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걷기여행 44 - 2016 시베리아 바이칼 인문기행(3편)

▲ 하바롭스크 아무르강 전망대에서 바라본 아무르강의 석양.
드디어 시베리아횡단열차(TSR) 그 대장정을 시작한다. 오늘은 일단 하바롭스크까지 12시간 간 후, 하바롭스크에서 내려 1박 2일 둘러보고 모레 다시 이르쿠츠크까지 65시간을 갈 예정이다. 늘 꿈꾸던 일, 버킷 리스트 중의 하나였다.

1912년 완공된 블라디보스토크 역은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종착역이자 시발역이다.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사 중 하나로 손꼽힌다. 기차 역 계단 아래 플랫폼으로 내려가면 전시용 증기기관 열차와 TSR 9288km 기념비가 보인다.

이 역은 우리 민족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1909년 안중근이 이곳에서 하얼빈으로 떠났고, 1937년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할 때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출발했다.

이지상 선생의 지인인, 영화 ‘제보자들’ 등을 제작한 정성훈 감독이 사할린ㆍ우수리스크ㆍ블라디보스토크ㆍ소치ㆍ생페테르부르크 등지에 ‘코코치킨’이라는 프랜차이즈를 창업했는데, 오늘 기행 참가자 전원에게 치킨을 선물했다. 기차는 달린다. 친구들과 함께. 이게 바로 내가 꿈꾸던 장면이었다. 드디어 내 버킷 리스트 중의 하나였던 ‘시베리아횡단열차 타보기’가 실현되는 순간이다. 짐을 대충 정리하고 식당 칸으로 가서 발티카 맥주를 마셨다. 우리 칸으로 돌아와 보드카를 마셨다. 언제 쓰러져 잤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여행 3일째인 8월 2일, 지난밤 9시 넘어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시베리아횡단열차는 밤을 새워 자작나무숲과 들판을 홀로 외롭게 달려 하바롭스크에 무사히 도착했다.

오늘부터 내일까지 1박 2일간 하바롭스크를 안내해줄 한복순 여사가 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세가 70이 넘었는데 아직도 현역 가이드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사할린동포 2세로, 거제가 부모님 고향이다. 현역 시절 교사로 일하셨다.

하바롭스크의 지명은 17세기 중엽 러시아 탐험가 하바로프의 이름을 땄다. 국내 카프문학의 선구자였고 이기영과 한설야의 선배였던 조명희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 2차 세계대전 전쟁기념비와 ‘꺼지지 않는 불꽃’.
일단 숙소인 인투어리스트 호텔로 갔는데 시간이 일러, 짐은 못 풀고 화장실에서 대충 씻고 간단한 아침식사를 했다. 여행해보면 안다. 특히 기차여행을 해보면 안다. 편하게 누워 잔다는 것, 씻을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먼저 향토박물관으로 갔다. 연해주의 역사ㆍ풍속ㆍ자연에 관한 자료, 원주민의 생활용품 등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이다. 대략 20만점 이상의 전시품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 앞에 우수리스크에서 본 것과 똑같은 귀부가 있다. 아무리 봐도 이 땅의 원주민은 우리 민족이랑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랑 똑같이 생겼다.

호텔 체크인을 하고 누워서 조금 쉬었다. 4일 만에 편안한 침대에 누우니 천국이 따로 없다. 이렇듯 천국은 멀리 있지 않은데 가까운 곳은 보지 않고 자꾸만 멀리 있는 다른 곳만 두리번거린다.

점심을 먹으러 갔다. 어떻게 하다가 제정 러시아 시절 총독관저를 식당으로 쓰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다녀간 식당이라고 한다.

다음 행선지는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전쟁기념비와 ‘꺼지지 않는 불꽃’. 기념비 맞은편에는 지구본 모양이 있는 기념비가 또 있는데 아프가니스탄ㆍ체첸 등의 지역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다. 이유야 어쨌든 전쟁에서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놓았는데 왜 아무런 감흥이 오르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냥 단순히 글자로 생각하는 건가?

이번 시베리아횡단열차 기행의 최연소 참가자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가을하늘양이다. 내 대학 후배인 가덕현 선생의 큰딸이다. 그러므로 성이 ‘가’, 이름이 ‘을하늘’이다. 남동생 이름은 가을햇살처럼이다. 이름 참 예쁘다.

‘천국의 계단’을 지나 깜소몰 광장으로 올라갔다, 러시아 정교회 우스펜스키 성당이 있다. 성모승천사원으로 유명하다. 성화가 그려져 있는 장식품을 샀다.

▲ 레닌광장의 일부 모습.
레닌광장에 들러 비둘기를 구경하고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고 러시아혁명 시기 1918년부터 1920년 사이 백군에게 처형당한 분들을 위해 세운 위령비로 갔다. 위령비 바로 옆에 늪 비슷한 계곡이 있었다. 이곳에 시체를 던졌다고 한다. 잠시 후에 가볼 여성 혁명가 김알렉산드리아도 이곳에서 죽어갔을 것이다.

하바롭스크 중앙공동묘지로 갔다. ‘낙동강’의 소설가 조명희의 묘비가 있었던 곳이다. 그의 생가는 아파트를 짓겠다며 얼마 전에 모두 부숴버렸다. 조명희는 충북 진천군 벽암리에서 1884년에 출생했다. ‘카프’ 창설회원으로 활동했고, ‘조선지광’에 대표작 ‘낙동강’을 발표했다. 1928년 소련으로 망명했지만 KGB(소련의 정보기관인 국가보안위원회)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당했다. 가이드 한복순 여사의 증언을 들어보면, 1990년대까지는 조명희의 묘비가 있었는데 2000년대 들어와 없어진 것 같다. 혁명 시기에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추모비의 위에서 세 번째 이름이 조명희다.

불세출의 여성혁명가 김알렉산드리아가 살던 집으로 갔다. 칼 마르크스 거리 22번지, 지금은 상가로 바뀌었다. 그가 살았던 사실을 알리는 동판만 붙어 있다. 김알렉산드리아는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로서, 1910년대에 연해주 시베리아에서 활동한 가장 대표적인 여성혁명가다. 한국인이 조직한 최초의 사회주의혁명 정당인 한인사회당의 실제적인 설립 주체였다. 1885년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아버지 친구의 후원아래 블라디보여학교를 나왔다.

나중에 후견인의 아들과 결혼해 스딴께비치라는 성을 얻기도 했으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못해 남편과 헤어졌다. 그녀는 시베리아 내륙에서 일하는 고려인ㆍ중국인 등, 소수민족 노동자들 속에 들어가 일했고, 최초의 고려인 소비에트 당원이자 극동 인민위원회 외무부장이었다. 러시아혁명과의 연대, 반제, 반일로 독립을 이룩하고자 했던 한인 사회당 창당의 주역이었으며, 러시아 정교회 신부인 고려인 오와살리와 다시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식민지 조선 민중의 아픔을 잊지 않았다. “모든 지역의 노동자들의 자유를 위해 나는 죽습니다”라는 유언과 함께 하바롭스크 죽음의 골짜기에서 러시아 백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고작 34세의 나이였다. 그녀의 시신이 아무르강에 던져진 1918년 9월 18일 이후 하바롭스크의 시민 그 어느 누구도 그 강가에서 낚시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재형과 함께 우리 역사에서는 모두 잊힌 인물이다.

▲ 깜소몰 광장에 있는 우스펜스키 성당.
아무르강 전망대로 갔다. 전망대 뒤에 무라비예프 아무르스키의 동상이 서 있다. 그의 동상은 러시아 지폐에도 나온다. 비문에는 “아무르강 안에 최초로 발을 디딘 러시아의 명예로운 아들에게 바친다”라고 새겨져 있다. 1850년대 동 시베리아 총독이었으며 극동지역 개척에 힘썼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생맥주 한 잔 하려는데, 뭐가 뭔지 알 수가 있나? 그런데 이번 여행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통역을 맡은 최기훈군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키워준 할머니라, 슬픔이 더 큰 것 같았다. 돌아가기로 결정은 했는데 남은 우리가 문제였다. 내일부터 3일간 기차를 타야 하는데 큰일이었다. 기차 안에서는 가이드가 없으니 통역이 가장 필요한 기간이기도 했다. 극성수기라 현지에서 새롭게 통역을 구한다는 건 어불성설. 에라, 모르겠다. 벌어지지 않은 일은 걱정하지 말자. 어떻게 되겠지.

저녁을 먹고 아무르강 전망대로 다시 갔다. 날이 흐려 화려한 석양의 모습은 아니었으나 해 지는 아무르강이 아름답다. 아무르강은 중국에서는 헤이룽강(흑룡강) 또는 헤이허강이라고 부르고, 몽골인과 퉁구스인은 하라무렌(검은 강이라는 뜻)이라 부른다. 길이 4350km로 세계 8위다. 어족이 풍부해 25종이 넘는다.

숙소로 들어갔다. 승강기의 닫힘 버튼과 열림 버튼을 견우와 직녀처럼 떼 놓았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나? 화장실 벽엔 낯선 파이프가 매달려 있었다. 뭔가 했더니 빨래 건조대다. 파이프가 뜨겁다. 제법 유용하다. 아무리 여행을 많이 다녀도 처음 보는 것들이 꼭 있다.

차 안에서 밤새 보드카를 마셨지만 이곳은 또 육지이니 한 잔 안 하고 잘 수는 없어서 아무르 강가로 나갔다. 그런데 러시아 사람들은 아무도 술을 안 마셔서 숙소 지하 카페로 갔다. 한국에서 싸간 김을 가져와 안주로 먹는데도 그냥 내버려둘 뿐만 아니라 활짝 웃으며 사진도 찍어준다. 착하고 예쁜 여성이 지키는 카페라 그런지 맥주가 아주 술술 넘어간다. 도대체 이번 여행 중 앞으로 맥주 몇 병과 보드카 몇 병을 더 마시게 될까? 여행 3일 째 밤이 맥주잔 속으로 들어간다. 술 때문인가? 벌써 조금 지친다.(다음호에 계속)

시베리아횡단철도는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를 잇는 동서횡단철도다. 그 길이가 무려 9288km. 이 거리는 놀랍게도 지구 둘레의 약 3분의 1,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스물두 번 이상 달리는 셈이다.

열차에서 내리지 않고 줄곧 달려도 6박 7일이 걸리며, 달리는 동안 일곱 번이나 시간대가 바뀐다.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에는 열한 시간의 시차가 있다. 비행기로 직행해도 9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다. 시차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해 러시아 철도는 무조건 모스크바 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시베리아횡단철도는 크고 작은 도시 90여 개를 지나고, 아무르ㆍ예니세이ㆍ볼가강 등, 강 16개를 지나간다. 시베리아횡단열차는 약 50개의 역에 정차한다. 1891년부터 1916까지, 공사 기간이 무려 25년 걸렸다. 25년간 연간 10만명의 인부가 동원됐고, 건설 공구 6개에서 동시에 작업하고 있는 인원이 9만명에 달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니콜라이 2세는 알렉산드르 3세의 황태자로서 횡단철도 건설 사업을 주관했다. 그의 재위 기간 내내 진행했지만, 횡단철도가 완공된 지 4개월 후 일어난 2월 혁명으로 폐위됐다. 아나스타샤의 아버지인 니콜라이 2세는 그의 가족과 함께 자신이 건설한 시베리아횡단열차에 태워져 우랄산맥 근처 예카테린부르크에 유폐, 1918년 7월 16일 가족과 함께 살해됐다.(김창진의 ‘시베리아 예찬’ 참고)

글ㆍ사진/신현수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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