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이 있는 클래식] 일곱 살 음악천재 탄생
[사연이 있는 클래식] 일곱 살 음악천재 탄생
  • 문하연 시민기자
  • 승인 2020.02.03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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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연 시민기자의 ‘사연이 있는 클래식’
쇼팽 (1탄)

[인천투데이 문하연 시민기자] ‘사람들이 쇼팽에게 깜짝 놀란 이유는 그에게서 훌륭한 재주 정도가 아니라 탁월한 재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연주와 작곡의 독창성으로 보자면 이미 그에게 천재라는 이름을 붙여줄 만하다. (중략) 난점을 극복한 그의 고난도 기교 연주는 놀라움을 자아낸다. (중략) 그는 매우 조용하게 연주하며 전문적 예술가와 아마추어를 구별하게 하는 대담한 도약과 같은 잔재주는 부리지 않는다.’(1929년 8월 20일 기사 중)

19세 쇼팽.(사진출처ㆍ위키피디아)
19세 쇼팽.(사진출처ㆍ위키피디아)

‘그가 다른 거장들과 가장 다른 점은 좋은 음악을 만들겠다는 열망이 대중의 마음에 들고 싶다는 욕구보다 훨씬 우세하다는 것이다.’(1929년 9월 1일 기사 중)

쇼팽(1810-1849)이 19세 때 바르샤바를 처음 떠나 처음으로 빈 청중들 앞에서 두 차례에 걸쳐 연주했을 때, 이에 관해 신문에 실린 평론들의 일부다. 첫 번째 공연에서 쇼팽은 준비한 변주곡을 마치고 폴란드 민요 여러 곡을 바탕으로 즉흥 연주를 했다.

“청중은 마치 감전된 듯했어요. 여기서는 이런 노래들을 별로 들어보지 못했나 봐요. (중략) 청중들은 매우 감동해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났다는 거예요.” (쇼팽이 부모에게 보낸 편지 중)

두 번째 연주회가 끝났을 때 쇼팽은 “어찌된 영문인 지 모르겠어요. 오스트리아인들은 모두 제 연주에 깜짝 놀랐고, 저는 또 그들이 이토록 깜짝 놀랐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어요”라고 다시 편지를 쓴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그들의 아버지 밑에서 혹독하게 피아노 연습을 했고, 리스트 또한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훈련받았다. 하지만 쇼팽의 부모는 애초에 쇼팽에게 그저 좋은 교육을 시키고 싶었을 뿐이지 피아니스트가 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이 덕에 쇼팽은 다른 음악가에 비해 평안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너무 부드럽고 섬세한 연주

쇼팽이 처음 빈 무대에 섰을 땐, 파가니니가 전 유럽을 휩쓸며 광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슈만ㆍ베를리오즈 등 많은 음악가도 그의 연주에 빠져들었다. 1929년 5월, 파가니니가 바르샤바를 방문해 총 열 번의 연주를 했는데 쇼팽은 열 번 다 참관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그의 현란한 기교에 충격 받았다. 훗날 쇼팽과 ‘절친’이 된 리스트도 당시 파가니니의 연주에 감명 받아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피아노에 그대로 옮긴 작품을 썼듯이, 쇼팽도 자극을 받긴 마찬가지였다. 공연을 보고 난 후 몇 주 만에 에뛰드를 쓰기 시작해 연말까지 네 곡(에뛰드 8~11번)을 완성했다.

빈에서 첫 연주부터 파리에서 마지막 연주까지 쇼팽을 따라다니는 ‘악플’은 피아노 소리가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큰 공연장 뒷자리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큰 공연장보다는 살롱 연주가 그의 스타일에 더 어울렸다. 리스트처럼 화려한 기교를 뽐내며 큰 소리로 대중을 압도하기보다는 섬세한 터치로 울림을 주는 쇼팽의 연주는 당시에는 장점이기도 단점이기도 했다. 쇼팽도 물론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제 연주가 너무 부드럽다고, 아니 피아노를 너무 세게 탕탕 쳐대는 이곳 연주자들에게 익숙한 빈 사람들에게 너무도 섬세하다고 해요. 이런 비판이 신문에 실릴 거라고 저는 예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기사가 난다 해도 저는 상관없어요. (중략) 저는 제 피아노 소리가 너무 크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지금이 더 좋거든요.”(쇼팽의 편지)

일곱 살의 천재 탄생

쇼팽은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아버지와 피아노를 잘 치는 어머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라 쇼팽은 바르샤바 고등중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다가 훗날 바르샤바대학 불문학 교수를 역임한다. 위로 누나와 아래 여동생 둘이 있었는데, 문학적 소양이 풍부했던 막내 여동생 에밀리아는 14세에 결핵으로 사망한다.

감수성이 남달랐던 아기 쇼팽은 엄마나 누나가 피아노를 치면 그 소리에 울었다. 7세 누나 루드비카가 엄마에게 배운 실력으로 4세 쇼팽에게 처음으로 피아노를 가르쳤다. 소꿉장난처럼 가르쳤는데, 금세 자신을 따라 잡았다.

이런 쇼팽에게 처음 스승이 된 사람은 바이올리니스트인 보이치에흐 지브니였다. 쇼팽은 자신이 만든 곡을 스승에게 들려줬고, 지브니는 쇼팽에게 만든 곡을 악보로 정리하는 법을 알려줬다. 그러니까 쇼팽은 작곡을 배우지도, 악보를 적는 법도 모른 채 떠오르는 악상을 연주한 거다. 쇼팽의 나이 겨우 일곱 살이었다.

그렇게 7세에 첫 작품집이 출간됐다. “쇼팽은 천재다. 음악의 기본만 가르치면 나머지는 스스로 깨우칠 것이다.” 지브니는 이렇게 말하며 쇼팽에게 어떤 음악적 강요 없이 자유롭게 표현하게 했다. 이렇게 폴로네이즈 g단조와 b플랫 장조 두 곡을 발표했고,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일곱 살의 천재 탄생” 유명한 음악전문지 ‘파미엔토닉 바르샤프스크’는 이렇게 대서특필했다. 다음해에 라지비우 궁전에서 쇼팽의 첫 연주회가 열렸다.

민속음악과 오페라에 빠지다
 

쇼팽이 빈에서 처음 연주한 케른트너토르 극장.(사진출처ㆍ위키피디아)
쇼팽이 빈에서 처음 연주한 케른트너토르 극장.(사진출처ㆍ위키피디아)

쇼팽은 12세에 바르샤바 음악원장인 엘스네르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아버지가 프랑스어 교사로 일하는 기숙학교 리채움에서 다른 과목들을 공부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쇼팽의 부모는 이곳에서 귀족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숙을 쳤다. 쇼팽은 자연스럽게 이들과 어울리며 방학이면 그들의 영지가 있는 시골에서 시간을 보냈고, 바르샤바 도시 생활만 했던 그는 처음으로 농민들의 결혼식과 축제 등을 접하고 현지에서 민속음악을 들었다.

이때 들은 민속음악은 그에게 커다란 감흥을 줬고 이 기억은 훗날 그가 작곡한 마주르카에 큰 영향을 줬다. 마주르카는 폴란드 마조프세 지방에서 유래된 춤곡이다. 폴로네이즈도 마주르카도 폴란드 춤곡이다.

마주르카에 애정이 각별한 쇼팽은 작곡을 시작하면서 매해 마주르카를 썼는데, 총 61개를 썼다. 숨을 거두기 전, 기력이 쇠잔해 다른 곡은 손을 뗐지만, 마지막까지 손에 들고 놓지 않았던 곡 또한 마주르카다.

1826년, 쇼팽은 피아노 스승 엘스네르가 있는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한다. 이 시절 쇼팽은 피아노곡보다 오페라에 심취했다. 언젠가는 오페라를 만들 포부로 음악 보다 이탈리아어를 더 열심히 공부했다. 17세에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인 라 치 다렘마노’를 발표했고, 이 곡을 들은 슈만은 음악 평론지에 “여러분, 천재가 나타났습니다. 모자를 벗어주십시오”라며 쇼팽을 격찬했다.

이 해는 쇼팽에게 가슴 아픈 해이기도 했다. 여동생 에밀리아가 결핵으로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쇼팽은 친구 비아워브워츠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가련한 내 동생 에밀리아. 행복하던 우리 식구를 졸지에 엄습한 그 몹쓸 놈의 결핵. (중략) 나는 에밀리아의 묘비명을 잉크 대신 눈물로 썼다네. 아름다운 꽃 한송이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열네 살 내 동생 에밀리아는 생명이 살아 싹트는 화창한 봄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천국에 갔다. 에밀리라 쇼팽, 1927.4.10.”

쇼팽의 어머니는 그 이후 눈을 감는 순간까지 35년 동안 검은 옷만 입었다. 에밀리아가 없는 집에서 견디기 힘들었던 가족들은 건너편 크라신스키 궁전의 별관으로 이사한다. 이곳이 쇼팽이 폴란드에서 거주한 마지막 집이다. 2년 후, 쇼팽은 음악원을 졸업하는데 졸업 성적표에는 ‘쇼팽 프레데리크. 3학년 학생. 탁월한 능력. 음악적 천재성’이라고 적혀있다. 졸업과 동시에 쇼팽은 빈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두 번의 연주회가 빈에서 열렸고, 그 결과는 서두에 나온 바와 같다.

사랑을 뒤로하고 타국으로

빈에서 성공리에 연주회를 마친 쇼팽은 바르샤바로 돌아와 곧바로 연주회를 열었다. 이 연주회가 전문 연주가로서 폴란드에서 데뷔 무대이자 고별 무대가 됐다. 바르샤바는 그를 품기에는 이미 문화ㆍ예술적으로 뒤처져 있었고 음악은 특히 더했다. 쇼팽은 떠나기로 마음 먹는다. 이즈음 쇼팽은 바르샤바 음악원 동기인 소프라노 가수 콘스탄차 그와드코프스카를 마음에 품었다.

“나는 불행해질 거야. 여섯 달 전, 음악회에 나갔다가 내 이상의 여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고백도 못하고 혼자 가슴을 앓고 있으니…. 목련처럼 희고 청초하고 순수한 그녀의 모습. 그녀의 이미지로 나는 협주곡 ‘아다지오’를 썼어. 오늘 아침에 쓴 ‘왈츠’도 그녀에게서 받은 영감에서 비롯된 거야.”

‘아다지오’는 쇼팽의 피아노협주곡 2번 2악장, ‘왈츠’는 op.70 No.3을 말한다.

사랑에 빠진 쇼팽이 사랑과 부모와 친구들을 뒤로하고 홀로 타국으로 떠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게다가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에 맞서 봉기가 일어나고 있었고, 친구들은 총을 메고 혁명대열 앞에 섰다.(다음 편에 계속)

[참고 서적] 내가 사랑하는 쇼팽 | 유강호 | 북코리아
쇼팽, 그 삶과 음악 | 제러미 니콜라스, 임희근 옮김 | 포노,
내 친구 쇼팽 | 프란츠 리스트, 이세진 옮김 | 포노
쇼팽의 음악과 사랑 | 송숙영 | 범우
음악가와 친구들 | 이덕희 | 가람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