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조선인 이야기] ③ 중국 조선족 농촌사회의 변천 2

인천투데이=조신옥 시민기자 |

중국의 민족자치정책과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중국은 민족 56개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다. 2017년 말까지 중국 정부는 총 155개 민족자치지방 조직을 세웠다. 그중 성급에 해당하는 자치구가 5개이고 자치주는 30개, 자치현은 120개이다.

중국 인구의 약 92%를 차지하는 한족 이외 나머지 8%를 차지하는 소수민족 55개 중 44개 민족이 자신들의 자치 지방을 갖고 있다.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70주년 경축행사 (출처 바이두)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70주년 경축행사 (출처 바이두)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국 정부는 민족자치정책을 시행해 소수민족이 집단거주지역에서 민족자치지방 조직을 건립케 했다. 이는 소수민족이 주인이 돼 자주적으로 민족 내부 사무를 관리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다민족 자치제도는 중국 내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정책이며 중요한 정치제도이다.

중국 지방 행정구역은 우선 성·직할시·자치구·특별행정구로 구성된다. 그 아래 지급시·지구·자치주 등이 있으며, 다시 그 아래 시할구·현급시·현·자치현·기·특구 등으로 구성된다.

1952년 9월 조선인 최대 집단거주지인 지린성 연변지역에서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수립됐다. 일제시기 동북항일연군과 연안 조선혁명군정대학교에서 중책을 맡았던 주덕해(朱德海, 주더하이)가 자치구 초대 주석으로 당선됐다.

1955년 12월 연변조선족자치구는 자치주로 격하되고 주덕해가 자치주 주장을 맡았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매년 9월 3일 자치주 창립기념일을 성대하게 경축하고 있다.

1958년 9월 15일 지린성에서는 또 하나의 조선인 집단거주지인 장백현(長白縣, 창바이시엔)에서 장백조선족자치현(吉林省長白朝鮮族自治縣)이 성립됐다.

두만강 하구 3국 접경지역(출처 바이두)
두만강 하구 3국 접경지역(출처 바이두)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 내에서 비교적 일찍 건립된 민족 자치 지방정부에 해당한다. 연변은 민족 자치 정책에 근거해 정치·경제·문화 등 여러 면에서 비교적 빠르게 발전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 내 자치주 30개 가운데 줄곧 사회경제발전에서 선두를 지키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러시아 3국이 인접한 변경지역에 있다. 두만강과 백두산은 중국과 북한의 국경선이다.

한때 동북아시아에서 정부 간 협력사업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두만강개발계획은 바로 연변지역에서 추진됐다. 현재까지 북한의 라진·선봉 국제무역지대와 교류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연변 지정학 중요성에 덩샤오핑부터 시진핑까지 모두 방문

연변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중국 최고지도자들은 이 전략적 요충지에 줄곧 지대한 관심을 표하고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을 이끈 덩샤오핑(鄧小平)은 1983년 8월 13일 열차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현(安圖縣, 안투시엔)에 도착한 뒤 백두산 정상에 올랐다. 당시 79세였던 덩샤오핑은 천지를 구경하고 “장백산에 오르지 않았으면 평생 유감이었을 것이다(不登長白山 終身遺憾)”라는 말을 남겼다.

지난해 작고한 장쩌민(江澤民) 전 당 주석도 1991년 1월 7일 연변을 시찰했다. 그는 두만강 연안을 둘러보고 백두산 아래 첫 동네로 불리는 이도백하(二道白河, 얼도우바이허) 임업국 사무소를 시찰했다. 이어 용산촌(龍山村, 룽산춘) 조선족 가정을 방문하고 연변 가무단 공연을 관람했다. 그는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전국 모범 자치주로 건설하자.”라는 기념사를 남겼다.

중국 시진핑 주석 연변조선조자치주 시찰 모습 (출처 바이두)
중국 시진핑 주석 연변조선조자치주 시찰 모습 (출처 바이두)

장쩌민을 이은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도 국가 부주석 신분으로 2001년 8월 17일부터 21일까지 4박 5일 일정으로 지린성을 시찰할 때 연변을 방문했다. 그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연길시(延吉市)·안도현(安圖縣)·훈춘시(琿春市)·용정시(龍井市)를 둘러보았다.

현 시진핑(習近平) 중국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은 2015년 7월 16일부터 18일까지 2박 3일간 고찰연구와 시찰을 목적으로 지린성을 방문할 때 가장 먼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시찰했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시진핑 주석이 연변의 중요한 쌀 생산기지인 화룡시 동성진 광동촌(和龍市 東城鎭 光東村)의 논을 둘러본 행적을 가장 먼저 보도했다. 그는 “중국의 13억 인구는 반드시 자체의 식량 생산을 지켜내야 한다. 식량도 브랜드를 창출해야만 높은 가격에 잘 팔린다.”라고 말했다.

집단생산에서 가족단위 생산제로 농업 생산성 향상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조선족 농민들은 호조조(互助组)·합작사(合作社)·인민공사(人民公社)를 조직해 집단생산과 평균 분배 체제에 초기에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 이러한 농업경영체제는 양극화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개혁개방 이전에 조선족은 주로 농촌에 집중해 살면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전통적인 쌀농사에 종사하면서 민족 고유의 문화를 지켜왔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 민속촌 한가위 세시 풍속 모습(출처 인민망 길림채널)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 민속촌 한가위 세시 풍속 모습(출처 인민망 길림채널)

그러나 평균 분배와 ‘큰솥 밥’은 농민들의 적극적인 생산성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해 노동 생산성을 떨어뜨렸다. ‘큰솥 밥’은 인민공사 같은 집단생산으로 얻은 소득을 평균 분배 해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개혁개방정책은 조선족 농촌사회에도 천지개벽의 변화를 불러왔다. 개혁개방정책은 1978년 12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회 전체회의에서 채택한 이후 중국 정부가 시행한 중국의 대내외 개방정책을 말한다.

개혁개방 이후 도시와 농촌 개혁의 심화, 대외교류의 확대에 따라 사회·경제·문화 등 여러 면에서 발전과 더불어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농촌에서는 농업생산 개인 도급제가 보편적으로 실행됐다. 농촌에서 도입한 가족 단위 농업생산 책임제는 농민에게 생산 주도권을 부여함으로써 생산성을 촉진했다.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 농촌사회도 급격하게 변화

1980년대까지 조선족은 80% 이상이 주로 농업생산에 종사했다. 개혁개방 정책 이후 농촌에 도입된 경제체제 개혁은 조선족 농민이 단순한 농업 경작에서 벗어나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게 만들었다.

조선족 사회의 농촌 노동력 중 토지를 떠나 국내 대도시에 진출한 상업 종사자, 취업자 혹은 해외 진출 노무 종사자가 절반 이상에 달했다. 어떤 농촌에서는 심지어 대부분 노동력이 토지를 떠났다. 역설적으로 이는 농촌사회의 취업 부담을 크게 경감시키고 점차 농업경영에 규모화와 집약화를 촉진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촌 전경(출처 인민망 길림채널)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촌 전경(출처 인민망 길림채널)

농촌경제 수입 구조도 아주 큰 변화가 발생했다. 조선족 농촌사회의 수입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감소했다. 농업 생산 수입은 수입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공상업과 해외 노무 종사에서 얻는 수입 비중이 높았다. 조선족 농민의 농업 외 수입 증가는 삶의 질에 현저한 변화를 가져왔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다양한 형태로 한국에 정착하는 조선족 인구가 꾸준히 증가했다. 2020년 1월 기준 한국 체류 중국 동포는 약 70만8000명에 달하는데 이는 연변 거주 조선족 인구를 넘는 수치다. 일각에서는 한국 체류 중국 동포를 귀환 동포라고 부른다. 중국으로 이주했던 조선인 후예들이 다시 모국으로 돌아왔다는 의미에서는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신옥 다색빛공동체 대표
조신옥 다색빛공동체 대표

필자 조신옥은 중국 이주 조선인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북간도의 중심 용정에서 성장했다. 용정중학교 재학시절 윤동주 문학사상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한국문학과 일제 강점기 항일독립운동사에 관심을 두게 됐다. 중국 연변대학교 졸업 후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다문화가정을 지원하는 다색빛공동체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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