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걷기여행 44. 2016 시베리아 바이칼 인문기행(2편)

여행 이틀째인 8월 1일, 아침식사를 한다. 뷔페는 뷔페인데 자기가 접시에 담은 것만 계산한다. 여행은 언제나 온통 못 보고 못 겪어본 일투성이다. 그 유명한 러시아 흑빵을 먹었다. 그런데 메뉴에 샐러드가 없다. 채소가 귀해서인가? 러시아 사람들이 살찌는 이유를 알겠다. 어제 우수리스크 시민공원의 귀부(거북이 모양의 비석 받침돌)를 보고 나서 잠깐 들렀던 최재형 선생 마지막 거주지로 다시 갔다. 현재는 들어가 볼 수 없다. 리모델링을 위해 막아 놨다.

최재형 선생

▲ 독수리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블라디보스토크.
최재형 선생이 없었다면 안중근도 없었다. 그는 안중근 등, 독립운동가들을 적극 지원했다. 그가 가진 재산을 모두 바쳤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1860년 8월 함경북도 경원에서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부친을 따라 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이주했다. 이주 후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무단가출해 선원생활을 하고 상업 활동에 종사했다. 러시아말과 러시아 풍습을 익히며 생활기반을 닦았다. 러시아말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된 그는 러시아 관리와 한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통역 등을 하면서 군용도로 건설 등의 관급공사를 맡아 돈을 벌었다.

경제적인 성장뿐 아니라, 한인들 사이에서 인심을 많이 얻어 한인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1893년 연추에서 도헌으로 선출된 이후 재러 한인의 생활안정, 동포 자녀들의 교육사업 등에 힘썼다. 1896년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고려인 대표로 참석했다.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한국 식민지 정책이 본격화되자, 의병운동을 적극 후원하며 국권수호운동에 나섰다. 1908년 동의회를 조직해 이범윤 의병부대에 군자금을 제공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지원했고, 동포 신문인 <대동공보>와 <대양보>등을 창간해 언론사 사장으로서 동포사회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모의하고 사격연습을 했던 안중근ㆍ우덕순ㆍ조도선 등의 뒤에는 늘 그가 있었다.

일본군대에 비해 모자랄 것 없는 전투 장비를 갖춘 연해주 항일의병의 배후에도 그가 있었다. 안중근이 여순 교도소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발설하지 않고 보호했던 단 한 사람이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연추에 국민회를 설립해 회장으로 활동했고, 1911년에는 권업회를 조직해 회장에 뽑혔다. 권업회는 표면적으로는 한인들의 실업 진흥과 교육 장려를 활동목적으로 내걸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조국독립을 목표로 항일민족역량을 강화했다. 특히 1917년 러시아혁명 후에는 전로한족중앙총회 의원,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 등으로 활약하며 진보적 민족주의 활동을 펼쳐나갔다. 드디어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총장으로 선임됐다. 그리고 남아있는 재산을 미련 없이 조국의 독립에 쏟아 부었다.

▲ 블라디보스토크 거리의 사람들.
그러던 중 1920년 4월 5일 연해주 지역의 러시아 혁명세력과 한인 독립운동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일본군은 한인들을 대대적으로 체포, 고려인 300여명을 학살하고 한인마을을 방화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최재형 선생도 일본군에 붙잡혀 4월 5일 평생의 동료 김이직ㆍ엄주필ㆍ황경섭 등과 함께 피살됐다. 남은 아들과 딸, 사위 7명 중 5명도 스탈린 시대 때 숙청당했다.

선생은 국권을 상실한 조국을 위해 투쟁하다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재러 한인사회에서는 ‘러시아령 한인사회의 개척자’, ‘러시아 한인사회의 제일 인물’, ‘시베리아 동포의 대은인’으로 그를 추앙했다.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최재형 가(家) 맞은편에는 한때 대한국민의회 임시 회의실로 썼던 건물이 있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전로한인회 중앙회가 결성되고 이어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가 결성됐는데, 이 단체의 임시 회의실이다. 최재형 가 맞은편에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이 건물도 선생의 재정적 지원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대한국민의회는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되기 전 한성 정부, 상해 임시정부와 함께 이 지역을 대표한 해외 망명정부로 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을 대표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이었다.

최재형 가와 대한국민의회 임시 회의실로 썼던 건물을 둘러보고 버스로 돌아오는데 러시아 여자 어린이들이 땅재주를 넘고 있었다. 초등학교도 안 들어갔을 것 같은 아이들이 땅재주를 넘고 돈을 달라고 한다. 그리고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지금 구걸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공연 관람료를 정당하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상설 유허비와 발해 성터

▲ 수이픈강.
수이푼 강가에 있는 이상설 유허비로 갔다. 우수리스크 시내를 가로지르는 하천이 수이푼강이다. 이상설은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ㆍ이위종과 함께 참석, 일본의 침략행위를 세계에 알리려했다가 실패한 인물이다.

그는 1870년 12월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났다. 1906년 이동녕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간도 용정으로 가서 서전서숙을 설립, 동포 자녀의 교육과 항일민족정신 고취에 전력했다. 광복회는 지난 2001년 10월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수이푼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상설 유허비를 세웠다. 이곳에 유허비를 세운 이유는 그의 유언과 관련 있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고국에 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원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마라” 그의 혼령은 그의 유해가 뿌려진 수이푼강을 바라보고 있다.

유허비 근처에 있는 발해 성터로 갔다. 발해의 5경 15부 중 말을 방목해 기르던 솔빈부의 발해 성(크라스노야르성)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우수리스크 시내에서 4~5㎞가량 떨어져 있다. 외성의 전체 길이는 8㎞가 넘고 산의 절벽을 방어시설로, 수이푼강을 자연해자(垓字: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로 이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1950년대 한ㆍ러 합동 발굴조사로 내성 내부에서 주춧돌 100여개를 확인하면서 성으로 인정됐다. 축조 시기는 8~13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다수의 온돌구조도 발굴됐는데 이 성터에서 나온 온돌 집터와 유물 등에서 고구려계 즉, 발해로 추정한 것이다. 발해 이후 금나라 때까지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나온 유물들은 모두 블라디보스토크 극동대학교 등에 보존돼있다.

라즈돌로예 역과 신한촌

▲ 라즈돌로예역.
다음 코스는 라즈돌로예 역.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끌려가던 역이다. 역에 갔더니 마침 화물열차가 들어온다. 태어나서 제일 긴 기차를 봤다. 10분도 넘는 것 같았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1937년 연해주에서 삶을 일구던 고려인들이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인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다. 그 역이 라즈돌로예 역이다. 당시 고려인 18만명 이상이 야간열차에 실려 아무런 연고도 없는 황무지에 맨몸으로 놓였다. 그해 겨울 3분의 1 이상이 추위와 배고픔으로 사망했다. 바로 직전 한인들의 반발을 방지하기 위해 한인 지도급 인사 2500여명을 약식 재판해 무자비하게 총살했다.

신한촌으로 갔다. 일제강점기에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자리 잡고 있던 한인 집단 거주지다. 원래 ‘개척리’라 부르던 한인 집단 거주지는 시내 중심지에 있었다. 그러나 1911년 러시아당국은 페스트 창궐을 핑계로 개척리를 강제로 철거하고 시 서북쪽 외곽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개척리로부터 북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산비탈로, 높고 건조하고 잡초만 무성했던 곳이었다. 고려인들은 다시 피땀을 흘려 마을을 새로 만들었고 새로운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의미로 ‘신한촌’이라고 했다.

▲ 대한국민의회 임시사무실로 썼던 건물.
신한촌은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는 국외 독립운동의 중추기지였다.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거의 모든 무기가 공급됐으며,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의 무대이기도 하다. 현재는 대규모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변모해 과거 한인의 거주 흔적은 찾기 어렵다. 1999년 한민족연구소가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기리고 재러 고려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촌 자리에 신한촌 기념비를 설립했다. 기념비는 큰 기둥 3개와 작은 돌 8개로 이루어져 있다. 기념비에는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며,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적 정신이며…’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문을 잠가 놓아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그리스정교회 예배당은 가봤지만 러시아정교회 예배당은 처음 들어가 봤다. 하기야 두 종교는 거의 똑같은 종교지만, 성당에 의자도 없다. 러시아정교회의 역사는 최초의 통합국가인 키예프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988년 비잔틴제국에서 동방정교를 받아들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합국가의 국민을 하나의 종교로 포섭하기 위해 블라디미르 대공에게는 권위 있는 종교가 필요했다. 이슬람교ㆍ가톨릭ㆍ유대교ㆍ동방정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했는데 블라디미르는 러시아인답게 음주에 비교적 관대했던 동방정교를 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를리노예 그네즈 산과 극동함대사령부

▲ 극동함대사령관.
2시간여를 달려 어제 도착했던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나가 가장 전망이 좋다는 독수리전망대로 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도시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 좋은 낮은 산이 있는데, ‘독수리의 둥지’라는 뜻인 오를리노예 그네즈 산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정상 높이가 214m이다. 독수리 전망대에는 두 명의 동상이 있다. 비잔틴 교회의 전도자였던 키릴로스와 메토디우 형제다. 슬라브족의 선교를 위해 키릴문자를 발명했다. 이 둘은 모두 성인으로 추대됐다. 키릴문자는 현재 러시아 글자의 모체가 된 문자다. 기념품으로 마트로슈카 인형을 몇 개 샀다.

극동함대사령부로 갔다. C-56(영문명:S-56)라는 2차 세계대전 때 잠수함을 전시해놓았다. 당시 독일 군함 10척을 침몰시킨 유명한 옛 소련 태평양함대 잠수함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항구에 솔제니친의 동상도 서 있었는데 약간 뜬금없다. 365일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도 있었다. 2차 대전에서 산화한 무명용사를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한가운데 별모양의 구조물이 있고 불꽃이 타오르게 설계돼있다. 결혼식을 마친 신혼부부들은 혼인신고를 마치고 무명용사의 묘에 꽃다발을 바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 번화가에 있는 굼백화점에 들어갔다. 최재형 선생의 소유였다는 곳이다. 이 건물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연해주청사 앞 광장으로 갔다. 연해주청사와 혁명광장을 보고 기차를 타러 블라디보스토크 역으로 갔다. 1박 2일의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와 벌써 정이 들었는지 기사 아저씨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다음호에 계속)

글ㆍ사진/신현수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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