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연 시민기자의 ‘사연이 있는 클래식’
프레데릭 쇼팽 (5탄)

[인천투데이 문하연 시민기자]

리스트와 결별

쇼팽이 연주했던 플례옐 홀. 에두아르 르나르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한 목판화. (l`illustration 9. june. 1855)

연주회를 열기로 했지만, 무대 울렁증이 있는 쇼팽은 번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연주회 소식이 알려지면서 순식간에 많은 표가 팔려버렸다. 상드는 안절부절못하는 쇼팽이 오히려 재밌었다. “그는 포스터도 프로그램도 원치 않아. 청중이 많이 오는 것도 싫대.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찌나 많던지, 난 그에게 아예 촛불도 켜지 말고 청중도 없이 소리 나지 않는 피아노로 연주하지 그러냐고 했어.” (상드가 성악가 폴린 비아도르에게 보낸 편지 중)

리스트는 쇼팽의 연주회 평론을 쓰겠다고 자처했고, 실제로 쇼팽에게 매우 호의적인 기사를 썼다. 하지만 쇼팽은 리스트에게 이미 거리를 두고 있었다. 요란하게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방식, 언론플레이를 하며 탈베르크를 야비하게 공격하는 것이 싫었다. 결정적으로 리스트가 쇼팽의 빈 아파트에서 마리 플레옐과 밀애를 즐긴 일이 발생했다. 리스트는 동거 중인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의 눈을 피해 쇼팽의 아파트를 이용한 것이다. 마리 프레옐은 쇼팽의 후원자이자 친구인 카미유 플레옐의 부인이다. 그렇지 않아도 결벽이 있는 쇼팽은 허락도 없이 자신의 방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에 격노했다. 사람들은 위대한 리스트가 자처해서 쇼팽 연주회 기사를 써준다는 것이 큰 아량인 양 떠들었지만, 쇼팽은 마땅치 않았다.

“지난 월요일 오후 8시, 플레이엘 살롱은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가장 우아한 귀부인, 가장 유명한 예술가, 가장 부유한 은행가, 가장 고상한 신사, 요컨대 돈과 재능과 아름다움을 다 갖춘 귀족 태생의 사교계 엘리트 전체가 이곳으로 몰리는 바람에 마차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중략) 그들이 얼마나 열성적이고 주의 깊은지 흡사 종교적 숭배라도 바치는 것 같다. (중략) 그는 단순히 재주가 뛰어난 비르투오소, 건반의 대가가 아니므로, 그는 단순히 이름난 예술가가 아니므로, 그날의 연주자는 그 모든 것이자 그 이상이었다. 그는 쇼팽이었다!” (리스트가 음악 전문지 ‘가제트 뮈지칼’에 쓴 평론)

공연이 끝날 무렵,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 소절을 연주하고 있는 무대 위로 느닷없이 리스트가 올라갔다. 그리고는 피아노를 치고 있는 쇼팽을 무대 뒤로 데려갔다. 이는 무대 막바지에 쇼팽에게 쏠려야할 관심을 리스트가 뺏어버린 격이 됐다. 쇼팽의 연주 기사로 도배돼야할 신문에는 리스트의 기행이 실렸다.

리스트의 이런 무례한 행동에는 리스트의 연인인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의 이간질이 있었다. 마리와 리스트, 상드와 쇼팽은 마리가 운영하는 살롱에서 자주 만나며 친했던 시절이 있었다. 리스트의 마음이 멀어져가는 것에 절망한 마리는 상드와 쇼팽 사이를 질투했고. 어리석게도 쇼팽과 상드를 비방함으로 리스트와 단합(?)을 꾀했다. 마리는 쇼팽의 이 공연이 리스트의 명성에 도전하려는 의도로 기획됐다고 리스트에게 속삭였고, 이에 리스트는 돌출행동을 하게 이르렀다.

리스트는 이것이 쇼팽과 이별이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적당한 시기가 오면 그와 화해할 생각이었으나, 이를 계기로 쇼팽은 완전히 리스트에게 등을 돌린다. 물론, 그 이후에도 몇 번 마주할 기회가 있었지만, 쇼팽은 형식적으로 대했다. 음악계에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진 리스트와 결별은 훗날 상드와 헤어지고 인맥이 많지 않던 쇼팽을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가 됐다.

슬픔과 허전함

쇼팽의 누나 루드비카. 2차 대전 중 잃어버린 암브로지 미에로제프스키의 1829년 그림을 얀 자모이스키가 1969년에 복원. 폴란드 국립 쇼팽협회 소장.

 

하여튼, 이 연주로 쇼팽은 큰돈을 벌었다. 6000 프랑이 넘는 수입을 올렸는데, 당시 1프랑은 현재 가치 1만~2만 원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842년 2월 21일 자작곡들을 모아 연주회를 열었는데, 새로 만든 발라드 3번을 이때 연주했다. 비싼 입장료에도 사람들은 몰려들었고, 이때도 쇼팽은 5000프랑이 넘는 수입을 챙겼다. 이렇게 일이 술술 풀릴 줄 알았지만, 예측을 불허하는 게 인생.

쇼팽은 연주회가 끝나고 심하게 앓았다. 편도선과 입에 문제가 생겨 보름 동안 꼼짝을 못하고 누워있어야 했다. 미처 몸이 다 회복하기도 전에 친한 친구 얀 마투친스키가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을 들은 쇼팽은 아픈 몸을 이끌고 달려갔다. 쇼팽의 극진한 간병에도 불구하고 얀은 눈을 감고 말았다. 설상가상 어린 시절 폴란드에서 그의 피아노 선생님이었던 지브니의 사망 소식마저 들려왔다. 지브니는 쇼팽이 바르샤바를 떠나는 날, 마을 어귀에서 쇼팽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칸타타를 지휘해준 스승이다.

쇼팽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앙으로 갔다. 쇼팽은 대부분의 시간에 곡을 만들었는데, 이때 만든 곡이 발라드 4번, 폴로네이즈 6번, 스케르초 4번이다. 쇼팽은 몸을 추스르고 상드와 함께 4개월 후 다시 파리로 온다.

파리 상드의 집은 개방돼있어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의 아지트 같은 역할을 했는데, 여기 단골인 시인 하이네는 쇼팽을 일컬어 “사람 됨됨이, 연주 스타일, 작품성 등 세 가지 요소가 완벽히 균형을 이룬 음악가. 리스트 앞에서는 어느 피아니스트도 고개를 못 들지만, 쇼팽은 그렇지 않았다. 쇼팽이야말로 피아노의 라파엘로다”라고 극찬했다.

1844년 5월, 쇼팽의 아버지가 사망했다. 몸이 최악인 상태라 바르샤바로 달려가지 못하는 쇼팽은 식음을 전폐했다. 상드는 이런 쇼팽을 위로하기 위해 쇼팽과 각별히 사이가 좋은 누나 루드비카와 매형 요제프 칼라산티 예쳬예비츠를 파리로 초대했다. 7월 15일에 누나 부부가 파리에 도착했다. 누나 부부와 파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모처럼 쇼팽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루드비카와 상드는 죽이 척척 맞았다. 누나 부부와 함께 노앙으로 내려온 쇼팽은 사랑하는 두 여인의 웃는 얼굴을 보며 행복했다. 상드는 이때가 둘 사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누나 부부가 돌아간 뒤 행복했던 시간만큼 허전함도 배가 됐다. “종종 집안에 들어오면 혹시 누나가 놓고 간 물건이라도 없는지 살펴보게 돼. 우리가 코코아를 같이 마셨던 소파 옆의 그 자리만 바라보게 되지.” (쇼팽이 누나에게 보낸 편지 중)

상드와 이별
 

피아노 치는 쇼팽과 그것을 듣고 있는 상드. 우편엽서. Adolf Karpellus.1917. [사진 Wikigallery (Public Domain)]

파리로 돌아온 쇼팽에게 새로운 제자 두 명이 생겼다.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은 스코틀랜드의 갑부 제인 윌헬미나 스털링과 마르첼리나 차르토리스카 공주인데, 이 두 사람은 외로웠던 쇼팽 말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이후부터 상드와 쇼팽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큰 갈등의 표면적 원인은 상드 아들 모리스가 쇼팽과 상드 사이를 질투해서 사사건건 쇼팽과 갈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노앙에서 쇼팽의 방은 2층이었는데, 쇠약해진 쇼팽은 혼자 계단을 올라갈 수 없어서 하인이 들어서 옮겨줘야 했다. 쇼팽의 손발이 돼주던 이 하인을 별안간에 모리스는 해고해버린다. 이에 쇼팽은 반발했으나, 상드는 아들의 손을 들어준다. 쇼팽은 이 집에서 존재감을 잃어갔다.

게다가 상드는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줄기차게 아들만 편애했다. 딸 솔랑주는 마음 둘 곳이 없어 쇼팽에게 의지했고 그 바람에 가족끼리 2대2 구도가 돼버렸다. 이에 상드의 심기는 더 불편해졌다. 상드는 아픈 쇼팽을 돌보는 데 지쳐있었으며, 게다가 이미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쇼팽은 약해진 몸으로 상드와는 오래전부터 플라토닉한 관계만을 이어온 터라 열정에 불타는 상드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상드는 뚱하게 자신을 대하는 쇼팽이 점점 못마땅했다.

솔랑주가 조각가 장-바티스트 오귀스트 클레쟁제와 결혼했다. 쇼팽이 알아본 바로는 클레쟁제는 난폭해 애인을 때리고 도박을 일삼으며 불성실했다. 이를 상드에게 알렸지만, 상드는 무시했다. 오히려 쇼팽에게 결혼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고, 쇼팽은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솔랑드의 결혼 날짜를 알았다. 서운한 마음이었지만, 쇼팽은 거액의 축의금과 함께 행복하고 평온하게 살기 바란다는 편지를 솔랑드에게 보낸다.

결혼하자마자 클레쟁제는 본색을 드러내며 솔랑주가 지참금으로 가져온 돈을 흥청망청 다 써버리고 노앙으로 가 상드에게 돈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모리스와 클레쟁제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났다. 클레쟁제는 망치를 들어 모리스를 치려했고, 이에 흥분한 상드는 클래쟁제의 뺨을 때렸다. 클래쟁제는 상드를 가격했고, 상드는 나가 떨어졌다. 모리스가 총을 들고 오고 하인들이 총출동해 클래쟁제를 제압하면서 이 막장극은 끝났다. 상드는 딸 부부를 당장 내쫓았다.

쫓겨난 솔랑주는 임신 초기라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파리에 있는 쇼팽에게 편지를 보내 노앙에 있는 쇼팽의 마차를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연락을 받은 쇼팽은 아무 사실도 모른 채 그저 모녀의 말싸움 정도로만 생각하고 곧바로 상드에게 마차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쓴다. 상드는 솔랑주의 편을 드는 쇼팽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결국, 이 일로 상드는 이별을 선언한다. 1847년 6월 28일이었다.

[참고서적] 내가 사랑하는 쇼팽|유강호 지음|북코리아
쇼팽, 그 삶과 음악|제러미 니콜라스 지음|임희근 옮김|포노
내 친구 쇼팽|프란츠 리스트 지음|이세진 옮김|포노
쇼팽을 찾아서|알프레드 코르토 지음|이세진 옮김|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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