에 대한 우려도 많았다. GM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

2000년 9월. 포드가 인수를 포기한 후 대우차는 11월 부도를 맞은 뒤 채권단의 지원으로 버텨가며 GM에 매각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아쉬울 게 없었던 GM은 차일피일 미루며 대우차를 고사 직전으로 몰아갔다. 매각협상에서 GM은 더욱 유리해지는 반면 정부와 채권단, 대우차 노동자, 국민 모두 부담만 늘어나고 있었다.

이에 정부와 채권단을 향해 GM만 바라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한국경제를 위해 GM을 압박할 협상카드와 매각협상 결렬에 따른 대비책을 마련해야한다는 주장이 당시 설득력을 얻었다.

당시 현영석 한남대 교수는 “매각을 진행하되 최종 협상시한과 최저가격과 조건을 산정한 뒤 GM이 이를 충족하지 않을 경우 과감히 매각협상을 중단해 무작정 기다리는 것을 끝내야한다. 특히 매각시기를 정해 놓고 이후에는 협상을 중단해 대우차 기업가치가 대안도 없이 계속 하락하는 것을 방지해야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매각협상이 무위로 끝날 경우 한시적 공기업화로 정상화한 뒤 매각가치를 높이는 방안도 적극 검토되어야한다. 르노자동차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우선 부채를 탕감하고 공기업화를 통해 전문경영자를 영입해 과감한 경영혁신을 통한 자구노력이 성사되도록 하는 방안도 있다”며 “정부가 공기업 민영화를 추세로 삼고 있어 공기업화가 어렵다면 투자자들을 모집해 지주회사를 설립한 뒤 전문경영인에 의한 경영혁신으로 경영정상화를 이룩한 뒤 주식모집을 통해 국민기업화 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정부 내부에서도 한시적 공기업화에 대해 검토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산업자원부에만 국한된 얘기였을 뿐 실제로 칼자루를 쥐고 있었던 부처는 금융감독원과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청와대 경제수석 등 소위 금융 분야였다.

산자부는 자동차산업이 차지하고 있는 국민경제의 산업적 비중을 고려해 공기업화를 검토했지만, 실권이 없었던지라 오로지 부실처리에만 관심이 높았던 금감원과 재경부는 해외매각에만 열을 올렸다.

당시 조성재 자동차연구소 연구위원은 “지금까지 대우차 처리를 둘러싼 논의는 주로 금융부실을 어떻게 털어내느냐를 중심으로 이뤄져왔다”며 “자동차산업의 전후방 효과를 감안해 산업정책적인 측면도 고려하는 자세가 아쉽다”고 지적했다.

신국환 당시 산자부 장관은 2000년 9월 대우자동차 매각과 관련해 “GM 및 현대-다임러크라이슬러 컨소시엄과 협상이 실패로 끝나는 최악의 경우 국영화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현대차를 포함한 한국자동차산업 전반의 구조합리화 관점에서 해결책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우차 처리 문제가 조성재 연구위원의 지적처럼 국민경제의 산업적 측면을 무시한 채 금융부실 처리에만 집중하면서 해외매각으로 일원화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금속노조 관계자는 “오늘날 GM대우가 겪고 있는 위기의 씨앗은 사실상 10년 전 민주당이 잉태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2001년 3월 SBS가 실시한 여론조사는 당시 대우자동차의 공기업화에 대한 국민여론이 어땠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67%가 해외매각을 반대하고 68%가 공기업화를 지지했다. 또한 한길리서치의 여론조사에서도 대우ㆍ쌍용차의 해외매각에 대한 반대가 64%인데 반해 찬성한다는 의견은 30.7%로 반대의견이 두 배나 많았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