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책으로 세상 읽기 12. 소설 ‘범도’ 방현석 문학동네

소설 ‘범도’ | 방현석 지음 | 문학동네

“일인탐려 일국작란(一人貪戾, 一國作亂)”, 한 사람이 잘못하니 한 나라가 망한다. 4서 중 ‘대학’에 나오는 말이다. 2023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예견이라도 한 것 같다. 불과 일여 년 만에 나라가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시쳇말로 ‘눈떠보니 후진국’. 우리가 그동안 이룬 민주주의의 토대가 이토록 허약한 것이었음을 두 눈으로 목도하고 있다. 목불인견? 참절비절? 언어도단? 그 어떤 말로도 처참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 사회, 문화 등등 나라의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다. 전 대통령 이, 박, 전, 노, 이, 박의 가장 나쁜 구석만 모아 놓은 것보다도 더 못하다. 무도한 자들이 이제 역사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 우리 역사에 대한 이들의 무식과 무지와 왜곡은 하도 어이없어 말이 안 나올 정도다. 그 역사 왜곡 가장 앞자리에 “육사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사태가 있다.

홍범도 장군은 평생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풍찬노숙하며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머나먼 이국땅 카자흐스탄에서 병원 경비, 극장 수위로 일하며 말년을 보냈다. 그렇게 쓸쓸히 생을 마친 분이다. 부인과 두 아들마저 대한 독립의 제단에 바쳐 혈육이 전혀 없는 분이다.

홍 장군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지만 정작 그 ‘독립된 나라’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지난 2021년에서야 대한민국 정부가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유해를 모셔온 분이다. 그런 그를 이 정부는 빨치산이니, 공산주의자니, 자유시 참변에 책임이 있느니 지껄이면서,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장군의 동상을 한사코 들어내려 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우당 이회영 선생의 흉상 앞에 서있다. (출처 육군사관학교 홈페이지)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우당 이회영 선생의 흉상 앞에 서있다. (출처 육군사관학교 홈페이지)

이들이 떠들고 있는 ‘요설’이 얼마나 역사에 무식하고 무지한 일인지 간단하게 살펴보자. 먼저 ‘공산주의자’라는 요설부터 보자. 1946년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일제 식민지 시기 소련 공산당은 한국 독립운동의 우군이었다. 소련에 대한 적대 의식은 냉전 후에 생긴 개념이다. 후대의 평가 기준을 제멋대로 앞으로 소급해 판정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조선말부터 국내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 1908년(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 관군과 일제에 쫓겨 어쩔 수 없이 연해주로 활동무대를 옮긴 홍범도 장군에게 사회주의는 독립운동의 방편일 뿐이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대부분에게 공산주의는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다.

러시아령 한인들이 러시아 내전(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후 혁명파와 왕정파 간 내전) 기간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백군(왕정파) 대신 적군(혁명파) 편에 선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홍범도가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당시 러시아 적군만이 일제에 맞서 함께 싸우고 군수품을 지원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 후 적군은 대한독립군을 내팽개쳤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스탈린은 17만명 이상의 동포들을 연해중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둘째, 자유시 참변의 정확한 ‘팩트’는 무엇인가? 자유시 참변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1921년 6월 소련 극동 공화국 아무르주 자유시에 모인 대한 독립군 중 무장해제를 거부한 대한의용군을 러시아 적군이 무력 진압한 사건”이다.

자유시로 모인 독립군 중 갈등한 주요 두 그룹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였다. 이들은 혁명론과 정치노선에서 차이가 있었는데, 대한의용군 상해파가 민족해방혁명을 주요 과제로 보고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했다면, 고려혁명군 이르쿠츠크파는 즉각적인 사회주의혁명을 주요 과제로 생각했다. 자유시 사태는 고려혁명군이 대한의용군에 대한 무장해제를 결정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자유시 참변의 기본 성격은 독립군 부대들의 대통합 방법을 둘러싼 내분, 즉 ‘독립군 부대 사이의 내분’이었던 것이다. 홍범도는 유혈 사태를 우려했고, 무장해제에 가담하지도 않았다.

셋째, ‘빨치산’은 ‘비정규군’이라는 뜻의 러시아어 ‘파르티잔’을 발음하기 쉽게 우리 식으로 변형시킨 말이다. 즉 비정규전에 종사하는 무장한 게릴라 부대를 가리킨다. 한국에선 공교롭게 ‘빨’은 ‘빨갱이’를 ‘산’은 ‘산 사람’을 연상시키는 무시무시한 말이 됐는데, 원래는 일제강점기 독립군이나 의병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쟁에서 홍범도가 이끈 빨치산 부대 대한독립군은 3·1운동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부대이자 독립전쟁의 주역이었다. 다시 말하면 일제강점기 빨치산은 ‘독립군’이나 ‘의병’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빨치산’이란 말을 ‘공산주의 무장 부대’로 사용한 건 해방 이후다. 홍범도 장군이 현재의 북한 정권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가? 홍범도가 빨치산이었기에 공산주의자였고, 그래서 동상을 들어내려 한다? 이 얼마나 우리 역사에 무식하고 무지한 소행인가?

소설 범도 1권 '포수의 원칙'
소설 범도 1권 '포수의 원칙'

소설 이야기가 너무 늦었다. 책은 작금의 역사 왜곡사태에 맞춰서 일부러 낸 책이 아니다. 육사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사태가 있기 전인 올해 6월에 출간했다. 그 뒤 뜻하지 않게 방현석의 역사소설 <범도>는 현재 세상의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책도 사람처럼 타고난 운명이 있다고 하는데, <범도>는 좋은 운을 타고난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현재 이 소설은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고, 작가 방현석은 국내 곳곳으로 강연을 다니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방현석 작가는 이런 작금의 현실을 마냥 좋아해야 하나, 아니면 슬퍼해야 하나?

소설 내용을 얘기하기 전에 방현석 작가와 개인적인 인연을 잠시 얘기하고 넘어가야겠다. 내가 30여년 전 전교조 인천지부의 부지부장으로 일하면서 대외사업 일을 할 때, 당시 ILO 공대위 회의는 주로 인노협(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민주노총 인천본부 전신) 사무실에서 했는데, 회의 때마다 옆에서 회의내용을 받아 적던, 키가 매우 컸던 조직부장, 방 부장이 있었다. 그가 방현석 작가다.

나는 그때 그가 소설을 쓰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는 자기의 빛나는 시절, 이십 대 중반부터 삼십 대 중반까지를 인천에 살면서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노동운동을 하는 한편으로 소설가로서 걸출한 노동소설들을 계속 발표했다. 그의 출세작 <새벽 출정>, <내일을 여는 집>은 주안 가톨릭 노동사목 등 모두 인천을 무대로 한 소설이다.

그는 노동운동가에서 유명한 소설가가 됐고, 현재는 모교 문예창장과 교수가 됐다. 나와는 작가회의에서 다시 만나 함께 일했고, 얼마 전에는 내가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단체에 초청해 강연을 듣기도 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삶의 구비에서 이렇게도 만나고 저렇게도 만난다. 만났다 헤어지기도 하고 다시 만나기도 한다. 다시 만나 불편하지 않으려면, 아무튼 잘 살아야 한다.

'범도'는 일제 강점 시기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운 홍범도 장군과 그 주변 인물들을 그린 역사소설이다. 사료가 부족할 때 우리는 소설가의 탁월한 상상력을 빌려 한 시대를 유추한다. 그래서 잘 쓴 역사소설은 매우 훌륭한 역사 교과서이기도 하다.

<범도>는 방 작가가 13년 전 소설 쓰기를 결심했고, 지난 10년 동안 시간과 땀을 갈아 넣은 소설이다. 하루에 50매 이상 쓰지 않고는 외출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0여년의 정진 후 두꺼운 ‘벽돌 책’ 두 권 분량의 소설을 우리 앞에 내놓은 것이다.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면서 동시에 홍범도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소설이기도 하며, 또한 독립전쟁을 그린 전쟁소설이기도 하지만, 리더십 교본이기도 하다. 홍범도는 탁월한 리더였다. 그는 늘 싸움에 앞장섰다. 능력이 출중해 많은 성과를 냈지만, 그가 이룬 공은 모두 부하들에게 돌리는 리더였다. 그는 남의 핑계를 대지 않았다. 그는 늘 낮은 곳에 서 있었다.

홍범도 장군은 누구인가? 신돌석 장군과 함께 평민 출신 의병장. 일본군 30여명을 사살한 후치령 전투 이후 1년 남짓 60여 차례의 교전을 벌이면서 단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전설’, ‘하늘을 나는 홍범도’라고 하여 일본군조차 경외한 인물, 홍범도. 소설 <범도>와 역사 사전 등을 참고로 하여 그의 삶을 천천히 따라가 보자.

소설 범도 2권 '봉오동의 그들'
소설 범도 2권 '봉오동의 그들'

그는 1868년 평양 부근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머슴이었다고도 하지만 농사꾼과 머슴의 경계가 모호한 시절이었다. 태어난 지 칠 일 만에 어머니를 잃고, 아홉 살 되던 해에 아버지까지 돌아가셨다. 천애 고아였던 셈이다. 머슴살이 등을 전전하다가 15살이 되던 1883년, 나이를 두 살 속이고 평양 감영 소속 부대의 나팔수(코코수)로 입대했다.

10대 시절의 절반을 산에서 사냥하며 보냈던 그는 함께 다니던 신 포수에게 포수가 될 만한 인재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 산 아래로 내려와 입대를 결정한 것이다. 심사에서 탈락해 무관으로 입대하지는 못했지만, 나팔수로 시작해 끝내는 총을 쓸 수 있게 됐다.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자신이 싸워야 할 상대가 일본군도 청군도 아닌 민란을 일으킨 백성임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탈영했다.

다른 이의 눈을 피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종이제작 공장 조지서로 들어갔다. 하지만 거기서도 폭력적인 사장을 응징하고 나왔고, 다시 들어간 금광 공장에서도 역시 무도한 공장주를 응징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외금강 신계사에서 지담을 상좌로 중이 되었지만, 비구니였던 이 씨를 만나 환속했다.

첫 번째 부인 이 씨의 처가가 있는 북청으로 향했으나 가던 길에 건달패들을 만나 부인과 이별했다. 이 씨가 죽은 줄 알고 떠돌이 생활을 하다 강원도에서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농사지어 번 돈으로 총을 마련하고 강원도 북부와 함경도에서 포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포수로 살아가면서 아울러 사격술과 검술도 익혔다. 1907년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동지들과 함께 산포대를 조직한 뒤 곳곳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포수들을 모아 만든 홍범도 부대는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다. 홍범도 부대는 신출귀몰하는 전술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는데, 백발백중 포수들로 이루어진 부대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1910년 우리 강토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짓밟히자 많지 않은 부하들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그가 이끈 1920년 6월 봉오동전투는 독립전쟁 운동 역사상 최초로 승리한 전투였다.

그는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두만강을 넘어온 일본군 제19사단을 궤멸시켰다. 봉오동전투 장면은 영화 ‘봉오동전투’에 잘 묘사돼 있는데, 독립군 1개 분대 규모의 이화일 부대가 토벌대를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해 섬멸한다. 영화에서는 배우 류준열이 이화일 분대장을 역할을 했다. 일본군은 전투 3시간여 만에 사망자 157명을 포함해 사상자 500여명을 남기고 패퇴했다.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첫 대승이었다. 후에 청산리대첩에도 홍범도는 제1연대장으로 김좌진 장군과 함께 참가했다. 그 후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부총재가 됐으며,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소설 ‘범도’는 홍범도가 만주와 연해주를 떠돌고, 이후에 돌아와 대한독립군을 창설해 봉오동에서 싸우고, 북로군정서(서일 총재, 김좌진 사령관), 서로군정서(지청천 장군) 등과 연합해 청산리에서 싸우는 순간까지를 그리고 있다.

'총알로 바늘귀도 뚫는 장군', '축지법을 구사하는 신출귀몰한 명장', '백두산 호랑이' 등의 별칭으로 추앙받았던 홍범도 장군,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독립군은 무장해제 됐다. 다른 동료들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거나 다른 지방으로 흩어졌지만, 돌아갈 곳도 가족도 없던 홍범도는 결국 러시아에 남아 소련 시민으로 사는 삶을 시작해야만 했다.

이때 두 번째 부인 이인복과 재혼했다. 홍범도의 소련 입국신고서에 '직업 : 의병‘, '목적과 희망 : 고려독립’이라고 썼다. 홍범도 장군은 연해주에서 농사를 짓던 1927년 59세에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함께 강제 이주 된 동포들의 대표 역할을 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 된 카자흐스탄에서 홍범도는 조국 광복을 이 년 앞둔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대한민국 정부는 홍범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의 공을 기리기 위해 박정희 정권 때인 1962년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1994년 김영삼 정부부터 추진해온 카자흐스탄에서 유해 봉환은 문재인 정부 때인 2021년에 비로소 성사됐다.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 묘역에 안장됐다.

소설에서 그의 말년은 에필로그 형식으로 짧게 그려지고 있다. 죽음을 예감한 그는 1943년 10월 가진 돈을 털어 동지들을 대접한 후 10월 25일 “최후의 한 사람까지 조국 독립이라는 소지 관철에 분투함으로써, 우리 독립을 최후까지 외치다가 죽은 후에야 그쳐야 한다”라던 각오를 뒤로 하고 마침내 눈을 감았다.

여기까지 보면 ‘범도’는 역사소설이요 전쟁소설 같지만, 이 소설은 또한 곳곳에 셀 수 없는 잠언이 등장하는 잠언집이기도 하다. 홍범도 장군이 직접 한 말도 있고, 범도의 입을 빌려서 작가가 창조한, 전쟁과 민족과 삶과 사랑에 대한 사무치는 구절이 곳곳에 등장한다.

“우리는 낫과 죽창을 들고 일어났던 농민군과 다르오. 하인을 데리고 다니며 행세하던 양반들의 의병과도 전혀 다르오. 가진 총알의 숫자만큼 적을 잡는 것이 바로 우리 포수들이오.”, “사람이 하는 행동이란 마치 날아가는 탄환과 같은 것일세. 탄환이 가던 방향을 바꾸어 날아가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사람의 행동도 그런 것이네. 지금까지 그가 해온 행동이 그가 앞으로 할 행동이네.”, “제가 적의 수괴 한 두를 잡는다고 해서, 장군님께서 일본군 수백, 수천 두를 잡는다고 해서 물러날 일본이 아니겠지요. 그걸 몰라서 우리가 지금까지 싸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싸우면 어떻게 되는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아무도 싸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아니까 싸우는 것이지요.”,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은 몸이 너무 높기 때문이오. 기어서라도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날아서 가려고만 하니 발밑에 놓인 길이 보이겠소? 짐승의 높이로 낮아지면 길은 어디에나 있소.”, “내가 어느 편이냐고? 일본군과 싸우는 편이 내 편이오.”, "승리한 하루의 힘으로 남은 모든 날의 패배에 맞섰다.", "너희들의 원수를 열 배로 갚지 않고는 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가지 않는 겨울은 없고, 오지 않는 봄도 없다.", "나는 무식하지만 한 가지만은 똑똑히 안다. 내 땅을 남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독립으로 가는 길은 직선이 아니다.", "우리가 그냥 죽지 않는다.", “남 탓하는 사람을 믿지 마라. 남 욕하기 좋아하는 자를 멀리해라. 대체로 남 탓하고 남 욕하는 자들이 더 나쁘다.”, “남의 근력이 아무리 세면 뭐 하오. 남의 근력이 내 근력이 되는 걸 보았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우리의 힘이오.”, “잘 들었소? 우리는 일본과 싸우면 되는 것이오. 로씨아가 조선 독립을 위해 싸워주오? 아니면 아미리가가 조선 독립을 위해 싸워주오? 없는 차이를 만들지 마시오.” 등등.

또한 이 소설은 일제와 벌인 독립군들의 전쟁 이야기, 무겁고 부담스러운 장면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소설이란 픽션이다. 작가가 창조해낸 대표적인 인물이 백무아다. “역사소설은 실제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허구”라고 움베르토 에코가 말했지만, 어쨌든 소설의 본령은 허구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백무아는 여성 독립운동가 안경신과 엘리스 현을 모델로 삼아 창조한 인물이라고 한다. 백무아가 미국으로 떠나며 홍범도에게 남긴 편지를 보면 이 소설은 절절한 연애소설이기도 하다.

“이제 내게 상처만 안겨준 조선을 떠납니다. 내가 닿게 될 곳이 지옥이라 해도 주저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여자에게, 양반이 아닌 여자에게 여기보다 더한 지옥이 있다면, 그 지옥이 어떻게 생긴 곳인지 한번 보고 싶습니다. 내가 만난 짐승들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잘 때도 육혈포를 품에 지니고 있으라는 당신의 말을 지키지 않은 것은 내 잘못입니다. 정절 따위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놈들에게서 풀려났을 때 사람들이 하나같이 궁금해 하고 걱정한 것은 짓밟힌 내 자존심이 아니라 정절이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 눈이 파란 전도사 월리엄만이 무너진 내 자존심을 위해 울어주었습니다. 나는 그를 믿고, 그를 따라 망망대해를 건너가기로 했습니다. 미안해요. 하지만 내가 조선에서 믿었던 유일한 남자는 당신이었습니다. 나는 떠나지만, 그래도 부탁합니다. 당신만은 조선의 여자 누구에게도 조선의 남자가 되지 마십시오. 강자의 종이 아닌 약자의 벗으로 사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내 심장이 멈추는 순간까지 당신은 내 심장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부디, 당신이 양반과 침략자, 남자의 편에 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현 오빠가 당신을 내게 남겨주고 가서 행복하고 고마웠습니다. -WFR, WFJ 백무아. * 이제 떠나야 할 시각입니다. 조선에서 내가 지켜야 할 것은, 당신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에 육혈포는 당신에게 남기고 떠납니다." - '범도' 200~201쪽 중에서

백무아는 여성 독립운동가 안경신과 엘리스 현을 모델로 삼아 작가가 창조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들의 이름조차 낯설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 바친 독립운동가에 대한 푸대접은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가면 잘 알 수 있다.

이 소설 2권 맨 뒤에 실린 ‘쓰지 못한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우리가 홍범도 장군 이상으로 기억하고 기려야 할 인물들이다. 최재형, 김 알렉산드라, 이상룡과 그의 아들 이준형, 리범진과 그의 아들 이위종,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와 창동학교, 전홍섭, 최진동-최운산-최치흥 삼형제와 최운산의 아내 김성녀와 그의 아들 최봉우, 박서양, 황병길, 김숙경 등등.

이들이 목숨 바쳐 싸워 이룬 독립된 조국, 그 조국에서 2023년 현재 벌어지고 있는 꼴, 이 꼴을 보고 있는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선열은 지하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얼마나 탄식하고 계실까? 얼마나 통탄하실까? 방현석 작가가 이 긴 소설 맨 뒤에 쓴 작가의 말처럼 ‘범도들’이 쏜 "마지막 한 발의 탄환은 아직 탄착점에 도착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신현수 시인은 현재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비영리민간단체 라오스방갈로초등학교를 돕는모임(방갈모)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원장(직무대행),  서울문화재단 이사, 인천문화재단 이사 등으로 일했다.  
신현수 시인은 현재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비영리민간단체 라오스방갈로초등학교를 돕는모임(방갈모)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원장(직무대행),  서울문화재단 이사, 인천문화재단 이사 등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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