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연 시민기자의 ‘사연이 있는 클래식’
프레데릭 쇼팽 (4탄)

[인천투데이 문하연 시민기자]

사랑하기 위해 상처받는 것이므로

‘덤불 속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안다. / 하지만 꽃을 더듬는 내 손 거두지 않는다. / 덤불 속의 모든 꽃이 아름답진 않겠지만 /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꽃의 향기조차 맡을 수 없기에. / 꽃을 꺾기 위해서 가시에 찔리듯 / 사랑을 얻기 위해 내 영혼의 상처를 견뎌낸다. / 상처받기 위해 사랑하는 게 아니라 / 사랑하기 위해 상처받는 것이므로. / 사랑하라, 인생에서 좋은 것은 그것뿐이다.’ (조르주 상드의 시 ‘상처’)

상드의 이 시는 그녀의 인생을 관통하는 시처럼 보인다.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돌아서는 상드는 사랑할 때 모든 걸 다 쏟아 부었다. 그러니 설사 이별이 온들 미련도 회한도 없다. 반면에 상드와 사랑했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후유증을 심하게 앓았다. 이는 쇼팽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지를 입고, 시가를 피우며, 글을 쓰며, 많은 남자와 염문을 뿌린 상드는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됐으나, 정작 상드를 만난 잘난(?) 남자들은 그녀의 지적인 면모에 쉽게 빠져들었다. 그러니 아마도 그녀를 비난한 것은 그녀 곁에 가지 못하는 남자들의 질투였을지도 모른다.

사랑의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한다?

들라크루아가 그린 쇼팽 초상화(1838, 루브르 박물관).

마리아에게 일방적으로 파혼 선언을 당한 쇼팽은 휘청거렸다. 이런 그의 마음을 상드에게 털어놓곤 했다.

사랑의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한다고 했던가? 쇼팽은 어느덧 상드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아이가 둘 딸린 이혼녀와 만난다’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불편한 쇼팽은 상드와 함께 파리를 떠나 스페인 마요르카 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열흘 먼저 출발한 상드는 프랑스와 스페인 경계 지역인 페르피냥에서 아들 모리스와 딸 솔랑주와 함께 쇼팽을 기다렸다.

드디어 쇼팽이 도착했다. 이때 쇼팽은 상드의 자녀를 처음 만났다. 당시 아홉 살이었던 솔랑주는 훗날 상드와 쇼팽이 이별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1838년 11월 7일, 그들은 증기선 마요르킹 호를 타고 마요르카섬으로 향했다.

“즐거운 항해였다. 초승달이 수평선에 걸려 있는 바다는 잔잔했다. 키를 잡은 항해사는 목청을 뽑아 노래를 불렀다. 뱃전을 때리는 파도 소리를 반주 삼아…. 스페인풍의 뱃노래. 쇼팽과 나는 어깨를 기대고 선창에 앉아 사공의 노래를 들었다.” (상드의 회고록 중)

쇼팽의 Op.57 뱃노래는 이때 들었던 항해사의 노래에서 영감을 받았고, 배에서 본 수평선에 걸린 초승달은 녹턴 G장조 Op.37-2에 묘사됐다.

폐결핵 진단, 공포는 혐오로 이어졌다

들라크루아가 그린 쇼팽과 상드 이중 초상화를 현대 기법으로 재현한 그림.

다음날 마요르카의 중심 도시인 팔마에 도착했지만, 숙소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았다. 스페인 내전으로 피란 온 본토 사람들로 이미 만원이었기 때문이다.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여인숙에서 며칠을 보내고 나서야 ‘송 방’이라는 별장을 빌릴 수 있었다. 날씨는 온화하고 하늘은 화창했다. 여기서 쇼팽은 팔마의 마주르카로 알려진 Op.41-2, e단조 스케치를 완성한다. 하지만 갑자기 폭우가 내리고 강풍이 휘몰아쳤다. 병약한 쇼팽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상드는 팔마에서 내로라하는 의사 세 명을 불렀다. 진단명은 폐결핵.

의사 세 사람 모두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설상가상, 의사들은 폐결핵 환자가 있다고 보건당국에 알렸고, 건물주는 노발대발하며 당장 집을 비우라고 했다. 게다가 건물주는 건물 내부와 정원 소독 비용, 침대와 주방용품 소각 비용, 새로 살 가구까지, 엄청난 금액을 청구했다.

결핵은 법정 전염병으로 폐결핵 환자가 만진 모든 물건은 소각해야한다고 규정돼있었으니, 건물주가 무리하게 청구한 것은 아닌 셈이다. 더구나 결핵 환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결핵 청정지역에 결핵 환자가 생겼으니, 이 공포는 혐오로 이어졌다.

상드의 헌신적 간호와 ‘빗방울 전주곡’

우여곡절 끝에 발데모사에 있는 카르투하 수도원에 거처를 얻었다. 가구는 낡아 빠지고 먼지투성인 곳이지만, 상드가 ‘시인과 화가가 이제껏 꿈꿔온 모든 것을 자연은 이곳에 이뤄 놓았다’라고 기록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상드를 향해 ‘바지 입은 늙은 말괄량이’라고 손가락질했고, 상점들은 상드에게 터무니없이 비싼 값으로 물건을 팔았다.

상드는 멀리까지 가서라도 단백질이 풍부한 식료품들을 사서 날랐고, 쇼팽을 극진히 간호했다. 밤이면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고, 스페인에서 발간되는 신문ㆍ잡지에 글을 연재했다. 화산 같은 에너지로 이 모든 일은 혼자 다 해냈다.

상드의 헌신적 간호에 쇼팽은 차츰 회복했다. 그리고 그동안 준비해온 전주곡 24개를 마침내 완성했으며, 폴로네이즈 제4번 Op.40-2, 스케르초 3번 Op.39, 마주르카 등 많은 곡을 이곳에서 만들었다.

특히 빗방울 전주곡 탄생은 유명하다. 상드가 식료품을 사기 위해 시내를 나갔다가 폭우를 만났다. 둑이 무너지고 다리가 떠내려갔다. 상드가 탄 마차가 수렁에 빠지자 마부는 달아났다. 장장 12킬로미터를 6시간 걸어 피투성이가 된 맨발로 돌아왔다. 상드가 집에 도착했을 때 쇼팽은 눈물을 흘리며 이 곡을 연주하고 있었고, 상드를 본 쇼팽의 첫마디는 “죽은 줄 알았어. 죽은 줄…”이었다.

“그날 밤 완성한 작품의 주제가 설사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였을망정 그 빗물 소리는 그의 음악 세계에서는 그의 가슴을 향해 하늘이 흘리는 뜨거운 눈물방울이었나 봅니다.”

‘쇼팽은 추녀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창조적 악상으로 승화해 이 곡을 만들었다’고 상드는 그의 저서에 기술했다. 마요르카 날씨는 나빠졌고, 쇼팽의 몸도 다시 악화됐다. 더는 그곳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한 상드는 짐을 챙겨 1839년 2월 13일 이 섬을 떠나는데, 이 과정이 눈물겹다.

쇼팽이 사용한 모든 물건을 소각해야 했으므로, 쇼팽은 다 부서진 침대만을 배에 실었다. 설상가상 그 배는 돼지를 실어 나르는 배였고, 결핵에 걸린 쇼팽은 사람들과 격리돼 지독한 냄새가 나는 돼지우리에 감금되다시피 했다. 기진맥진한 쇼팽은 피를 한 바가지나 쏟았다. 쇼팽이 사경을 헤매는 사이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상드는 정박하고 있던 프랑스 군함 사령관에게 도움을 청했고, 유명 작가인 상드의 간청은 받아들여졌다. 군의관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넘긴 쇼팽은 마르세유에서 요양한다.

지금껏 본 것 중에 가장 애처로운 노동

들라크루아가 그린 상드 초상화(코펜하겐 오르드룹고르 박물관).

따뜻한 마르세유에서 쇼팽은 상드를 더욱 신뢰하고 사랑한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나의 천사 상드’라는 표현을 쓰면서 상드에 관한 소문은 사실과 다르고 그녀가 얼마나 인정 많고 자상한 여인인지 모른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3개월을 머물고 쇼팽의 건강이 나아지자 상드의 고향인 노앙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때부터 상드와 헤어지기 전까지 약 9년간 쇼팽은 매해 파리(겨울)와 노앙(여름)을 오가며 생활했으며, 녹턴 G장조, 소나타 2번 B플랫 단조, 발라드 4번, 폴로네이즈 6번 영웅과 같은 수많은 명곡이 노앙에서 탄생했다. 쇼팽은 자신과 상드의 관계가 연인보다는 예술적 동지로 알려지길 바랐다. 그래서 파리에서도 각자의 아파트를 얻었다. 파리에는 그의 제자가 되길 희망하는 귀족 자녀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노앙에 머무는 동안 상드는 파리에 있는 친구들을 자주 초대했는데, 화가인 들라크루아, 소설가 발자크, 리스트 등 대부분 예술가였다. 그들은 노앙의 저택에 모여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영감을 주고받았고, 밤이면 쇼팽의 연주를 들었다. 들라크루아는 쇼팽과 상드의 이중 초상화를 그렸고, 발자크는 상드에게서 들은 리스트와 그의 연인 다구 백작 부인의 사랑 이야기를 듣고 착안해 ‘베아트릭스’를 썼다. 안타깝게도 들라크루아가 그린 쇼팽과 상드의 이중 초상화는 반으로 잘려, 지금은 각각 다른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상드는 쇼팽에게 작곡에만 몰입할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을 제공했다. 쇼팽은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을 상드에게 의존했다.

“그의 창작은 자발적이고 마치 기적 같다. 그는 일부러 찾지 않아도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듯 저절로 찾아낸다. (중략) 그러나 그때 내가 지금껏 본 것 중에 가장 애처로운 노동이 시작된다. 무수한 노력이 이어지고 이럴까 저럴까 하는 망설임, (중략) 자기 기준에 맞는 명확한 선율을 다시 찾아내지 못하면 속이 상해서 절망에 빠지곤 했다. 온종일 방에 처박혀서 울기도 하고, 걸어 다니기도 하고, 펜을 부러뜨리기도 하고, 한 마디를 백번쯤 치고 또 치고. (중략) 악보 한 페이지를 쓰는 데 6주를 고심하며 이렇게 저렇게 고쳐도 결국 마지막으로 완성된 악보는 맨 처음 쓴 대로였다.” (상드의 내 인생이야기 중)

1841년 4월, 쇼팽은 파리 플레이엘 홀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3년 만에 열리는 연주회였다. 사실 쇼팽은 평생 공개 연주회를 30번 정도밖에 하지 않았다. 무대 울렁증이 있기도 했거니와 작곡ㆍ출판으로 수입이 있었고, 쇼팽의 연주를 사적으로 독점하려는 귀족들의 비호 아래 귀족 자녀 개인교습만으로도 상당한 수입을 올렸기 때문이다. 또한, 상드를 만나고는 경제적 문제를 상드가 해결해준 것도 원인이 됐다. 연주회는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연주회 때문에 리스트와 쇼팽의 우정이 끝나버린다. (다음 회에 계속)

[참고서적] 내가 사랑하는 쇼팽 | 유강호 | 북코리아
쇼팽, 그 삶과 음악 | 제러미 니콜라스 | 임희근 옮김 | 포노
내 친구 쇼팽 | 프란츠 리스트 | 이세진 옮김 | 포노
쇼팽의 음악과 사랑 | 송숙영 | 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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