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연 시민기자의 ‘사연이 있는 클래식’
프레데릭 쇼팽 6탄(최종화)

[인천투데이 문하연 시민기자]

상드와 이별과 파리 2월 혁명, 런던으로

쇼팽이 묻힌 파리 페르 라세르 묘지.

상드와 이별한 쇼팽은 ‘멘붕’에 빠졌다. 상드는 쇼팽을 떠났지만, 쇼팽은 상드를 떠나지 못했다. 쇼팽의 지인들은 혹시라도 그가 힘들까봐 상드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쇼팽은 입만 열면 상드였다. 설상가상으로 마리아 보진스키의 오빠인 안토니 보진스키와 멘델스존의 사망 소식에 쇼팽의 상심은 더 깊어졌다.

건강상 이유로 교습도 줄여야했기에 생활고가 찾아왔다. 상드 없이 혼자서 생활을 책임져야하는 쇼팽은 1848년 2월 16일 플레옐 홀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플레옐 홀은 쇼팽이 파리에 와서 처음 연주한 곳이자 마지막 연주한 곳이다. 6년 만에 열린 연주회였다. 연주회는 성공적이었고, 이에 고무된 쇼팽은 바로 다음 달에 또 한 번 연주회를 열기로 한다.

그런데 2월 22일 ‘2월 혁명’이 터졌다. 하루 사이에 세상이 뒤집혔다. 귀족 정부의 부정부패에 분노한 시민들이 들고일어났다. 이 혁명 한가운데 상드가 있었다. 파리 곳곳이 파괴됐으며, 공연도 취소됐다. 배우러 오는 학생들도 발걸음을 끊었다. 불안이 도시를 장악한 가운데 쇼팽의 제자 제인 스털링이 영국으로 그를 불러들였다. 선택지가 없는 쇼팽은 런던으로 향했다.

제인 스털링의 호의와 행복하지 않은 스코틀랜드 생활

제인 스털링은 오랜 시간 쇼팽을 흠모해오다 쇼팽이 상드와 헤어진 것을 알고 그와 결혼하는 것까지 생각했다. 그녀는 상드와 동갑으로 쇼팽에게 상드의 역할을 기꺼이 해주고 싶었다. 깜짝 놀란 쇼팽은 선을 그었다.

쇼팽이 런던에 도착하자 그녀는 집과 가구뿐 아니라 오선지나 코코아 같은 소소한 물건들까지 챙겨줬다. 당시 런던은 파리에서 피란 온 베를리오즈, 탈베르크, 칼크브레너 등 예술가들이 넘쳐났고, 쇼팽은 이 경쟁에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다. 뭔가 놀라운 쇼나 기술을 보여줘야 하는데, 쇼팽은 이런 연주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이때 ‘필하모니 소사이어티’에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이 절호의 기회를 쇼팽은 거절했다. 연습할 시간이 부족했고, 오케스트라의 수준이 기대에 미치지 않았으며, 무대 공포증이 있는 데다 체력도 받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쇼팽의 거절에 담당자는 기분이 상했지만, 영국 왕실에서 연주는 가능한지 물었고, 쇼팽은 이 제안은 받았다.

빅토리아 여왕을 필두로 고관대작들이 스패토드 하우스에 모였다. 여러 연주가와 성악가도 참석한 가운데 쇼팽은 영국 피아니스트 줄리어스 베네딕트와 함께 모차르트 2중주를 연주했고, 자신의 짧은 곡들도 연주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날마다 일기를 썼는데, 이날 일기장에는 “듣기 좋은 음악들이 연주됐다. 라블라슈, 마리오, 탐부리니의 노래가 좋았고 몇몇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쳤다”라고 썼다. 여왕의 귀에는 쇼팽은 그저 몇몇 피아니스트 중 하나였다.

쇼팽은 6월과 7월에 연주회 두 번을 열었고, 이 공연은 경제적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줬다. 하지만 공연 시즌은 7월 말에 끝났다. 어려움에 빠진 쇼팽을 제인 스털링은 자신의 거주지인 스코틀랜드로 초대했다. 런던에서 최악의 환경(=스모그)에 노출된 쇼팽은 스코틀랜드의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풍광에 한시름 놓았다. 제인 스털링은 언니와 함께 그를 데리고 다니며 귀족들에게 소개했고, 쇼팽은 에든버러와 맨체스터 등에서 연주회를 몇 차례 열었다. 특히 맨체스터에서는 관객 1200명 앞에서 연주했다. 하지만.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올라올 때 외양과 걸음걸이가 허약하고 고통스런 모습이었다. 그가 피아노 앞에 앉자 우수 어린 가냘픈 인상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순간부터 피아노가 그를 완전히 빨아들인 것 같았다. (중략) 대규모 홀 연주회가 요구하는 크고 뚜렷한 그림, 악기의 박력은 부족하다.” (맨체스터 가디언)

“그의 연주는 너무 섬세해서 청중의 열광을 자아낼 수 없었다. 쇼팽이 정말 안 된 느낌이었다.” (아일랜드 피아니스트 조지 오스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쇼팽은 제인 스털링 자매의 호의가 점점 숨 막혔다.

“몸이 더 약해졌어. 이제는 작곡도 전혀 못 하겠어…. (중략) 그러다가 두 시간 동안 사람들과 식탁에 앉아서 그들이 말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술 마시는 소리를 들어야해. 지겨워 죽겠어. 그들이 예의를 차리니까 숨이 탁탁 막혀.”

“내가 좀 더 젊다면 눈 딱 감고 기계가 돼버릴 텐데. 아무데서나 연주회를 열고 돈만 된다면, 취향이고 뭐고 따지지 않고 엉터리 같은 작품도 연주할 텐데.” (쇼팽이 그셰마와에게 보낸 편지들 중)

쇼팽은 스코틀랜드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다.

죽음을 직감한 쇼팽에게 달려간 누이 루드비카

제인 스털링(1804-1859).

파리에는 쇼팽과 제인 스털링이 약혼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답답해진 쇼팽은 11월 16일 런던 길드 홀에서 열리는 ‘폴란드인을 위한 자선 행사’ 참가를 구실로 스코틀랜드를 떠나 런던으로 돌아왔다. 쇼팽은 이 행사에서 기꺼이 연주했지만, 사람들은 쇼팽의 연주에 관심을 별로 두지 않았다. 이 자선 연주는 쇼팽의 마지막 무대가 됐다.

파리로 돌아온 쇼팽은 빈손이었다. 그동안 작곡도 못했기에 팔 악보도 없었다. 게다가 그동안 자신을 돌봐준 주치의 몰랑이 사망했다. 쇼팽의 불안은 커졌다. 들라크루아나 프랑숌처럼 찾아주는 친구들이 있었으나, 쇼팽에게 당장 필요한 건 돈, 집을 마련할 돈이었다. 이에 손을 내민 사람은 오브레스코프 공주였다. 오브레스코프는 쇼팽의 제자였던 수초 공주의 어머니다. 오브레스코프는 쇼팽의 거처를 알아봐줬다. 그리고 쇼팽의 자존심이 상할까봐 집세를 반반씩 내자고 제안했다. 집세는 400프랑이었는데, 공주는 쇼팽에게 200프랑이라고 말하고 쇼팽 몰래 자신이 집세를 다 냈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직감한 쇼팽은 누이인 루드비카에게 ‘와서 도와 달라’는 편지를 쓴다. 루드비카는 곧바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남편이 제동을 걸었다. 여행경비를 장모가 다 내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자기 돈은 한 푼도 쓰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여기저기에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시간이 지체됐다. 쇼팽의 어머니와 동생 이자벨라는 여비를 구하지 못해 동행하지 못했고, 여비를 간신히 빌린 루드비카가 쇼팽에게 달려갔다.

한편, 제인 스털링은 쇼팽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것을 알고 거금 2만5000프랑을 쇼팽의 문지기에게 전달했다. 쇼팽은 이 사실을 몰랐다. 이 돈이 쇼팽의 손에 들어오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쇼팽은 이 돈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고, 겨우 설득해 1만5000프랑을 빌린 것으로 해서 받았다. 루드비카가 도착했다. 누나를 만난 쇼팽은 반짝했다.

포토츠카의 노래 속에 영원히 잠든 쇼팽

루드비카는 상드로부터 쇼팽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받았다. 하지만 회신하지 않았다. 쇼팽은 누나의 품에서도 “내가 죽을 땐 상드의 품에서 죽기로 했는데”라며 상드를 그리워했다. 쇼팽이 그토록 그리워한 상드와 재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상드와 이별하고 10개월 후, 초대받은 집에서 우연히 스치기는 했지만.

9월 중순, 쇼팽은 마지막 거처가 될 곳으로 이사했다.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쇼팽은 의식이 있을 때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루드비카와 차르토리스카 공작부인, 구트만이 날마다 그의 침상을 지켰다.

쇼팽은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불러달라고 했고, 자신의 심장을 바르샤바로 가지고 가달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메모를 이렇게 남겼다. “기침으로 숨이 막힐 것 같으니 제발 내 몸을 노출된 채로 놔둬주십시오. 내가 산 채로 무덤에 묻히지 않게 말입니다.”

쇼팽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델피나 포토츠카에게 쇼팽은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다. 사람들이 피아노를 문 앞으로 옮겼고, 포토츠카는 오열하며 노래했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눈물을 쏟았다. 쇼팽은 잠시라도 고통을 잊은 듯했다. 그녀의 노래를 뒤로하고 1849년 10월 17일 새벽 2시, “어머니, 나의 어머니…”란 말을 끝으로 쇼팽은 눈을 감았다. 향년 39세였다.

마들렌 대성당 장례식에 울려 퍼진 ‘레퀴엠’

쇼팽의 죽음, 펠릭스 조셉 바이라스, 1885.

제인 스털링의 주도 아래 장례식을 준비했다. 하지만 장례식을 치를 마들렌 대성당에서는 여성이 성당 안에서 노래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부를 수 없었다. 여러 사람의 간청으로 2주가 흐른 10월 30일에서야 성당 쪽의 양보로 장례식을 치렀다. 초청된 사람이 3000명을 넘었다.

쇼팽의 바람대로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울려 퍼졌고, 그의 전주곡이 연주됐다. 들라크루아, 차르토리스키 공, 프랑숌, 구트만이 쇼팽의 관을 들었다. 상드는 끝내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상드를 미워한 제인 스털링은 상드의 측근조차도 장례식에 참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쇼팽은 파리 페르 라세르 묘지에 묻혔고, 묘지 위로 쇼팽이 폴란드에서부터 가져온 흙이 뿌려졌다. 알코올에 담긴 쇼팽의 심장은 루드비카가 치마 속에 몰래 숨겨 폴란드로 들여와 바르샤바 성 십자가 성당에 묻었다.

리스트는 쇼팽이 죽은 뒤 그의 자서전을 집필했다.

“우리는 그를 보내고도 살아야할 운명이지만, 적어도 우리가 느끼는 아픔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가운데 살았던 저 뛰어난 음악가의 무덤에 애석해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표할 의무감을 느꼈다. (중략)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이 상실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 (리스트가 쓴 쇼팽 자서전 ‘내 친구 쇼팽’ 중)

쇼팽이 유럽을 떠돌다 그렇게 세상을 떠난 것을 두고 사람들은 말했다. “상드 때문에 쇼팽이 일찍 죽었다.” “극진했던 상드 덕택에 쇼팽이 그나마 오래 목숨을 부지했다.” 이런 논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확실한 사실은 쇼팽은 상드와 만나는 동안 생애 최고의 걸작들을 쏟아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더 많이 그리워하는 쪽이 더 많이 사랑받고 혜택 받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별을 덜 아파하려면 더 많이 사랑하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참고서적] 내가 사랑하는 쇼팽 | 유강호 | 북코리아
쇼팽, 그 삶과 음악 | 제러미 니콜라스 | 임희근 옮김 | 포노
내 친구 쇼팽 | 프란츠 리스트 | 이세진 옮김 | 포노
쇼팽을 찾아서 | 알프레드 코르토 | 이세진 옮김 | 포노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문하연 시민기자는 클래식 칼럼니스트와 드라마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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