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조선인 이야기] ⓶ 중국 조선족 농촌사회의 변천

인천투데이=조신옥 시민기자 | 

19세 중엽부터 궁핍함 벗어나기 위해 압록강 두만강 건너

19세 중후반에 해당하는 초창기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은 한반도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유입된 한민족의 한 갈래이다. 현재 대표적으로 지린성 내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이루고 살고 있고, 헤이룽장성엔 조선족자치현이 있기도 하다.

1949년 10월 1일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면사 신 중국이 탄생했다. 중국은 1953년 전국 제1차 인구 보편 조사를 진행했다. 1953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설립 당시 자치주 내 조선인은 약 111만1000명으로 자치주 내 인구의 70.5%에 달했다.

약 70년 세월이 흐른 2023년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인구는 207만2000명이고 이중 조선족 인구는 74만2000명으로 자치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5.8%로 감소했다.

비암산에서 내려다 본 용정시 전경. 도시 가운데 해란강이 흐르고 있다.
비암산에서 내려다 본 용정시 전경. 도시 가운데 해란강이 흐르고 있다.

중국 내 조선인 이주 역사는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오래됐다. 1982년 중국 정부가 전국 인구 보편 조사를 진행할 때 명나라 말 청나라 초기부터 이미 조선인 일부가 중국 허베이성(河北省)과 둥베이(東北)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허베이성 청룡현 탑구(青龙县 塔沟, 칭룽시앤 타거우)와 랴오닝성 개현 박가구촌(盖县 朴家沟村, 가이시앤 퍄오쟈거우춘)의 박씨 성을 가진 조선인들은 현지에 거주한 지 벌써 300년이 넘었다.

19세기 중엽부터 많은 조선인이 한반도와 가까운 중국 둥베이로 이주했는데 이들은 중국 내 조선족 공동체를 구성하는 주요 구성원이 됐다. 1869년을 전후로 조선 북부에 연이어 심한 자연재해가 발생하자 궁핍한 농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살길을 찾아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 동북 3성 지역 논 농사 전경(출처 바이두)
중국 동북 3성 지역 논 농사 전경(출처 바이두)

둥베이 산과 구릉, 황무지와 늪지대를 옥답(沃畓)으로 개간

당시 이주 조선인은 대부분 화전을 일구던 화전민에 해당했고, 이들은 강 연안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업에 종사하면서 거기에 정착해 있던 한족(漢族), 만주족(滿洲族)과 섞여 살았다.

통계에 따르면 1870년 당시 압록강 연안에 조선인 마을이 약 28개 있었다. 1881년(청나라 광서 7년) 연변지역 조선인은 이미 1만여명에 달했다. 1883년 집안(集安, 지안)·임강(临江, 린쟝)·신빈(新宾, 신빈) 등 현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3만7000여명이었다.

같은 시기 우수리강(乌苏里江, 우쑤리장) 연안에도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다. 당시 화전민들은 봄에 중국 쪽으로 강을 건너와서 농사를 짓고, 가을에 수확해 돌아가는 식이라 거주 형태가 불안정했다.

조선인의 두드러진 특징과 강점은 쌀농사에 있었다. 조선인들은 쌀농사에 아주 능해 논을 일구고, 논이 있는 곳엔 어김없이 조선인이 살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은 산과 구릉이 많고 기후가 한랭해 농사에 적합한 날이 110일~160일밖에 안 됐다. 게다가 잡초가 무성하고 나무뿌리가 뒤엉킨 황무지나 늪지대여서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는데도 조선인은 논을 만들고 쌀농사를 일궜다.

부지런한 조선인들은 갖은 시련을 이겨내면서 맨주먹으로 악착스럽게 황무지를 옥답으로 만들었다. 조선인은 중국 동북 지역 쌀농사의 선구자로 중국 농업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대 중국이 토지개혁을 추진하던 당시 모습(출처 바이두)
1950년대 중국이 토지개혁을 추진하던 당시 모습(출처 바이두)

중국 동북 3성 지역 논은 거의 대부분 조선인이 개간했다

지린성 통화현 대전자(通化县 大甸子, 퉁화시앤 따댄즈) 지역은 조선인이 가장 일찍 논농사에 성공한 지역에 해당한다. 이후 쌀농사는 임강(临江, 린쟝)·화인(怀仁, 화이런)·흥경(兴京, 싱징)·유하(柳河, 류허)·해룡(海龍, 하이룽) 등 지역으로 확대됐다.

1877년 연변지역에서도 논농사가 시작됐다. 1906년 화룡현 용지향 대교동(和龙县 勇智乡 大教洞, 허룽시앤 융즈샹 따쟈오둥)에서 조선인 농민이 길이 1308m에 달하는 도랑을 파서 약 10만평에 규모의 논에 관개수로를 개설해 높은 생산량을 올리고 했다.

조선인의 선구적인 쌀농사 확대로 연변지역에서 점차 논 면적이 증가했고 동북 지역의 유명한 쌀 생산지로 성장했다.

통계에 따르면 1920년대 연변, 길림(吉林, 지린) 지역 논 면적의 100%, 통화(通化, 퉁화) 지역 논 면적의 85%, 흑룡강성(黑龍江省, 헤이룽장성) 논 면적의 100%, 요녕성(遼寧省, 랴오닝성) 개원 지역 논 면적의 90%, 흥경(興京, 싱징) 지역과 심양(瀋陽, 썬양) 지역 논 면적의 85%, 무순(撫順, 푸순) 지역 논 면적의 80%, 단동(丹東, 단둥) 지역 논 면적의 70%가 모두 조선인이 개간한 것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1950년 6월 선포한 토지개혁법(출처_바이두)
중화인민공화국이 1950년 6월 선포한 토지개혁법(출처_바이두)

중국, 이주 조선인 토지 소유권 인정하며 국적 문제 해결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위만주국(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세운 괴뢰국)이 멸망했다. 중국 공산당은 동북 해방지역에서부터 토지개혁을 진행했다. 나라를 잃고 뿌리가 없는 유랑민으로 괴롭힘과 서러움을 당하던 조선인 농민들의 국적 문제도 이때 해결됐다.

토지 문제의 해결은 조선인 농민들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들은 중국 공산당 인민정부가 발급한 토지증을 취득하고 토지의 진정한 주인이 됐다. 이를 계기로 더 많은 이주 조선인이 중국 공산당을 지지하게 됐고, 훗날 소수민족의 지위와 자치주를 승인 받는 토대가 됐으며, 신중국과 운명을 같이 하게 된 원동력이 됐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동북지역 조선인들은 농업호조합작의 선두에 나섰다. 조선인 거주지역에서는 1946년에 이미 품앗이 형태의 생산조직인 호조생산환공조(互助生产换工组), 임시호조조(临时互助组), 계절성 호조조(季节性互助组)가 나타났다. 1953~1954년 조선족 농촌에서는 대부분 호조조(互助组)가 조직됐다.

1951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지방에서 농업생산호조합학화를 실행할 데 관한 결의 초안(關于在地方實行農業生産互助合作化的決議 草案)’을 발표했다. 헤이룽자성 삼강평원 지역에서는 36가구로 구성된 화천현 성화(桦川县 星火, 화촨시앤 싱훠) 집단농장이 출현하여 신 중국 초기 중국 내 농업합작의 모범이 됐다.

1951년 3월 중국 공산당 연변지역위원회(中共 延边地委)는 연길현(현재 용정시) 동성용향 영성촌(延吉县 東盛勇乡 永成村, 옌지시앤 둥성융샹 융청춘)에서 농업 생산에 선도 역할을 한 김시룡(金時龍, 진시룽) 호조조(互助组)를 합작의 마중물로 삼아 연변지역의 첫 초급농업생산합작사인 여명초급합작사(黎明初級合作社)를 설립했다. 이는 훗날 이는 동북 지역 농촌호조합작의 모범이 된다.

조신옥 다색빛공동체 대표
조신옥 다색빛공동체 대표

필자 조신옥은 중국 이주 조선인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북간도의 중심 용정에서 성장했다. 용정중학교 재학시절 윤동주 문학사상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한국문학과 일제 강점기 항일독립운동사에 관심을 두게 됐다. 중국 연변대학교 졸업 후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다문화가정을 지원하는 다색빛공동체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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