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건강한 지역 공동체를 향한 소통을 찾아서 ③

<편집자주> 지역공동체를 꿈꾸고 일구는 데서 지역 구성원간의 소통 즉, 항상, 정기적으로 뜻과 뜻이 맞닿을 수 있는 대화의 조건을 견고히 구축하는 것은 기본이라 할 수 있다. 구성원들이 소통하고 지역공동체를 일구는 데서 풀뿌리 매체(=언론)가 갖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연│재│순│서

1. 지역에서 소통과 풀뿌리매체
2. 인천지역 풀뿌리매체의 현황
3. 지역공동체와 풀뿌리매체
   사례1 - 만석신문

4. 지역공동체와 풀뿌리매체
   사례2 - 과천마을신문
5. 지역공동체와 풀뿌리매체
   사례3 - 공동체라디오
6. 지역공동체와 풀뿌리매체
   사례4 - 부산 반송2동사람들
7. 지역공동체와 풀뿌리매체
   사례5 - 구·군단위 지역신문
8. 지역공동체의 동반자 풀뿌리매체

▲ 만석동에 지어진 건물들의 모습은 만석동 60여년의 역사를 담고 있다. <출처·만석신문 61호>

발행부수 2000부, 1년에 아홉 번 나오는 신문, 게다가 이제 발행을 멈춘 신문. 얼핏 보기에 풀뿌리매체 사례로 그 속살을 들여다봐야하는 일을 멈칫거리게 한다. 그러나 이 신문이 10년 넘게 어느 일간지도 못하는 일을 해왔다니, 궁금해졌다.

<만석신문> 지면을 뒤적이다보니, 참 재밌다. 2000년 2월호 1면, 머리기사는 지역 현안이다. 만석부두에 포항제철에서 쇠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인 ‘슬래그’를 이용해 ‘콘크리트 강화제’를 만드는 회사가 들어서게 돼 주민들이 반발한다는 소식이다. 그 오른 편엔 6명의 환한 아이들의 얼굴이 실렸다.

‘우리 학교 들어가요’라는 제목으로 만석초등학교에 입학할 동네 아이들을 소개한 기사다. ‘만석신문은 우리동네의 환경문제와 이웃들의 진솔한 삶, 그리고 아이들의 꿈을 싣습니다’라는 표제에 대해 따로 설명을 듣지 않아도 뭘 담으려는지 그대로 느껴진다.

만석동 사람들 빼고는 별로 아는 사람이 없고, 구경하기도 힘든 작은 신문이지만 <만석신문>은 풀뿌리언론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희망을 주는 신문이다. 비록 지금은 발행을 멈췄지만, <만석신문>은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을까?

지역민과 소통 위해 만들다

‘괭이부리마을아이들’이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인천시 동구 만석동. 만석부두가 있고, 경인철도가 시작되는 곳으로 사람들보다 화차가 더 많았던 곳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지금은 유리, 목재 회사 등 큰 기업체의 공장들이 많다.

이런 동네에 1987년 기차길옆아가방이 문을 연다. 그리고 이듬해 기차길옆공부방이 된다. 지금의 기차길옆작은학교는 기차길옆공부방의 새 이름이다. 이 보금자리에서 아장아장 걷던 동네 아기들이 이젠 어엿한 청년이 됐다.

<만석신문>은 이 기차길옆작은학교를 만들고 운영해온 사람들이 1996년 만들었다. 기차길옆공부방 청년부 회원들이 신문을 가가호호 직접 배달하기 때문에 직장일이 없는 일요일에 나오기도 했으며, 처음 3년 동안 편집장 혼자서 만들다가 차츰 2명에서 3명, 4명으로 늘었다. <만석신문>은 공부방 아이들과 함께 커온 셈이다.

4년 전쯤 강화도로 귀농하면서 후배에게 신문일을 넘긴 심상범(41) 전 편집장은 “기차길옆공부방을 통해 이젠 어느 정도 주민들에게 우리 이야기를 하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소통을 위해 신문이라는 매체를 선택했다”고 <만석신문> 발행 배경을 들려줬다.

그는 또, “주민 대부분이 동네에서 자랐던 이들이고 가난한 동네라 그런지 만석동에 산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었지만 ‘우리동네’라는 정체성이 있었다”며 “그런 특징 때문에 신문이 나름대로 역할을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그는 “기차길옆공부방이나 만석신문 모두 같은 사람들이 일했는데, 공부방은 주민들 속으로 좁지만 깊게 들어간다. 이에 비해 신문은 넓게 관계를 맺는다. 두 가지는 하나로 묶여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과 꾸준히 만날 수 있는 게 매력

처음 생각처럼 <만석신문>은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 주민들의 생각과 그 속에서 대안을 찾아내려 노력했고, 사람들 이야기와 지역 현안을 다뤘다. <만석신문>에는 사건·사고기사가 거의 없다. 대신 만석동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신문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것, 이것은 만석신문이 가장 중요시했던 점이다.

이곳 한 주민은 “만석신문이 주민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사를 많이 썼다. 만석동 사람들에게 필요한 지역개발 소식이나 민원을 싣기도 했다. 민원이 신문에 실리면 구청에서 많이 시정해줬다. 신문에 실린 기사를 가지고 동네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고 말했다.

<만석신문>은 풀뿌리매체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주민들 속에 뿌리내려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심 전 편집장이 생각하는 동신문의 가장 큰 매력은 주민들과 꾸준히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신문을 돌릴 때 그냥 두고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서 전해줬다. 문을 두드려서 집안으로 들어가서, 이걸 누가 만들고 왜 만들려고 하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나온다는 이야기를 잊지 않았다. 사람들이 ‘아! 왔구나’ 하고 펼쳐볼 때까지 1~2년 정도 걸렸다. 처음에는 무시하고 거부당하기 일쑤였다”

그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작은 신문은 큰 신문이 할 수 없는 미세한 부분까지 다룰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아주 평범한 이야기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보고 절대 관조하지 말고, 화를 내고 실망하기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을공동체 사라지면서 발행 의미도 사라져

▲ 월간 <만석신문> 2004년. 3월 27일자
그런데 왜, <만석신문>을 계속 발행하지 않을까? 이에 대해 심 전 편집장은 “마을공동체가 사라져 더 이상 신문 발행 의미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만석동은 가난했고, 노인들이 많았다. 지리적으로 북과 가깝기 때문에 한국전쟁 이후 북이 고향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하지만 지금 절반은 돌아가셨을 것이다. 특히 주거환경이 열악한 저소득층 밀집지역(일명 아까사끼촌: 3~7통)에 주거환경개선 사업이 추진되고, 해안 일대에 해양파크가 조성될 계획이 세워지면서 공동체가 사라져갔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이러한 변화는 <만석신문> 2007년 10월호에도 나타나있다. 당신 신문은 ‘1985년까지 만석부두는 작약도와 영종도를 오가는 여객선의 선착장이 있었으며, 80년대 초까지 본선 화물을 실어 나르는 작은 화물선들의 하역 장소로 활용되는 인천의 주요한 부두 중 하나였다. 그 후 여객 선착장이 연안부두로 이전하면서 만석부두는 바다낚시를 즐기는 낚시꾼들과 인근 섬에서 조개와 바지락을 캐는 아주머니들이 바다로 나가는 부두로 변모해왔다.

하지만 최근 인천 연안의 북항 개발, 영종대교 건설, 연륙교 건설 등의 개발과 오염으로 생태계가 파괴되면서 바다를 의지해 사는 사람들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중략) 만석부두 주변에는 약 130가구가 살고 있다. 예전에 비해 빈집이 늘고 있으며 노인들이 살고 있는 집이 많다. 만석동 2번지는 바다와 부두, 주변 공장에 의지해 50년이 넘도록 가난해도 억척스럽고 따뜻하게 살았던 동네다.

하지만 주민들은 인천시와 동구가 때마다 들먹인 개발바람으로 외지 또는 주민들이 빈집을 사 놓고, 2002년 환경문제로 ‘기초소재(회사 이름)’와의 싸움에서 주민들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일들이 생기면서 예전 모습은 점점 사라져 아쉽다고 말한다. 2007.10.28. 임종연’

풀뿌리매체, 길게 봐야 한다

<만석신문>이 남긴 성과에 대해, 심 전 편집장은 주민 사이의 소통을 통해 소중한 마을공동체를 가꿔왔던 것, 한편으론 만석동의 과거와 현재를 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기록으로 남긴 점을 꼽았다. 

이에 대해 심 전 편집장은 “한번은 인천연감을 보았다. 1910년부터 10년 단위로 인천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아는데, 당시 동장이 누구냐는 등 만석동에 대해서 2줄 밖에 나오지 않았다. 만석신문을 보고 그 때 어떤 사람들이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를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또 “<만석신문>의 성과는 10년 넘게 꾸준히 나왔다는 데 있다”며 “신문을 만들려면 5년에서 10년, 길게 봐야 한다”고 일러줬다. 더불어 왜 신문을 만들려고 하는지가 명확해야 하며, 마음만으로 신문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글이나 편집이나, 실제로 역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신문이라는 건 내가 사람들한테 무엇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알리는 게 일차적인 기능일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 기사의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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