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책으로 세상 읽기 13. 소태산 평전–솥에서 난 성자

김형수|문학동네

인천투데이=신현수 (사)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9월 어느 날, 느닷없이 원불교가 궁금했다. 원광대학교, 원음 방송 등을 운영하는 종교 교단 말고는 원불교에 대해 내가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불교와 무엇이 같고 어떻게 다른가. ‘원’은 어떤 의미지. 갑자기 여러 가지 궁금증이 몰려왔다. 그래서 산 책이 김형수 시인이 쓴 ‘소태산 평전–솥에서 난 성자’였다. 이 책을 모두 읽고 난 지금, 원불교를 비롯한 증산교, 천도교 등 민족종교에 대해 내가 너무 무지했구나, 하는 반성이 밀려왔다.

책을 읽고 난 후의, 또 원불교에 관한 자료와 유튜브 등을 더 찾아서 공부한 후의 느낌을 결론부터 말하면, 그동안 내가 종교에 대해 고민했던 많은 것들이 이 책과 원불교의 교리에 거의 들어 있었다. 뭔가 종교에 관한 ‘해답’을 찾은 느낌.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첫째, 종교는 꼭 이적이 행해져야 하나. 예수님처럼 꼭 성령으로 잉태해야 하나.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야 하나. 부처님처럼 어머니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야 하나. 공자님처럼 태어날 때부터 치아가 있어야 하나.

제자들과 기도를 마치고 인주도 없고, 혈서를 쓴 것도 아닌데 혈인이 찍혔다든지 하는 것 등등 (혈인 기도), 원불교에도 이적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박중빈 대종사께서는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숱한 기행과 이적들은 본인의 뜻에 따라 모두 암장 되었다’.

둘째, 불교의 승려나 가톨릭의 신부와 수녀 등, 성직자들은 반드시 결혼하지 말아야 하나. 너무 비인간적인 것 아닌가. (물론 불교의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등의 교단에서는 결혼하기도 하지만) 원불교 출가자는 결혼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각자의 자유의지에 맡긴다.

셋째, 성직자들도 직업을 가져야 하지 않나. 그래야 돈벌이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지 않나. 성직자들은 신도들이 갖다주는 돈으로 편하게 생활해야 하나. 극히 일부겠지만, 심지어 골프 치러 다니는 목사, 신부, 승려들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원불교에서는 시주 등이 없다.

출가자들도 직업을 갖고 일을 한다. 미국에 가서 포교 활동을 벌이던 어느 원불교 교직자는 낮에는 신도가 주인으로 있는 주유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교당에서 주유소 주인에게 경전을 가르쳤다고 한다.

넷째, 종교는 왜 이렇게 남녀 차별이 심한가. 가톨릭에서 신부와 수녀의 차이를 보라. 불교에서 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의 차이를 보라. 원불교에서는 교단의 최고 행정 책임자인 교정원장 등의 자리에 일쑤 여성들을 임명한다. 원불교야말로 가장 남녀 평등한 종교다.

다섯째, 성경과 불경 등 종교 경전 등은 왜 이렇게 말이 어렵나. (가톨릭에서는 우리말 공동 번역 성서를 쓰고 있지만) 용어가 좀 쉬우면 안 되나. ‘대종경’을 비롯한 원불교 경전은 모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생활언어로 돼 있다.

소태산 박중빈.
소태산 박중빈.

평전 ‘프롤로그’에도 나오지만, 동서고금의 그 어떤 성자도 고향에서 발견된 전례는 없다. 성인들 대부분 고향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코 흘리며 놀던 동네 꼬마를 성인으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소태산 박중빈은 전라도 영광에서, 어촌에서, 시골에서, 주막에서, 구수미 마을의 주모에 의해 ‘발견’됐다. 고향에서 인정받은 성자라니, 얼마나 민중적인 성인인가. 소태산은 1891년 음력 3월 27일에 태어나서 1943년 양력 6월 1일에 서거했다. 조 부잣집 마름으로 일하던 아버지 박성삼은 소태산이 태어나기 전 아들 둘, 딸 하나가 있었다.

그런데 그만 아내가 병사하고 말았다. 이웃 동네에 돌림병으로 남편을 잃은 과부 유 씨가 살고 있었는데, 유 씨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 아들을 데리고 박성삼에게 개가했다.

삼 년 만에 딸을 낳았고 사 년 만에 아들을 낳았다. 그러니 소태산은 박성삼의 셋째 아들, 유 씨의 둘째 아들, 합하면 넷째 아들이었다. 씨 다르고, 배도 다른 여섯 자식, 요즘 말로 하면 새로운 ‘가족의 탄생‘, 참으로 민중적인 가계였다.

소태산은 어린 시절부터 그 어떤 비어나 속어도 내뱉지 않았다. 담대하고 침착하며 한번 하기로 한 일은 반드시 실행하는 성미였다. 나이 열다섯 살 되던 해에 인근 마을에 사는 양 씨 처녀와 결혼했다.

‘마름의 아들로 태어나 성자의 위용을 얻기까지 사용한 무대는 오롯이 그의 고향마을 길룡리 안이었다.’ 그의 호 소태산은 ‘솥단지 안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솥에 산’을 한자로 음사한 호를 썼다.

언뜻 생각하면 호가 약간 우스꽝스럽지만, 소태산의 앞 시대를 살다 갔던 또 다른 성자, 증산교 강일순의 호가 ‘증산’ 즉 ‘시루’였던 것을 생각하면, 소태산이라는 그의 호는 뭔가 의미심장해 보인다.

잔치처럼 특별한 날, 떡 할 때 쓰는 시루와 매일 밥 할 때 사용하는 솥. 소태산은 스물여섯이 되던 1916년 4월 28일 아침, 그의 고향 영광 백수 길룡리 노루목에서 ‘일원상’의 진리를 크게 깨쳤다. 그래서 원불교에서는 1916년을 원기 일 년으로 삼는다. 지난 2016년 백 주년 행사를 크게 치른 바 있다.

그는 우주의 이치는 하나이며, 그 이치는 생멸이 없고, 인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대각 후 옛 성현들의 생각을 더 알고 싶었다. 기독교가 무엇인지, 유교, 불교, 도교의, 내용은 무엇인지. 그러다가 만난 경전이 불교의 ‘금강경’이었다.

금강경을 덮으면서 그는 ‘석가모니는 성인 중의 성인이다. 후에 회상을 열면 불법을 주체로 삼겠다’라고 결심했다. 대각 이후 ‘불법연구회(원불교 전신)’를 창건한 후에 종교적 지도자로서 보인 소태산의 행보는 매우 독특하다. 제자들을 모으고, 사람들을 모으고 제일 먼저 한 일이 경제적 자립을 위한 활동이었다.

그의 저축조합 운동은 허례허식 폐지, 미신 타파, 근검절약, 저축, 공동 출역 등의 새생활운동이었는데, 이 운동은 자립의 목적뿐 아니라 주민들의 의식과 생활을 개혁하는 정신교육이었다. 협동조합 운동의 선구자라고 할만하다. 그는 숯 장사, 엿 장사도 했다. 특히 땅 한 뼘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고향의 현실을 깨닫고 간척사업을 시작했다.

‘처녀가 태어나서 쌀 한 말도 못 먹고 시집간다’는 찢어지게 가난한 고향 길룡리에서 방언 조합을 만들어 손수 삽을 들고 등짐을 져 날랐다. 개펄은 서서히 농경지로 바뀌었다. 그는 ‘마음의 본원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신앙의 근본이지만, 생활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항산이면 무항심이라는 걸 깨달은 것일까. 그래서 원불교는 초창기부터 교화, 교육과 함께 자선을 3대 사업으로 정했고, 그는 제자들과 함께 1918년(원기 3년)부터 1년간 갯벌을 막아 3만여 평의 농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간척사업은 정부나 외부의 그 어떤 도움도 없이 오직 조합원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 길룡리는 논을 구경할 수 없었는데 비로소 논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논을 처음엔 구호농장이라 부르다가 후에 ‘정관평’이라고 불렀다. 고요히 들여다보는 땅이란 뜻이다.

제자들과 일만 하고 있었다면 그는 후천개벽의 지도자가 아니라 근대사업가로 불렸을 것이다. 그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노동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도의 수련이 훨씬 중요했다. 이른바 ‘주작야선, 선농일치’였다. ‘세상이 그의 경전’이었다.

이때부터 이름이었던 ‘진섭’, 자였던 ‘처화’를 버리고 ‘중빈’이라는 법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생애는 일제강점기와 거의 겹친다. 일제에 대한 그의 태도가 몹시 궁금했다. 제자들과 나눈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이 답이 될지 모르겠다. 방방곡곡 만세운동이 펼쳐졌을 때 소태산이 한 말이다.

“우리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모였으면 당연히 앞장서야 맞제. 근디 인류를 구제허것다고 맘먹었던 일은 어떻게 헐라는가.” 소태산을 찾아온 안창호도 말했다. “반항도 좋고 투쟁도 좋지만 참으로 민족 대계에는 박 선생 같은 정신운동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1943년, 해방을 2년 앞둔 때, 그는 심장 압박 증세로 이리병원 10호실에 입원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열반에 들었다. 인간적이다. 평범한 우리와 다르지 않다. 일제의 압박이 극심해지던 1943년, ‘조선의 간디’로 추앙받으며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자신 때문에 교단 전체가 수모를 당하리라 예견한 것일까.

일제에 저항하는 대신 스스로 병을 얻어 열반함으로써 일본을 안심시키고 원불교를 ‘황도불교화’의 위험에서 구해낸 것일까. 대부분 제자는 교단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성자의 불가피한 ‘방편’이었다고 생각했다. 일본 경관들의 삼엄한 감시하에 장례 절차가 진행됐다. 그의 나이 쉰셋이었다.

원불교 교리도.
원불교 교리도.

원불교의 교리에 대해 간단하게 공부해 보자. 소태산은 개교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 문명이 발달 됨에 따라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하고, 물질의 세력은 날로 융성하여, 쇠약한 정신을 항복 받아 물질의 지배를 받게 하므로, 모든 사람이 물질의 노예 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생활에 어찌 파란고해(波瀾苦海)가 없으리오. 그러므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 받아, 파란고해의 일체 생령을 광대 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 함이 그 동기니라.”

간단하게 말하면, ‘물질이 개벽 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것이다. 개교 표어이기도 하다. 또한, 과학과 철학 그리고 종교의 역사에서 두 축을 형성해온 것이 ‘유신론’과 ‘유물론’인데, 그는 둘 다 진리가 아니라고 본다. 그는 여러 종교의 경전을 섭렵한 후, 모든 성현이 깨달은 진리는 본래 하나인데, 표현과 진리에 이르는 방법이 다를 수 있다고 봤다. 그는 불법(금강경)의 진리가 가장 크고 원만하니 불법을 바탕으로 완전무결한 큰 종교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원불교 교리의 핵심은 ‘일원(一圓)’ 진리다. ‘일원’은 1916년 소태산이 대각한 후 깨친 바를 상징화한 것이다. 인간과 우주의 근원, 마음과 현상의 관계, 자연의 이치들이 운용되어가는 원리를 ‘하나’의 ‘일(一)’과 텅 빈 허공인 ‘원(圓)’으로 형상화하고, 신앙의 대상이자 수행의 표본으로 삼았다.

‘일원’은 우주의 궁극적 진리이며 원만하고 모자람이 없는 마음을 의미한다. 원불교의 <교리도>에 의하면 핵심 교리는 4, 4, 3, 8, 즉, 신앙의 사은(四恩), 사요(四要)와 수행의 삼학(三學), 팔조다. ‘사은’은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이다.

이 세상 은혜 아닌 게 없다는 것이다. ‘사요’는 ‘자력양성’, ‘타자녀교육’, ‘지자본위(知者本位)’, ‘공도자 숭배(公道者 崇拜)’를, ‘삼학’은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를, ‘팔조’는 지켜야 할 4가지 요소와 버려야 할 4가지로 나뉘는데, 지켜야 할 네 가지 요소는 ‘신(信), 분(忿), 의(疑), 성(誠)’, 버려야 할 네 가지 요소는 ‘불신, 탐욕, 나태함, 어리석음’이다.

원불교의 선 수행은 시, 공간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이다. 불상 없는 곳이 없고, 하는 일이 모두 불공이다. 그래서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이다. 원불교가 추구하는 인간상은 ‘나를 없애고 공익을 위해 성심성의를 다하는, 이웃을 위해 열린 마음으로 일하는 인간’, 즉 ‘무아봉공(無我奉公)’하는 인간이다.

원불교에서도 ‘마음’을 강조하는데 원불교에서의 마음은 ’지성과 감정, 의지‘ 등 세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정신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면 삶은 말 그대로 ‘파란고해(波瀾苦海)’다. 현실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의 ‘원망생활’을 ‘감사 생활’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원불교’라는 교명은 2대 지도자인 정산 송규 종사(1900∼1962)에 의해 1947년 선포됐다. ‘교화, 교육, 자선’ 등 원불교 3대 사업의 방향도 정산 시대에 정했다.

소태산은 ‘물질이 개벽 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개교 표어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후천개벽 사상은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상이었다. 그의 사상을 우리가 사는 대지 위에 ‘글자가 아니라 발바닥으로 써놓고 갔다.’

원불교 역사는 이제 백 년 넘었다. 역사는 비록 길지 않지만 4대 종교로 성장했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부터 원불교 공부를 시작해 보고 싶다.

신현수 시인은 현재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서울문화재단 이사, 비영리민간단체 라오스방갈로초등학교를 돕는모임(방갈모)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원장(직무대행),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집행위원 등으로 일했다. 
신현수 시인은 현재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서울문화재단 이사, 비영리민간단체 라오스방갈로초등학교를 돕는모임(방갈모)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원장(직무대행),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집행위원 등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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