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책으로 세상 읽기 14. 철종의 눈물을 씻다:강화도령 이원범의 삶과 그의 시대사

철종의 눈물을 씻다:강화도령 이원범의 삶과 그의 시대사|이경수 지음|디자인센터 산

‘역사적 진실’과 전혀 다르게 세상에 알려진 ‘역사적 인물’은 한둘이 아니다. 특히 소위 ‘팩션’은 재미와 시청률을 위해 역사적 사실을 과장하거나 왜곡하기 일쑤다. 그래서 형편없는 인물이 떠받들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정당한 이유 없이 억울하게 욕을 먹거나 무시당하기도 한다. 이른바 ‘팩션의 그늘’이다.

실체와 다르게 역사에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조선 철종 임금이다. 역사적 실체와 드라마 등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강화도령’, ‘원범이’ 등이 철종 이미지들이다.

원범이 농사를 짓고 살았다거나, 일자무식 나무꾼이라거나, 글을 전혀 모르는 까막눈이라거나, 한양에서 자신을 데리러 왔을 때 자기를 죽이러 오는 줄 알고 도망쳤다거나, 동네 처녀 양순이와 사랑을 나눴다거나, 즉위해서 첫사랑 양순이만 그리워했다거나, 자식을 낳지 못했다거나, 주색잡기를 즐겼다거나, 여색을 밝히다가 일찍 죽었다거나 등등, 우리가 알고 있는, 또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철종에 관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사실이 아니거나 최소한 너무 과장됐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는 철종에 대한 이미지는 역사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드라마, 영화 등 대중매체의 왜곡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목표는 책의 제목처럼 철종의 억울함을, 그의 눈물을 철저히 사서에 근거해서 씻어주겠다는 것이다.

철종에 대한 이미지가 드라마, 영화 등의 왜곡 때문이라면 어떤 드라마와 영화 때문에 그렇게 왜곡 됐는지, 진실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이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하는 이유다.

결론부터 말하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 당대의 사서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철종은 우리 역사에 대단한 업적을 남긴 왕은 아닐지라도, 못난 임금은 아니다. 그는 정통성도 약하고 권력 기반도 취약한 환경 속에서 최소한 안동 김씨 등이 전횡을 일삼은 세도정치에 맞서기 위해 노력했고, 조선 국왕 중 ‘백성 체험’을 해본 거의 유일한 왕으로서, 탐관오리들에게 고통 받던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애쓴 애민군주였다는 것이다. 철종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지, 작가의 안내를 받아 책 안으로 들어가 보자.

이경수 저 | 철종의 눈물을 씻다 | 출판 기획세상 산
이경수 저 | 철종의 눈물을 씻다 | 출판 기획세상 산

철종은 조선 제25대 임금이다. 1831년 한양에서 나서 한양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은언군 이인, 아버지는 은언군의 셋째 아들 이광, 어머니는 염 씨다. 묘호는 철종이고, 이름은 ‘원범’이었으나 왕이 된 후 항렬자를 맞추기 위해 ‘변’으로 개명했다.

할아버지 은언군 이인은 사도세자와 숙빈 임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니 영조의 손자이고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은언군은 1786년부터 1801년까지 16년간 강화에서 유배 살다가 48세에 사약을 받았다.

두 살 때 은언군과 함께 유배된 철종의 아버지 이광은 그 후로도 계속 유배를 살다가 1822년, 38세가 돼서야 겨우 풀려났다. 무려 37년간 계속된 귀양살이였다.

풀려난 이광은 한양으로 갔다. 1831년에 뒤늦게 원범을 낳았다. 이광은 57세인 1841년에 사망했다. 아버지 이광이 세상을 떠난 지 3년 만에 원범 역시 역모에 연좌돼 강화에 다시 유배됐다. 원범의 이복형 이원경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 사건이었다.

이원경은 죽임을 당했고, 원범은 강화로 유배됐다, 1844년 원범은 14세였다. 내리 삼 대가 강화로 유배된 것이다. 철종은 어떻게 죄인의 신분에서 느닷없이 왕이 되었나?

철종은 순원왕후가 골랐다. 순원왕후는 제23대 순조의 왕비로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이다.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영특한 효명세자가 태어났으나 일찍 죽었다.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순조 다음 즉위했지만, 1849년 헌종도 후사 없이 죽었다. 순원왕후는 영조의 남은 핏줄은 원범뿐이라며, 이광의 아들 원범을 찾아내 철종으로 왕위를 잇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정을 했던 것이다.

저우산박물관에 출품된 철종 군복본 어진과 어의(사진제공 강화군)
저우산박물관에 출품된 철종 군복본 어진과 어의(사진제공 강화군)

철종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철종이 일자무식이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철종의 출생지는 한양이었다. 역모에 연루돼 몰락했으나 어쨌든 왕족의 피붙이였다. 천자문 등의 기초교육은 당연히 받았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철종이 4세에 천자문을 이미 배웠다고 나온다. 4세가 약간 과장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천자문 정도는 이미 배웠다. 즉위 이후 공부를 계속하기 위한 신하들과 자리에서 ‘근년에 통감 2권과 소학 1권, 2권을 읽었다’라고 철종이 직접 말하기도 했다.

철종이 유배당한 것은 1844년 (헌종 10년) 14세 때였다. 열아홉 살 되던 해인 1849년에 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실제로 강화도에서 산 기간은 14살부터 19살까지 5년 정도밖에 안 된다.

원범은 이복형의 역모 사건으로 유배 중인 죄인이었다. 원범의 정체성은 귀양살이하던 죄인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원범은 농부가 될 수 없다. 농사를 지을 수도, 나무를 해 장에 가서 팔수도 없었다. 드라마 속 원범의 여성들도 전혀 가능하지 않은 허구다, ‘봉이’이건, ‘복녀’이건, ‘양순이’이건, 현실에서는 전혀 가능하지 않은 인물이다.

영화 ‘강화도령’에서는 복녀가 나뭇짐 지고 내려오는 원범에게 달려가 ‘한양서 도련님 잡으러 왔으니 어서 도망가라’라고 말한다. 원범은 지게를 내려놓고 산 위로 도망간다. 이 역시 모두 허구다. 원범의 나이 열아홉 살, 도망간다고 해서 결국 붙잡힐 걸 아는 나이다. 할아버지도, 이복형도 죽었다. 언제든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나이다.

도망이라니, 아무리 허구라고 해도 너무 졸렬하다. 설령 원범이 나무꾼, 농사꾼이었다고 해도 그게 철종이 무능했다는 말로 치환돼서는 안 된다. 산에 올라가 땔감이나 하던, 농사짓던 사람은 나라를 다스릴 수 없나?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의 말에 따르면 철종은 수라상의 값비싼 음식을 밀어냈다. 옷의 사치도 경계했다. 평상복은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철종은 즉위 초부터 병을 달고 살았다. 주색에 빠질 몸 상태가 아니었다. 당연히 다른 왕들에 비해 출신 성분 등에 스트레스는 많았을 것이다. 철종이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은 주색에 빠져서가 아니라 병약한 몸과 심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그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다.

강화군 강화읍에 소재한 조선 25대 임금 철종 잠저 용흥궁 일원 전경.
강화군 강화읍에 소재한 조선 25대 임금 철종 잠저 용흥궁 일원 전경.

‘주색에 빠져 살았고 정치에 무관심하고, 무능력했으며 안동 김씨 권세에 눌려 술이나 마시고 소일했다’라는 철종의 이미지가 드라마의 왜곡 때문이라면 철종을 그렇게 그린 최초의 드라마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그 드라마는 바로 신봉승의 ‘임금님의 첫사랑’이었다. 그 드라마 이후 어수룩한 철종의 이미지가 널리 퍼졌고, 사람들은 그걸 역사적 사실로 믿었다. 나라가 기운 책임을 개인한테 떠넘기고 싶어서였을까? 신 작가는 2010년에 인터뷰를 통해서 사과했지만, 철종에게 한번 씌워진 왜곡된 이미지는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아무리 작가라고 해도 드라마를, 특히 사극을 제멋대로 쓰지는 않는다. 당연히 역사 공부부터 하고 꼼꼼하게 답사도 한다. 작가들이 공부한 책은 무엇인가? 왜곡된 기억의 시작은 1886년 박세형이 쓴 <근세조선정감>이다. 후에 많은 사람이 이 책을 끌어다 쓰면서 오류가 반복되고 확산했다.

철종에게 아들이 없어 이하응의 아들이 즉위해 고종이 된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철종은 아들이 없고, 심지어 주색잡기에 빠져 자식을 가질 수 없다는 악의적인 말도 떠돈다. 하지만 모두 허구다. 철종은 자식을 11명이나 두었다. 아들 다섯에, 딸 여섯, 그러나 딸 하나만 남고 모두 일찍 죽었다. 철종은 참척의 고통을 열 번이나 겪었던,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던 ‘아버지’였다.

책의 주제와는 약간 먼 얘기지만, 이 책에서 알게 된 역사적 사실 몇 가지들을 더 살펴보자.

세종은 왕비 소헌왕후릉을 조성할 때 동원된 백성의 고단함을 걱정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1만5000명을 사역 시켜 죽은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되고, 지금은 병든 사람도 또한 적지 않으나, 사망자가 더욱 많아질 것을 어찌 알겠는가.” 왕릉 하나 만드는데 1만5000명을 동원했고, 공사 중 사망한 백성이 백여 명이나 됐다는 것이다. 왕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죽은’ 왕의 무덤 조성을 위해 동원됐던 수많은 ‘산’ 백성들이 죽어갔다.

일찍이 조선의 과거제도의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 의병장이었던 조헌은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갑을병정'도 알지 못하는 이가 급제한 어이없는 현실을 비판하기도 했는데, 임진왜란 이후에는 시험장에 책을 가지고 들어갔고, 옆에서 시중들 사람들도 동행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동행인이 응시자의 답안을 대신 써주기도 했고, 이름을 바꿔 답안지를 제출하기도 했다. 끼리끼리 모여 의논해가며 답안을 작성하기도 했고, 이런 행위가 사실상 묵인되었다.

과거를 진행하는 실무 관료들의 부정도 만만치 않았다. 뇌물을 받고 시험문제를 미리 알려주거나, 특정 응시자의 답안지에 표식을 하게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어떤 과거시험은 시험 당일 합격자를 발표하기도 했다. 응시생들의 답안지가 1만장이 넘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단 몇 시간 안에, 합격자 몇 명을 뽑았다.

이렇게 부정한 방법으로 벼슬자리에 오른 자들이 펼칠 정사는 불문가지다. “시험을 주관하는 이가 사사로이 이익을 탐하여 공정함을 잊는다면, 이는 신하의 도리가 아니요, 사람이 할 짓도 아니다. 각별히 유념하여 내가 벌을 내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과거를 보는 이유는 신하가 되어 임금을 섬기려는 것인데, 염치를 버리고 부정을 하면 이는 임금을 기만하는 짓이다. 내 많이 말하지 않겠으니, 각기 잘 알도록 하라.” 이런 사실을 알고 있던 철종도 당부했지만,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청렴한 지방관이 오히려 괴짜 취급받는 세상이었다.

“임금은 재위 기간에 이룬 업적도 중요하지만, 진정으로 백성과 나라를 사랑했느냐 하는 것도 업적 못지않게 중요하다. 철종은 시대 상황과 능력의 한계 때문에 두드러진 업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철종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형이 모두 역모에 몰려 사약 받고 죽었거나, 평생을 귀양살이했던 비운의 인물이고, 한 많은 인물이다. 강화는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자신까지 무려 3대를 귀양살이했던 한 많은 곳이다.

비록 19세에 얼떨결에 왕이 되기는 했지만, 34세의 이른 나이로 죽을 때까지 15년 동안 그래도 잘해보려고 애쓴 임금이다. 그런 인물에게 나무꾼이니, 농사꾼이니, 일자무식이니, 양순이와의 연애니, 주색에 빠져 죽었느니, 등등의 올가미를 씌우는 건 가당치 않다.

철종이 성군은 아니었을지언정, 드라마와 영화 몇 편 때문에 뒤집어쓰고 있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억울한 누명만큼은 벗겨주어야 한다. 그래서 철종의 눈물을 씻겨주어야 한다. 이 책의 제목처럼.

신현수 시인은 현재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비영리민간단체 라오스방갈로초등학교를 돕는모임(방갈모)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원장(직무대행), 서울문화재단 이사, 인천문화재단 이사 등으로 일했다.
신현수 시인은 현재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비영리민간단체 라오스방갈로초등학교를 돕는모임(방갈모)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원장(직무대행), 서울문화재단 이사, 인천문화재단 이사 등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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