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조선인 이야기] 5. 조선인 학교 설립과 반일민족교육

인천투데이=조신옥 시민기자 | 

조선인이 설립한 학교는 전부 반일민족교육기관이었다

조선인은 예로부터 교육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었다. 가난과 굶주림에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중국 내에서도 조선인 마을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서당이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중국으로 이주한 애국지사들은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로 잡을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반일민족교육을 시작했다. 1914년 통계에 따르면 연길현(延吉縣, 현 용정시)에만 116개에 달하는 조선인 서당이 있었다.

대한제국 고종이 헤이그에 파견한 특사. 사진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출처 공훈전자사료관).
대한제국 고종이 헤이그에 파견한 특사. 사진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출처 공훈전자사료관).

1906년 애국지사 이상설(李相卨) 선생이 사비를 털어 용정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웠다. 서전서숙은 중국 내 조선인 근대교육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서전서숙의 교육목표는 반일민족주의자 양성과 과학기술교육 인재 양성에 있었다.

1906년 12월 이상설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1907년)에 대한제국 고종의 특사로 파견된 사실이 알려지자 서전서숙은 일제에 의해 폐쇄되었다. 김학연, 박정서 등 서전서숙의 일부 교사와 학생들은 용정 부근 명동촌으로 옮겨갔다.

당시 명동촌에는 1901년 4월에 김약연이 세운 규암재(奎岩齋), 김하규가 세운 소암재, 남도천이 세운 오룡재 등 서당 3개가 있었다.

대한제국 고종의 헤이그특사 이상설이 만주에 설립한 서전서숙(사진 출처 공훈전자사료관)
대한제국 고종의 헤이그특사 이상설이 만주에 설립한 서전서숙(사진 출처 공훈전자사료관)

이상설 선생의 서전서숙은 명동서숙에서 명동학교로 계승

조선인 사회에서 명망이 높았던 김약연(金躍淵)은 신민회 회원이며 북간도 교육단을 이끌고 방문한 정재면(鄭載冕)을 교사로 초빙했다. 정재면은 성경을 가르치고 마을 사람들이 매일 예배를 보게 한다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이렇게 명동촌은 신문화와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1908년 4월 27일 여러 서숙을 통합해 장재촌에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고 김약연이 초대 숙장에 취임했다. 김약연이 직접 지은 학교 이름 명동서숙은 ‘동국을 밝힐 인재를 기른다’라는 뜻이다. 명동서숙은 서전서숙을 계승한 근대교육 기관이었다. 이듬해 서숙은 명동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명동학교가 설립된 같은 시기 북간도에 여러 서숙이 설립됐다. 대표적인 예로 지금의 연변대학 북쪽에 1907년 창동서숙(昌東書塾)이 설립됐다. 또한 1908년 두만강 북안 개산툰(開山屯)에 정동서숙(正東書塾)이 들어섰다. 소영자(小營子)에는 1907년 길동서숙(吉東書塾)이 설립됐다. 이후 서숙들은 근대교육과 함께 명칭을 학교로 바꾸었다.

1907년부터 1927년까지 북간도에 설립된 주요 반일 사립학교들로 창동학교·명동학교·광성학교(光成學校)·정동학교(正東學校)·영신학교(永信學校)·은진학교(恩眞學校)·동흥중학교(東興中學)·대성중학교(大成中學) 등이 있었다.

항일독립운동가 김약연 지사(흰옷)와 명동학교 졸업식 사진(출처 공훈전자사료관)
항일독립운동가 김약연 지사(흰옷)와 명동학교 졸업식 사진(출처 공훈전자사료관)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패한 일제 간도참변 일으켜 조선인 학살

일제는 1907년 간도임시파출소를 설립한 이후 서전서숙을 폐교시켰다. 이후 그 자리를 매입해 간도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그 주변에 친일 세력을 포진시켰다.

국자가(局子街)·백초구(百草溝)·훈춘(琿春)·두도구(頭道溝) 등 일본영사관 분관이 설립된 곳에 간도보통학교 분교를 설립하며 자기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대부분 조선인이 자녀를 일본학교에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1910년대까지 교육계에 일제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지 못했다.

조선인 학교는 모두 철저한 반일민족교육기관이었다. 일제는 기회를 노려 눈엣가시처럼 싫어하던 조선인 학교를 모두 없애버리려고 했다. 1920년 10월 일제는 한 달 남짓 간도에서 지속한 조선인을 상대로 벌인 경신년 대토벌 때 북간도에서만 25개에 달하는 조선인 학교를 불태워버렸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항일독립운동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으로 발전했다. 일제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패하자 만주에서 조선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 경신참변 혹은 간도참변으로 불리는 일제의 대표적인 학살 만행 사건이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항일독립운동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으로 발전했다. 일제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패하자 만주에서 조선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 경신참변 혹은 간도참변으로 불리는 일제의 대표적인 학살 만행 사건이다.

경신년 대토벌이란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와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에 패한 일제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으킨 간도참변(경신참변)이다. 당시 일본군은 조선인 마을을 전부 불태우고, 산자를 전부 죽이고 모조리 빼앗는 잔인한 학살을 감행했다.

당시 북간도 지역 훈춘·연길·화룡·왕청 등 현 4개에서만 일본군은 조선인 3500여명을 살해하고 5058명을 체포했다. 또 가옥 2500여채와 학교 30여개를 불태웠다. 이외에도 동녕현 등 현 5곳에서 불에 탄 가옥이 279채, 폐허가 된 학교가 4개였다.

임시정부 총리 이동휘 설립 북일학교도 간도참변에 스러져

훈춘시 대황구(大荒溝) 항일 유격근거지에 북일(北一)학교 유적이 있다. 대한제국 강화유수부 사령관 출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가 설립한 북일학교는 반일세력을 양성하는 학교였다.

북일학교는 1917년에 설립돼 1920년까지 3년간 운영했다. 학교 설립 초기 용정·조선·연해주 등 다양한 지역에서 모인 학생 20명이 있었는데 나중에 40명으로 늘어났다.

대황구 항일유격근거지 유적( 출처 바이두)
대황구 항일유격근거지 유적( 출처 바이두)

호시탐탐 북일학교를 없앨 기회를 노리던 일제는 경신년학살(간도참변) 때 군대를 보내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누가 북일학교 책임자냐고 물었다. 이때 김남극 교장이 선뜻 나서 자기가 책임자이니 무고한 사람들을 놓아주라고 했다.

일본군은 마을 사람들을 놓아주고 현장에서 김남극(金南極) 교장과 량선생(선생의 성이 량으로만 전해짐)을 총살했다. 해방 이후 한 농민이 산에서 일하다가 우연히 비석을 발견하고 연변대학에 알렸다. 이후 정판룡 교수가 답사할 때 항일지사 ‘김남극지묘’라는 비문을 확인했다.

길림성 통화현 파랍북촌(通化顯 巴拉北村)엔 조선인 반일학교가 있었다. 경신년 대학살 때 일본 경찰이 이 학교 김기선(金基善) 선생 등 교사 7명을 체포해 통화영사관 경찰서로 압송해 가던 도중 환신령(欢心岭)에서 전부 총살했다.

중국 한족 주민이 길을 지나다가 이들의 시체를 발견하고 조선인 마을에 알려 마을 사람들이 마차와 소달구지를 몰고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하였다.

복원된 명동학교(출처  바이두)
복원된 명동학교(출처 바이두)

간도참변 때 폐허 된 조선인학교 조선인 성금으로 전부 복구

경신년 간도참변 때 일제에 의해 소각된 학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현지 조선인들의 성금으로 전부 복구됐다.

창동학교를 복구할 때는 가난한 마을 사람들이 성금을 낼 여력이 없자 집집마다 계란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때문에 창동학교는 계란을 모아 지은 학교라는 뜻에서 ‘달걀 학교’라고도 불렸다.

1920년 명동학교도 일제에 의해 소각된 이후 마을 사람들의 노력으로 1923년에 복구됐다. 해방 이후에도 명동학교는 민족교육기관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중국 지린성 용정시정부는 2011년부터 명동촌을 조선족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명소로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해 2014년 명동학교를 옛 모습으로 복원했다. 또한 2012년 8월부터 명동교회와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복원해 관광명소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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