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조선인 이야기] ④ 해외 최대규모 3·13 용정 반일 만세운동

인천투데이=조신옥 시민기자 | 

북간도 독립운동가들 국내와 연대하는 만세운동 준비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약 4km 떨어진 곳 합성리(合成利)에 순국한 항일열사를 모신 3·13 반일의사릉이 있다. 이곳은 용정시인민정부가 지정한 중점문물 보호 대상이며 홍색관광지로 연변지역의 애국주의 교육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날 때 만주에선 북간도 용정을 중심으로 3.13 반일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이는 중국에 이주한 조선인들이 처음으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제에 저항한 해외 최대 규모의 비폭력 독립운동이었다.

당시 북간도 독립운동가들은 만세운동을 준비할 때 해외에 있는 한민족과 연합하고 국내와 연대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내 용정 3.13반일만세운동에 참가한 열사를 모신 3.13반일의사능(출처 바이두)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내 용정 3.13반일만세운동에 참가한 열사를 모신 3.13반일의사능(출처 바이두)

1919년 1월 기독교 대전도회를 명분으로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국내 지역과 해외지역이 연대하자는 결의를 다지고 당시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김약연 선생을 연해주에 파견하고 강봉우 선생을 함흥에 파견했다.

김약연 선생은 독립선언서에 담을 내용과 해외에서 선포할 방법 등을 논의하고 돌아왔다. 강봉우 선생은 함흥에 있는 영생학교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펼칠 것을 계획하고, 그 이후 연대 활동을 어떻게 펼칠 것인지 논의하고 돌아왔다.

1919년 2월 독립운동가들은 연길현(지금의 용정시)에 있는 박동원의 집에 모여 만세운동 계획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북간도 지역에 있는 기독교·천주교·대종교·공교회 등 모든 단체가 참여하고 용정을 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원칙도 세웠다. 그 이유는 한반도와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거점으로 간도 일본총영사관이 용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용정에는 북간도 지역에서 이상설 지사가 최초로 설립한 민족교육기관 서전서숙이 있었다. 일제시기에 은진중학·명신여고·동흥중학·영신중학(광명중학)·대성중학·광명여고 등 명문학교 6개가 있었다.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 학생들은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했다. 용정지역에 있던 명동학교·국자가도립학교·광성학교·정동중학교의 대표 5명이 모여 만세운동에 참여할 방법을 논의했다. 이들은 각 학교에서 독립을 쟁취해야 하는 당위성을 주장하는 연설회를 개최하면서 학생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내 용정 3.13반일의사능(출처 바이두)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내 용정 3.13반일의사능(출처 바이두)

용정 3·13 반일운동은 3·1만세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비폭력 독립운동

그러던 중 3월 7일 한반도 국내에서 이미 3·1만세운동이 벌어졌다는 소식과 함께 독립선언서가 전달됐다. 국내와 국외가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운동을 벌이자던 애초 계획은 어긋났다. 그래서 북간도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북간도 독립운동가들은 은진중학교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를 복사했다. 거사일인 3월 13일 낮 12시에 서전대야 들판에서 거행하는 만세운동에 모이라는 통지서를 찍어 산간벽지 조선인들에게도 전달했다. 이렇게 소식을 접한 조선인 중 용정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대회 전날에 용정으로 출발하기도 했다.

3월 13일 용정에서 약 32km 떨어진 정동중학교 학생들과 12km 정도 떨어진 명동학교 학생들은 이른 아침 악대를 앞세워 출발했다. 용정의 은진중학교·대성중학교·동흥중학교 학생들도 속속 서전대야로 모여들었다.

이렇게 약 2~3만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모인 대회장에 ‘대한독립(大韓獨立)’, ‘정의인도(正義人道)’라는 깃발이 나부끼었고 대회 진행을 위한 무대가 설치돼 있었다.

12시 용정교회당 종소리가 울렸다. 배형식 목사가 개회선언을 하고 김영학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또한 포고문을 낭독하고 연설자들이 무대에 올라 일제의 만행을 성토했다. 군중들의 만세운동 함성은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어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최종목적지는 간도일본총영사관이었다. 그런데 사전에 만세운동 정보를 입수한 일제는 중국 측을 압박해 맹부덕의 정규군 50여명을 용정으로 끌어들여 간도일본총영사관을 보호하게 했다.

격앙된 시위대가 영사관에 접근하자 일본경찰과 중국 측 맹부덕 부대 군인들이 적수공권(맨손에 맨주먹)뿐인 시위대의 깃발을 빼앗고 심지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그 자리에서 13명이 즉사하고 3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희생자와 부상자들을 당시 영국 조계지였던 영국더기 제창병원에 옮겼으나 추가로 4명이 더 사망했다.

그렇게 3월 13일 조선인이 평화적으로 벌인 용정 3.13만세운동에서 공덕흡(시위대 기수)·김병영·김봉균·김승록·김종묵·김흥식·박문호·박상진·이세주·이요섭·장학관·정시익·차정룡·최창헌·최익선·현봉율·현상노 등 총 17명이 순국했다.

용정 3·13 반일의사릉 청소년들을 위한 애국교육기지로 활용

1919년 3월 17일 용정지역 각계 인사들이 ‘의사회(義士會)’를 구성하고 군중을 동원해 합성리(合成利)에서 3.13만세운동 당시 순국한 열사를 위한 추도대회와 안장 의식을 거행했다.

평화적인 시위에서 희생자와 부상자들이 다수 나오자 북간도 지역 조선인들은 더욱 분노했고, 5월 중순까지 총 54회에 걸쳐 만세운동을 벌였다. 당시 북간도 조선인이 약 25만명이었는데 그중 약 36%에 달하는 약 7만5000명이 시위에 동참했다.

이는 북간도 지역 조선인들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용정 3.13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연변 각지에서 조선인들의 항일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일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3.13반일의사릉 터는 원래 용정 기독교인의 공동묘지였다. 그런데 간도일본총영사관이 특무를 잠복시켜 누가 와서 참배하는지 감시했기 때문에 후손조차 감히 찾아가지 못했다.

이후 일제의 중국 침략이 가속화 됐고 연변도 일본관동군의 조종을 받는 위만주국(일제가 설립한 만주 괴뢰국) 치하에 들어갔다. 그렇게 만세운동의 희생자들이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70여 년이 지난 1989년 10월, 용정시 대외경제문화교류협회 고(故) 최근갑 회장이 항일운동 복원과 희생자 신원 회복을 위한 합동조사반을 꾸렸다.

조사반은 3.13 만세운동의 현장을 기억하는 최원악(崔元岳)·방창화(方昌化)·박응삼(朴應參) 등 노인 30여명으로부터 합성리 공동묘지에 3.13 만세운동에서 희생당한 의사들을 안장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1990년 4월 용정3.13기념사업회를 발족해 항일 애국열사를 기리기 위한 복원사업을 추진했다. 먼저 봉분을 정비하고 ‘3·13반일의사릉’이라 새긴 목조 비석을 세워 추모제를 지냈다. 1993년 4월에는 목조 비석을 화강암 비석으로 대체했고 2000년에는 성역화 사업을 전개했다. 용정시정부도 지원에 나서 3·13반일의사릉을 용정시 중점문물보호대상으로 지정하고 애국교육기지와 홍색교육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 길림성 용정시인민정부가 현재 청사로 사용 중인 옛 일본총영사관 건물
중국 길림성 용정시인민정부가 현재 청사로 사용 중인 옛 일본총영사관 건물

용정 3.13 반일운동을 탄압한 간도일본총영사관

용정 3.13 반일운동 당시 비폭력 시위군중을 무력으로 탄압했던 주범은 간도일본총영사관이고, 이 일본총영서사관은 현재 길림성문물보호대상이다.

1907년 일제는 ‘조선인의 생명 재산과 안전 보호’를 구실로 일본 경찰을 용정에 주둔시켰다. ‘통감부간도임시파출소’를 설립하고 사이토 게이지로 (藤季治郎)를 소장으로 임명했다. 1909년 9월 일제는 청나라 조정과‘두만강 한·중 경계조항(图們江中韓界務條款)’을 체결했다.

조약의 내용에 근거해 일제는 같은 해 11월 원래 파출소를 철폐하고 ‘간도일본총영사관’을 설립했다. 간도일본총영사관은 1922년 11월 27일 불에 타 소실됐다. 1926년 일제가 다시 현지 주민을 동원해 새로 복구한 총영사관은 토지가 42994㎡, 건축면적은 2503㎡에 달했다.

‘일본간도총영사관’ 수하에 연길(延吉)·백초구(百草溝)·훈춘(琿春) 등 영사분관 4개와 경찰분서 19개를 설치했다. 1937년 11월 5일 일제는 ‘만주국에서의 치외법권 철폐와 남만철도 부속지 양도에 관한 행정조약’ 규정에 근거해 같은 해 12월 총영사관·영사분관·경찰기구를 없앴다.

일제의 일본간도총영사관은 연변지역의 부를 미친 듯이 수탈하고 항일무장세력과 군중을 탄압하는 악랄한 역할을 하였다. 현재는 확실한 일제의 중국 침탈의 역사적 증거로 남아 청소년들을 위한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활용되고 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