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정수의 알쓸신서 ⑯ 토끼는 당근을 먹지 않는다

위고 클레망 지음|박찬규 옮김|구름서재|2023

인천투데이=변정수 도서평론가|읽을 만한 책을 찾다 보면, 본의 아니게 제목에 낚일 때가 있다. 그건 대체로는 썩 낭패스러운 일이고 그 낭패감의 정체는 아마도 일종의 배신감일 터이다.

하지만 예외가 없는 건 아니다. 그 제목만으로는 기대하지도 않았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내용이지만, 오히려 뜻밖의 행운처럼 기분 좋게 책에 빠져들게 되기도 한다. 이 책이 바로 그런 드문 예외에 속한다.

이 책의 제목에서 나는, 대중들에게 잘못 알려진 동물들의 생태를 소상히 알려줌으로써 실상과는 거리가 먼 상식을 바로잡아주는 내용의 가벼운 지식 산책을 기대했다.

좀 더 욕심을 내자면 전통적인 고정관념 때문이건 대중매체가 유포한 왜곡된 이미지 때문이건 사람들이 잘못 알게 된 과정을 추적하기까지 한다면 금상첨화일 것 같았다. ‘우리가 동물에 대해 알아야 할 진실’이라는 부제마저도 다른 내용의 상상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웬 걸. 내가 기대했던 내용은 머리말에 그야말로 ‘토끼는 당근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이 달랑 언급된 데서 그쳤다. 정작 본문으로 들어가자 부제와는 딴판으로 ‘우리가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잔혹함)에 대해 알아야 할 진실’들이 거침없이 쇄도했다.

과연 모든 동물 가운데 오로지 인간만이 ‘지능’이나 ‘자의식’을 지니고 있는지처럼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근거로 동원되곤 하는 상식적인 전제들에 도발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1장까지는, 그래도 신선한 지적 충격을 즐기며 가볍게 읽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본론은 가벼운 마음으로 지적 산책을 즐길 수 있는 내용이 결코 아니었다. 물론 어렵고 딱딱하고 지나치게 전문적인 내용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중학생이나 좀 총기 있는 초등학교 상급 학년이 읽어도 충분히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알기 쉽고 깔끔하게 정리한 보기 드물게 대중적인 필치가 인상적이었으니까. 한마디로 책장은 막힘없이 술술 잘 넘어갔다.

아담한 판형에 볼륨도 얄팍해서 몇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다. 문제는 이 책이 제기하는 너무나 묵직한 ‘윤리적’ 질문들을 피할 재간이 없었다는 데 있다. 이건 결코 그저 가볍게 읽어치워서는 안 되는 책이다.

이 책은 공장식 축산(2장), 동물 쇼와 동물원(3장), 사냥(4장), 서식지 파괴(5장) 따위를 통해 인간이 동물들에게 저지르고 있는 잔혹한 참상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득력 있게 고발한다. 나아가 그런 행위들에 대해 광범위하게 유포된 옹호론의 허구성을 성공적으로 폭로해낸다.

그 적나라한 실상을 낱낱이 알고서도 무분별한 육식에 탐닉하거나 감금된 동물을 구경거리로 소비하는 따위의 일에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최소한의 윤리적 감각이 마비된 강심장의 소유자일 것이다.

요컨대 이 책은 적어도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윤리’라는 것이 있다는 우월감만큼은 산산이 부숴 놓는다.

이 책이 고발하고 있는 잔혹한 짓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면서도, 또는 그런 일이 저질러지도록 방치하거나 소극적으로나마 협조하면서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부심이 가당키나 한가.

동물 쇼나 동물원은 이전부터도 딱히 즐겼던 건 아니라서 그리 큰 부담 없이도 좀더 단호하고 의식적으로 거절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아가 워낙에 사냥이나 낚시를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취미로 여기고는 있었으나 남의 취미생활에 왈가왈부하기도 난처해서 노골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렸으나 이제는 좀더 떳떳하게 내 소신을 밝힐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곤혹스럽게 고백하건대, 이 책을 읽었다고 육식을 당장 중지하고 견결한 채식주의자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더는 채식주의자들을 나와는 상관없는 별스런 취향을 지닌 이들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는 못할 것 같다.

사람마다 처지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육류 소비를 획기적으로 줄여야만 한다는 대의에 동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면, 그것을 앞장서 실천하는 채식주의자들에게 더 우호적인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데 주저할 이유는 없을 테다.

*알쓸신서는 알아두면 쓸데있는 신비한 서적 이야기의 줄임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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